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0.
나중을 위해서라도 눈빛을 반짝이는 최영란 본부장을 이대로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으음, 다 이야기하면 길어지니까. 간단히 설명하자면 앞으로 디지털 시대가 열린다고 했잖아?”
“어, 그런데?”
“디지털 시대가 열리면 당장 발전할 사업 중의 하나가 모바일이야. 그러면 모바일 관련 제품들이 쏟아질 거고, 이 안에 들어갈 부품은 주목을 받을 거야.”
“가만, 그중에 하나가 배터리란 거야?”
“그렇지.”
“하지만 배터리 시장이 크지는 않잖아? 내가 조사한 바로 지금 배터리 기술은 문제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어. 당장 환경 오염도 문제잖아.”
실제로 Ni-CD 전지는 환경 오염 문제로 말이 많았다.
하지만 Ni-MH 전지는 고온 특성이 너무 나빴다.
또한 납 축전지는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리튬이온전지는 안정성 때문에 적용하기 쉽지 않다고 들었어. 폭발한다는 소리도 있으니까.”
“그러니 새로운 기술이 필요하잖아.”
“현실적으로 그게 어렵다고 하던데? 배터리는 화학 기술 기반이라서 전자 분야와는 상황이 다르니까.”
“하는 데까지 해봐야지.”
최민혁은 신기한 눈으로 최영란 본부장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생각보다는 배터리 기술에 대해서 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래서 내심 더 웃고 말았다. 배터리 기술은 잘 알면 알수록 한계가 있다는 것이 더 확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최영란 본부장은 잠깐 최민혁을 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잘은 몰라서 이 정도로 하는 거야. 그런데 사람들이 바보는 아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신중하게 하는 것이 좋아.”
“충고 고마워.”
“다 널 걱정해서 하는 소리야.”
“어.”
최민혁은 최영란 본부장이 사무실을 떠난 후에 피식 웃고 말았다.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다라? 정말 재미있는 소리잖아. 최영란 누나는 자신이 정작 말하면서도 자신이 말한 의미를 잘 모르니까.”
* * *
IP 시티폰 사업은 IP 시티폰 사업 매각 협상이 진행된 이후에 더 빠르게 달아올랐다.
최민혁 실장이 이미 IP 시티폰 원천기술 매각 대금과 관련해서 매각 대금 기준을 잡아놓았기 때문이다.
KD 통신은 결국 이 자금을 제외한 수익만 계산하면 되는 셈이다.
최용욱 회장으로서는 KD 통신 사업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아쉬웠다.
차라리 독자적으로 사업을 해도 나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럴 경우 리스크 역시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건 다름 아닌 자기 손자 최민혁 실장에 대한 리스크였다.
손자 최민혁이 자신의 등에 칼을 꼽지는 않겠지만, 최문경 부회장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는 본의 아니게 IP 시티폰 사업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장승일 실장의 방문은 그도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2,800억이라…….”
최용욱 회장은 딱히 분노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손자 최민혁 능력에 그저 기가 찰 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IP 시티폰 원천기술이라고 해봐야 기술 개발 시작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그 금액이 나오는 건가?”
장승일 실장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그도 나름대로 추론을 해볼 뿐이다.
“K투스 기술 개발을 했을 때, 무선랜 역시 따로 준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 이미 VOIP 기술을 준비했고, 시티폰 사업이 나오자 하이브리드 형태의 IP 시티폰을 고안한 것 같습니다.”
“그다음에 삼우 통신을 인수합병 해서 제조 기반을 얻었다는 소리야?”
“네, 만약 KD 통신이 없었다면 IP 시티폰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을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2,800억이 전혀 터무니없지는 않습니다.”
최용욱 회장은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2,800억은 고작 그런 금액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덩치가 컸기 때문이다.
“2,800억이라니. 민혁이 그놈은 참 돈을 쉽게 번다는 생각이 들어.”
“…….”
장승일 실장도 딱히 최용욱 회장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가끔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면, 최민혁 실장은 항상 그랬기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별다른 문제는 없어? 민혁이 그놈이 설마 딴짓을 할 수도 있잖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IP 시티폰 사업이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중국 시장의 수요가 꽤 좋습니다.”
최근 미국이 중국을 밀어주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규모 역시 점점 커지는 상황이었다.
그 덕분에 중국 내의 분위기도 한결 달랐다.
중국 내의 GDP가 점차 증가하면서 값싼 통신을 찾는 욕구는 더 강해진 것이다.
IP 시티폰은 이런 중국의 입맛에 잘 맞는 상품이었다.
최용욱 회장은 그런 점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이동통신 사업 시장이 커지면 IP 시티폰에는 좋지가 않잖아?”
“그런데 그건 3~4년 후에나 벌어질 일입니다. 지금 이 시점은 상황이 다릅니다. 더욱이 통신료가 문제입니다. 당장 CDMA만 해도 IP 시티폰과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
그는 장승일 실장이 내놓은 중국 시장 보고서를 살피면서 동남아 시장도 간과하지 않았다. 확실히 IP 시티폰 사업은 지금이 적기였다.
‘오성 전자, 샐로먼 브러더스도 이것을 노린 것일까?’
“으음, 좋아. 하지만 IP 시티폰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 민혁이 그 녀석이 또 다른 꼼수를 쓸지 모르니까. 난 아무리 생각해도 그 녀석이 이 IP 시티폰 사업을 이용해서 문경이 그놈에게 보복할 거라고 봐.”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최용욱 회장은 장승일 실장이 내민 또 다른 최민혁 실장의 보고서를 살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미래 기술? 뜬금없는 배터리 사업에 왜 관심을 두는 거지?”
“최민혁 실장님을 만난 최영란 본부장님 말에 따르면, KMP-02에 들어갈 배터리를 자사 기술로 대체할 모양입니다.”
“KMP-01과는 다른 모양이지?”
“이번 KMP-02가 KMP-01보다 업그레이드가 되어서인지 전류를 많이 소모하는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배터리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실제로 IPS-LCD가 적용된 KMP-02의 배터리 용량에는 문제가 있기는 했다.
전력 소모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200mAH 용량의 건전지를 사용하기에도 무리가 따랐다.
장승일 실장은 배터리와 관련된 문제점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아니면 소니 같은 배터리 업체에서 커스텀 방식 배터리를 주문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배터리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갑니다.”
“설마 그래서 아예 자체 배터리를 설계한다는 소리야? 그게 쉬운 일이야?”
“배터리 개발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다만 원하는 성능의 배터리는 좀 다릅니다.”
배터리 자체 개발만을 본다면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전압, 수명, 방전 속도 문제를 총체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외주를 주는 것이 오히려 맞을 수도 있었다.
“차세대 배터리를 따로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리튬이온 배터리라고? 여기 보고서대로라면 폭발한 위험성이 높다고 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대안을 찾지 않았나 싶습니다.”
“좋아,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배터리 시장이 큰 것도 아니잖아?”
“그건 아닙니다. 모바일 기기 시장이 점점 커지는 상황이라서 시간이 갈수록 시장이 늘어날 겁니다. 어쩌면 그래서 최민혁 실장님이 다른 사업과는 달리 배터리는 직접 개입했을 수도 있습니다.”
“흠.”
최용욱 회장은 뒤늦게야 시간이 지나면 배터리 시장이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10년 후에는 상황이 좀 다르겠어. 모바일 기기가 시장에 쏟아지면서 배터리 시장 역시 폭발할 수도 있어.’
당장 모바일 기기 시장이 뜨겁지 않은 지금에서는 그런 상황을 예측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장승일 실장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상용화하겠다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 당장 KMP-01 출시 이후에도 MP3 시장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최민혁 실장님이 MP3 특허를 공개한 이후에 업체들 역시 MP3 개발에 열을 올리는 중입니다.”
실제로 보고서에 나와 있는 MP3 업체 숫자만 무려 30개가 넘었다. 여기엔 오성 전자를 비롯한 국내 대기업 역시 포함된다.
놀라운 것은 에플의 차세대 제품 중에 하나가 MP3란 점이다.
“…무시할 수는 없겠어.”
최용욱 회장도 그제야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곧 IP 시티폰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그래도 우리가 꼭 관심을 둘 사업은 아닌 것 같아. 일단 민혁이 그 녀석의 동향을 좀 더 살펴봐. 특히 문경이 그놈하고 엮여 있는 쪽 말이야. 난 민혁이 그 녀석이 날린 미사일에 문경이 그놈뿐만 아니라 우리 KM 그룹까지 영향을 받지는 않을까 걱정이니까. KM 산업과는 달리 KD LCD, KD 통신은 문경이 그놈하고 엮여 있으니, 특히 잘 살펴봐.”
“…알겠습니다.”
장승일 실장도 최용욱 회장의 서재를 나서면서 고민에 빠졌다. 최용욱 회장의 지적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긴 우리 쪽이 유탄을 맞을지도 모르지. 이 일은 좀 면밀하게 확인을 해봐야겠어.’
* * *
최용욱 회장의 시선이 어쨌든 간에 KMB-01 개발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더욱이 김종구 선임 연구원이 이미 기본적인 뼈대를 만들어놓았다.
여기다가 약간 손만 써도 된다는 의미다.
덕분에 시제품은 금방 나왔다.
게다가 성능까지 실로 놀라웠다.
그 조용한 김종구 선임 연구원이 호들갑을 떨었다.
“대, 대박입니다. 세상에 1,200mAH 용량입니다!”
보통 사용되는 AA 배터리 용량이 고작 200mAH, 고용량이 400mAH인 것을 고려하면 무려 3~6배나 되는 용량이다.
이전의 KMP-01에 사용된 배터리 용량이 300mAH인 것을 감안하면 무려 4배였다.
KMP-02가 IPS-LCD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전자부품이 추가된 탓에 전류 소모가 2배로 늘어나서 생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한 셈이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모양을 변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작 이 배터리에 더 놀란 사람은 조성돈 팀장이었다.
“…마, 맙소사, 정말 성공했군요.”
배터리 용량 문제는 기획 팀 내에서도 꾸준하게 제기된 문제였다.
에플에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양한 업체를 만나고는 있었지만,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배터리 제작이 아직도 양산으로 넘어가지 못한 이유다.
스티븐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 답을 찾을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여전히 대안을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이 정도면 쓸 만하죠?”
“그, 그 정도가 아닙니다. 전원 부분에 대한 불만은 계속 나왔습니다. 실제 사용 시간이 8시간이 채 안 되어서 말들이 많았으니까요.”
그리고 이건 KM 전자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최근 MP3 특허 풀을 사들인 다른 기업들 역시 고민하는 문제다.
그들이 MP3 플레이어의 덩치를 키우거나 하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배 사장님, 들었습니까?”
“아, 무, 물론입니다.”
배종구 사장 역시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그 역시 김종구 선임의 도움을 얻어서 배터리 시제품을 같이 만들었지만, 그 결과를 장담하지 못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윤종수 전무는 그저 입을 딱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갑자기 최민혁 실장이 끼어들었다는 것만 들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려 1,200mAH 용량의 배터리로 나올지는 상상도 못 했다.
최민혁이 다시 말했다.
“양산하는 데 얼마나 더 걸리겠습니까?”
배종구 사장은 그제야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말했다.
“네? 아마 다음 달부터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원래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게 가능한 것은 시제품으로 생산한 물건의 품질이 워낙에 좋아서였다.
한 가지가 더 있다면 이미 배종구 사장이 배터리 양산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다 만들어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배터리 사업에 빚까지 내서 무리수를 뒀었다.
최민혁은 물론 자잘한 문제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일정을 더 당기는 것이 중요했다.
“좋네요. 그러면 일단 천 개만 한번 제작해서 우리 쪽에 납품하세요.”
“…알겠습니다.”
두 사람과 김종구 선임은 여전히 믿기지 않은 눈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특히 김종구 선임은 왜 최민혁 실장이 무리수를 뒀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와, 이 정도 물건이면 50억이 아니라 100억에 인수해도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