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9.
장승일 실장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 내막을 추론하기는 힘들었다. 기존에 최민혁 실장이 보이던 행보와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전혀 밝혀진 것이 없어? 앞뒤가 안 맞잖아. 살인이라도 한 거야?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연결 고리는 KMP-01 뿐입니다.”
KMP-01에 들어가는 배터리 물량이 적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크다고 하기에도 어려웠다. 굳이 이 안에 들어가는 배터리까지 자체 개발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당장 지금 KM 전자와 관련된 가장 큰 일은 역시 IP 시티폰 사업 매각 건이다. 매각 대금이 무려 2,800억이다. 결코,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여러 기업이 투자한 KD 통신이기에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다.
KD 통신을 뺀다면 한국 10대 대기업이나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도대체 최 실장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장승일 기조실 실장도 이제는 최민혁 실장이 불가사의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 일은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KM 그룹 역시 KD 통신에 꽤 적지 않은 자금을 투자했기 때문에 최민혁 실장의 행보는 확인해 두어야 했다.
“다른 정보는 없어?”
“…죄송합니다. 최근에 KM 전자 보안이 강화된 탓에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영일 사건 때문이다.
이 일이 명분이 되어서 KM 전자의 보안은 한층 강화되었다.
심지어 CCTV와 같은 보안 장비까지 더 강화되었다.
“비서실에 최근 입사한 정영일 그 친구 때문에 그래?”
“네. 쉬쉬하지만 KM 전자 기획실에 있다가 갑자기 KM 그룹 비서실로 옮긴 일 때문에 말이 많습니다.”
KM 그룹 내에도 이중 첩자란 설부터 시작해서 별의별 이야기가 다 돌았다. 다들 쉬쉬해서 그럴 뿐이지, 분명히 뭔가 있다고 생각했다.
장승일 실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IP 시티폰은 걱정되는 사업이야. 이전과는 상황이 다르잖아. 자칫 이 일에 뭔가 있다면 사전에 파악해야 해!”
* * *
KM 그룹 본사 건물 안에는 KM 산업도 같이 자리하고 있다.
다만 KM 산업의 속성상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오가지 않았다.
그런데 유독 예외가 있는데, 바로 KM 산업 본부장실이었다.
오늘도 이곳에는 이십여 명의 임직원이 정신없이 오가는 중이었다.
ATI 투자 덕분에 비메모리 공장 증설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공장 인허가를 비롯한 납품 문제 역시 산적해 있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었다.
ATI 투자 덕분에 뜻밖에 적지 않은 바이어가 KM 산업을 찾았다.
최영란 본부장은 이런 분위기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한 시간 단위로 바이어를 만나서 납품 건과 관련된 마라톤 회의를 열었다.
다행히 장승일 실장은 그녀가 쉬는 시기를 때맞추어서 나타났다.
“많이 바쁜가 봅니다.”
최영란 본부장은 장승일 실장을 보자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장 실장님이라면 없는 시간도 빼야죠.”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최영란 본부장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장승일 실장을 절대 무시하지 않았다. 그녀는 직접 일어나서 다과를 내왔다.
장승일 실장도 사람인데, 수수한 최영란 본부장의 접대에 피식 웃고 말았다.
“설마 이런 환대를 받을지 몰랐습니다.”
“그보다 더한 것도 해야죠.”
쾌활하게 웃는 최영란 본부장은 확실히 일반적인 재벌 3세와는 많이 달랐다.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녀는 최민혁 실장과 비슷했다.
아니, 두 사람은 쌍둥이처럼 많이 닮았다.
장승일 실장 역시 채윤집 집사에게서 최영란 본부장에 대해 간혹 듣기는 했지만 직접 보고서야 그 말이 오히려 과소평가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최민혁 실장님이 최영란 본부장님을 밀어주는 이유가 있었구나.’
실상 최민혁 실장과 최영란 본부장 사이의 일은 이미 KM 그룹 내에 파다했다.
최민혁 실장이 최영란 본부장을 밀어준 후에 그녀의 상황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다시 KM 그룹으로 돌아온 최영란 본부장은 무서울 정도로 실적을 쌓기 시작했다.
최용욱 회장조차 이제는 최영란 본부장을 인정할 정도였다.
그녀와 관련된 이야기는 결국 계속 사내 임직원들 사이에 돌았다.
그녀가 점점 자기 능력을 키울수록 부정적인 이야기는 쑥 들어갔다.
그리고 왜 최용욱 회장이 굳이 태도를 바꾼 것인지도 깨달았다.
장승일 실장 역시 최영란 본부장의 능력을 그제야 인정했다.
그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잘 생존할 수 있고, 심지어 자기 일을 키울 수 있는 인물이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KM 산업의 분위기다. 늘 제자리걸음에 안주해서 공무원 조직 같았던 회사가 이제는 오히려 벤처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장승일 실장은 소소한 이야기로 우선 대화를 푼 다음에 넌지시 최민혁 실장의 최근 행적을 말해주었다.
최영란은 본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미래 기술요? 안테나 만드는 회사라고요? 전혀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
“그런 회사에 왜 최민혁 실장님이 관심을 두는 걸까요?”
“글쎄요.”
최영란 본부장은 생뚱맞은 얼굴을 한 채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녀가 아는 민혁이라면 배터리 사업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상황이 상황이었다.
“맙소사 IP 시티폰 사업부를 2,800억에 매각한다고요?”
그녀가 감탄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최용욱 회장이 해외 비자금 일부를 밝히면서 투자를 끌어온 세력이 바로 ATI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오고 간 자금 규모도 2,800억은 넘지 않았다.
“그 사업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요. 역시 민혁이답네요.”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 죄송합니다. IP 시티폰 매각과 같은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중에 고작 20억 가치에 불과한 미래 기술을 인수했다라? 확실히 이상하네요.”
최영란 본부장의 태도에서 전혀 이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안 장승일 실장은 자신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말았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은 다른 뜻이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IP 시티폰 사업이 중요해서입니다. 본부장님이 모른다면 혹시 짐작 가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 이 일은 최용욱 회장님에게만 따로 보고가 갈 겁니다.”
“그렇게 말씀을 한다고 해도 제가 아는 일이 아니라서요.”
“한번 확인을 부탁해도 될까요?”
“네? 제가요? 아니, 장 실장님이…….”
“최 실장님은 저도 이제 부담스러운 분입니다.”
“아, 아, 그래요.”
최영란 본부장은 혀를 내둘렀다. 그녀가 아는 장승일 실장은 KM 그룹에서 최용욱 회장을 제외하고 누구 눈치를 보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하긴 지금의 민혁이라면 예외지.’
* * *
최민혁은 퉁명스러운 어조로 툴툴거렸다.
“미래 기술? 그건 어디서 들은 거야?”
최영란 본부장은 최민혁 태도를 보고서야 장승일 실장이 뭔가 잘못 안 것이 아닌가 싶었다.
“장 실장님.”
“아, 장 실장님…….”
최민혁은 갑자기 방문한 최영란 본부장 말에서 장승일 실장의 이름이 바로 나오자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챘다.
뭐, 그녀 성격을 잘 아는 터라 딱히 구박하지는 않았다.
그게 먹힐 성격도 아니고.
다만 그가 놀란 것은 전혀 다른 일 때문이다.
“장 실장님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안 거야? 설마 정영일 그 친구 외에 또 다른 첩자라도 있는 거야?”
“KM 그룹 기조실에서 하는 일이 원래 계열사 동향을 감시하는 거잖아. 당연히 자기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미래 기술을 인수했다면서? 그러면 당연히 정보가 돌 수밖에 없잖아.”
“그런가? 아니, 그러면 비서실도 있잖아.”
“그 짝은 모르는 눈치야. 아니, 정확히는 IP 시티폰 특허 분석 때문에 정신이 없는가 봐. 금액이 금액이다 보니까. 그거 민혁이 네가 만든 상황이잖아. 무려 2,800억을 불렀다면서?”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최민혁도 피식 웃고 말았다. 우리 첫째 큰아버지 딴에는 나름 과거 일을 경험 삼아서 열심히 뭔가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IP 시티폰은 그 사업 자체가 함정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나도 자신 못 하는데, 누가 알겠어?’
솔직히 IP 시티폰은 원자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겉을 화려하게 덮어놓아서 모를 뿐이다. IP 시티폰 옆에 있으면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는 건 불가피하다.
거기에는 최용욱 회장 역시 빠지지 않았다.
‘장승일 실장이 아마 그걸 걱정하는 것 같아. 확실히 능력은 능력이라니까.’
문제는 IP 시티폰 속에 담겨 있는 비밀은 누구에게도 말해줄 수 없었다.
실상 최문경 부회장뿐만 아니라 샐로먼 브러더스 역시 노리는 상대니까.
최민혁은 가능한 샐로먼 브러더스가 IP 시티폰 사업을 키우고, 키워서 막대한 타격을 받기를 원했던 것이었다.
그런 고로 아무리 최영란에게도 진실을 말해 줄 수는 없었다.
그건 배터리 사업 역시 마찬가지다.
“KMP-01 판매 수가 늘어날수록 배터리도 쉽게 볼 수가 없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자급자족을 검토 중이야.”
“배터리는 전혀 모르잖아?”
“배터리라고 해서 별것이 있겠어. 그냥 적당한 기업 인수해서 하면 되지. 미래 기술이 꽤 괜찮아 보이더라고.”
“미래 기술은 안테나 제조 회사잖아?”
“아, 그쪽에서 배터리 쪽에 투자를 제법 했더라. 그걸 보고 겸사겸사 해서 인수할 생각, 아니, 인수했어.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냐.”
“…뭔가 있구나.”
“아무것도 없어.”
“나도 투자해도 돼?”
최민혁은 냉큼 거절했다.
“안 돼.”
“에이, 또 이런다. 혼자만 먹다가 결국 탈이 날 거야.”
“…KM 그룹에서 눈독을 들일 정도의 사업 규모는 아니야.”
“아니, 우리 KM 그룹이기에 해야 할 사업이 아닐까. 메모리 쪽은 괜찮은 것 같은데?”
최민혁은 머리를 굴리는 최영란 본부장의 행동에 탄식하고 말았다.
“…지금 하는 일은 어쩌려고? 비메모리 사업이 만만해 보이는 거야?”
“아, 그렇지. 내가 하는 일이 있었구나.”
칭얼거리는 최영란 본부장 모습은 도저히 평소의 그녀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더욱이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다.
“…우리 아버지에게 밀고하면 안 되겠지?”
“…….”
최민혁은 가자미눈을 한 채로 최영란 본부장을 째려봤다.
굳이 최문경 부회장이 배터리 사업에 대해서 안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다만 문제가 번거로워질 확률이 높았다. 정확히는 최문경 부회장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입을 놀리면 생기는 문제 때문이다.
‘안 그래도 LC 화학이 엮여 있잖아. 만약 오성 그룹에서도 뒤늦게 이 사실을 알면 문제가 복잡해져.’
“자꾸 동맹끼리 그러면 안 되지.”
“글쎄, 내가 보기에는 이번 일은 생각보다는 빨리 알려질 거야. 장승일 실장이 안 이상 할아버지도 금방 알 테니까.”
최민혁은 장난삼아서 고집을 부리는 최영란 본부장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최용욱 회장이 너무 자기 일에 관여해도 곤란했다. 사실 ATI 투자는 그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8년 후에 있을 일이 앞당겨진 것이니까. 그것도 할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할 일이고, 결국 할아버지가 ATI 지분도 첫째 큰아버지에게 넘겼다는 뜻이니까.’
이 문제도 뒤로 거슬러 올라가면 배후가 따로 있었다.
‘아버지가 문제야.’
그의 선친 최병문 상무가 벨린 투자를 가지고 한 결과는 생각보다는 놀라운 것이었다.
당장 ATI 지분이 그 대표적이니까.
문제는 최민혁 자신이 그 투자 속에 숨겨진 정보까지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ATI는 밝혀진 투자 성과 중의 하나였을 뿐이니까.’
만약 최문경 부회장이 최용욱 회장의 유산을 모두 상속받는다면 두 사람 사이의 전쟁은 장기전으로 흘러갈 공산이 컸다.
그가 굳이 이번 기회에 IP 시티폰을 키워서 무리수를 둔 배경이었다.
최민혁은 깍지를 낀 채 깊이 고민했다. 그는 가능한 전장을 국내로 좁혀서 계속 최문경 부회장 자금을 소진하게 시킬 생각이었고, 필요하다면 최영란이란 아군을 동원해서 함포 사격을 계속 밀어붙여서 최문경 부회장의 병력을 소모할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