#582.
“아니, 팀장님, 그건 무리한 요구입니다. 솔직히 배터리 산업에 대해서 우리가 알게 뭡니까. 그건 배터리 전문 업체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제가 배터리 쪽에 아는 지인을 통해서 물어봤는데, 이런 기술은 아예 이전에 없었습니다!”
그랬다.
최민혁 실장이 던진 배터리 기술이 본격적으로 연구되는 시점이 정확히 10년 후다. 그 시점을 기준으로 배터리 특허 숫자가 5년에 걸쳐서 폭증한다.
즉, 15년이 지난 후에야 배터리 산업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시점에서는 그걸 아는 사람이 없는 게 당연했다.
아직 CDMA 핸드폰 산업조차 걸음마 단계이니 말이다.
임기석 부장도 공채덕 과장의 말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전혀 배터리 사업을 조사하지 않은 것은 문제야. 앞으론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네.”
평소와 다른 냉랭한 임기석 부장의 말에 공채덕 과장은 결국 반박하지 못했다.
권우영 사원을 비롯한 신입 사원들은 다들 눈동자를 굴리기에 바빴다. 그들은 지금 상황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임기석 부장은 굳이 그런 신입 사원을 더 질책하지는 않았다.
“대신 지금 우리 앞에 주어진 일은 최대한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 해.”
“…알겠습니다.”
공채덕 과장이나 김홍준 과장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들은 임기석 부장이 왜 저렇게 똥고집을 부리는지 이유를 안 것이었다.
‘또 야근이구나.’
문제는 그 야근의 끝이 안 보인다는 거다.
아직 스마트폰도 걸음마 수준인데, 여기에 배터리까지 하라니. 신입 사원 10명을 투입했는데도 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권우영 사원을 비롯한 고정호 사원 역시 혀를 찼다.
그들도 공장에 있을 때 나름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서류 일이 그보다 더 심하다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다만 이 일이 왜 중요한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이런 배터리 사업이 돈이 되는 건가?’
* * *
KM 전자 기획 팀, 특허 팀을 비롯한 관련 부서는 배터리 아이템까지 늘어나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건 공장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외부에서는 이 일을 심각하게 바라보지는 않았다.
당장 배터리 사업이 큰돈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런데 LC 화학 쪽은 좀 달랐다. 그들은 미래 기술을 인수한 사람이 벨린 투자, 즉 최민혁 실장이라는 것을 알자 한 걸음 물러나기는 했지만 면밀하게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살폈다.
이 보고는 당연히 LC 그룹 전략 기획실에 올라갔다.
이 정보를 뒤늦게 안 LC 전자 상무 한봉준은 아들 한병수 기획 2팀 부장을 호출했다.
“한 실장은 진급했다고 해서 요즘 정신을 놓고 있는 거야?”
“네?”
뜬금없는 질책에 한병수 기획실장은 몸을 움찔 떨었다. 그가 기획 2팀 부장에서 지난달에 기획실장으로 승진하면서 그간 일을 등한시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아버지 한봉준 상무의 눈치만 봤다. 그는 사람을 접대할 때는 웃음을 늘 짓고 산다. 그런데 막상 뒤통수를 칠 때는 또 가차 없었다.
“KM 전자에 대응을 잘한 것은 인정한다. 그렇다고 그놈들을 일방적으로 믿지 마. 비즈니스란 것은 필요에 따라서 얼마든지 뒤통수를 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보면, 오성 전자처럼 쉽게 배신하는 타입은 아닙니다.”
“글쎄, 그건 모르지.”
“제가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최민혁 실장이 굳이 반격하는 타입은 아닙니다.”
“하면 지금까지 최민혁 실장이 먼저 당해서 반격했다는 소리야?”
“네.”
한병수 기획실장은 최근까지 최민혁 실장이 한 행적을 하나씩 예를 들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의외로 설득력이 있었다.
최민혁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상대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당장 최훈열 전무만 해도 최민혁 실장을 매장하려고 했고, 이를 도운 쪽이 외가인 DL 그룹 쪽입니다. 지금의 DL 통신 김현탁 본부장이 감방에 간 것도 비슷합니다.”
KM 그룹, DL 그룹 내에 얽힌 사내 정치 싸움은 어지가한 한국 기업은 다 아는 내용이었다.
한봉준 상무 역시 그걸 모르지 않았다.
“…네 말은 IPS-LCD 같은 사업을 우리에게 넘긴 이유도 사내 정치 갈등과 관련이 있다는 소리를 하는 거야?”
“전 확신합니다. 최민혁 실장은 오성 그룹이나 우리 LC 전자가 끼어드는 것을 막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니 사전에 손을 썼다고 생각합니다.”
“설마 우리가 이익을 보면 그것 때문에 KM 전자 눈치를 보게 된다고 말하는 거야?”
한병수 기획실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실제로 눈치를 보고 있지 않습니까? MP3 특허도 그중 하나입니다.”
한봉준 상무는 잠깐 한병수 실장의 말을 고민해 봤다. 확실히 아들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지금까지 최민혁 실장은 굳이 적을 늘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제야 그룹 사장단 회의에 올라온 안건 하나를 던졌다.
다름 아닌 LC 화학이 올린 보고서였다.
“그럼 설마 이것도 그 연장선이란 소리야?”
“……?”
한병수 실장은 의아한 눈으로 보고서를 살펴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 LC 화학에서 미래 기술을 인수하려고 한 겁니까?”
“그쪽에서 전자부품 연구소와 공동으로 연구하던 특허가 문제였다. 그 기술은 지금 연구 중인 차세대 배터리에 꼭 필요했으니까.”
“흠.”
“그런데 그 과정에서 최민혁 실장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를 먼저 공격했어.”
“…하지만 최민혁 실장이 내막까지 몰랐을 것 아닙니까?”
“글쎄.”
한봉준 상무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들의 지적이 틀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일은 설사 오해라고 해도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사실 미래 기술이 연구하던 배터리 특허는 핵심 특허 중의 하나기는 했다.
원래는 LC 화학이 배종구 사장에게서 이 특허를 사들이려고 했다.
그런데 배종구 사장이 LC 화학의 제안을 일방적으로 거절했다.
LC 화학은 몇 가지 다른 방법을 써도 대안이 없자 결국 전자부품 연구소 허종진 팀장과 손을 잡았다. 김종구 선임 연구원에 대한 작업이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병수 실장은 대략 나와 있는 보고서만으로 내막을 짐작했다.
“…아니, 그런데 이상하군요. 최민혁 실장은 미래 기술의 가치를 어떻게 안 겁니까?”
“그건 몰라. 하지만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야.”
한봉준 상무가 다시 던진 서류는 다름 아닌 특허청에서 올라온 특허였다.
KM 전자가 막 출원한 특허 서류를 과거 오성 전자가 써먹던 수법처럼 빼 온 것이었다.
한병수 실장은 특허출원 날짜가 불과 지난주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혀를 찼다. 그는 특허 등록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나온 특허 내용을 결국 하나씩 읽었다.
하지만 그는 특허 내용을 읽으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가 특허 의미를 알아서가 아니었다.
“…이거 배터리 특허 아닙니까? 아니, KM 전자에서 왜 갑자기 배터리 특허를 출원한 겁니까?”
“계속 읽어봐!”
“아, 네.”
한병수 실장은 한봉준 상무의 눈치를 보면서 소파에 앉았다. 그다음에 내용을 다시 하나씩 꼼꼼하게 읽었다. 곧 탄식하다가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이런 씨발, 아, 죄송합니다.”
“됐어. 끝까지 읽어보라니까!”
특허 내용을 제대로 이해해서 보이는 반응은 아니었다.
그저 톱니바퀴처럼 절묘하게 짜여 있는 특허 항목 때문이었다.
분리막 하나만 놓고 봐도 다양한 형태의 특허가 존재했다.
구조, 형성 원리에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이 항목을 수용성 고분자, 무기물, 수지와 같은 다양한 물질로 나누어놓았다.
즉 다른 형태로 업체에서 치고 들어올 구멍을 다 막아놓은 것이다.
핵심 특허는 50가지 안팎이었는데, 이를 보완한 특허는 10배가 넘었다.
이 숫자만 해도 무려 500가지 항목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다시 기생해서 꼬리를 친 특허 숫자는 6배 가까웠다.
다 합해서 무려 3,000건이 넘었다.
이게 모두 배터리와 관련된 특허 출원 건수였다.
‘최 실장 이 새끼, 미친 것 아냐?’
LC 화학이 노리던 특허는 핵심 특허 50가지 중의 하나였다.
정확히는 청구항 3~4가지에 해당했다.
한병수 실장도 LC 화학이 노리고 있던 특허에 대해 몰랐다면 이 3,000건이 넘는 특허가 왜 중요한지를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LC 화학이 노린 특허의 가치를 읽고서야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IPS LCD 특허만 해도 기가 막히던데, 이 배터리 특허는 더하네요.”
한봉준 상무는 힐끗 한병수 실장을 째려봤다.
“IPS LCD 특허에 대해서 넌 몰랐다는 소리야?”
“IPS LCD 특허가 왜 그렇게 복잡한 건지 알 수가 있습니까? 저는 IPS-LCD만 해도 골치가 아파요. 최민혁 실장 그 새끼가 요구하는 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당연했다.
IPS-LCD 원천기술과 양산은 전혀 다른 문제이니까.
아이러니한 사실은 경쟁사인 오성 전자도 최민혁 실장에게서 양산 제안을 받았다는 점이다.
한병수 실장은 솔직히 오성 전자와 몰래 손을 잡을까 생각을 하다가도 포기하고 말았다.
일종의 담합행위.
그런 행동을 했다간 최민혁 실장이 그걸 빌미로 무슨 짓을 할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한봉준 상무는 한병수 실장의 불만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 배터리 사업이 그렇게 단순해 보이냐?”
“네? 아니, 그건 아니에요.”
한병수 실장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미 CDMA 폰 개발이 시작된 것은 알고 있지?”
“알아요. 뭐, 오성 전자 쪽 때문에 더 회사에서 쪼는 것 같던데, 제가 모를 수가 없잖아요.”
“CDMA가 중요한 것이 아니야. 디지털 방식의 통신 시장이 열리고 있다는 것이 중요해. 오성 전자만 해도 미국, 러시아 수요가 폭발한 것을 대비해서 연간 생산량을 200만 대로 잡고 있어.”
“공장 설비를 늘린다는 것은 저도 이미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배터리가 들어간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네.”
“설마 그게 다라고 생각 하느냐? 당장 노트북에 들어가는 배터리 물량은 또 달라. 그건 용량이 커야 해서 덩치가 제법 크다.”
“…….”
한병수 실장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생각보다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LC 화학이 왜 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왜 구멍가게 수준의 ‘미래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건지 알 것 같았다.
미래 기술이 문제가 아니었다.
미래 기술이 지금 개발 중인 차세대 배터리 관련 원천기술이 문제였다.
심지어 한봉준 상무가 자신을 이 자리에 불러 경고하는 것도 말이다.
“이번 일은 나에게도 중요하지만 너에게 더 중요하다. IPS-LCD 양산 때문에 실장으로 승진했잖아. 이번 배터리 사업 일만 잘 처리하면 바로 이사를 달게 될 거다.”
그건 단순히 승진의 문제가 아니었다.
경영권 승계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것이니까.
한병수 실장은 그제야 긴장했다.
“…알겠습니다.”
“내가 더 잔소리는 하지 않으마.”
한병수 실장은 그제야 한봉준 상무에게 인사한 후에 상무실을 나섰다. 그는 한봉준 상무에게 받은 서류를 살피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골치 아프네, 지금 와서 이걸 어떻게 하란 소리야? 이미 특허출원도 끝났고, 벌써 시제품 개발 진행까지 된 것 같은데…….’
* * *
KM 전자도 이전과는 달리 정보 조직을 꽤 조직화했다.
이 조직을 관리하는 사람은 김명준 과장이었다.
그는 KM 전자의 덩치가 점점 커지자 자신의 과거 군 후배를 비롯한 정보기관에서 믿을 만한 이들로 뽑아 그 숫자를 대폭 늘렸다.
최민혁은 나날이 늘어나는 경호 조직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굳이 과한 김명준 과장의 행보를 타박하지 않았다.
그는 인생 1회 차에서 비참한 경험을 해봤기에 차라리 과한 조직이 오히려 부족한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이들 조직은 주로 KM 그룹, DL 그룹, 한부 그룹을 타깃으로 삼았다.
그런데 오성 그룹, LC 그룹에 대한 감시 역시 소홀하지 않았다.
그가 굳이 정영일 사원에 대해서 보복하지 않은 이유였다.
최문경 부회장이 잘 몰라서 그렇지, 정영일 사원과 비슷한 내부 스파이를 꽤 박아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