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6.
최민혁은 고민한 끝에 우선 ETR에 내려가서 오현종 팀장을 만나 한 가지 부탁했다.
“전자 부품 연구원 말입니까?”
“아무래도 ETRI와 같은 성향의 연구소이니, 아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요.”
“물론 있기는 합니다만 굳이 왜 전자 부품 연구원 쪽에 관심을 두는지 모르겠습니다. KM 전자는 그쪽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 않습니까?”
“새로운 사업에 필요합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알면 안 되는 겁니까?”
“굳이 숨길 일은 아니죠. 배터리 사업입니다.”
“배터리라?”
오현종 박사는 놀란 눈으로 최민혁 실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KM 전자는 다른 대기업과는 달리 선택과 집중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 차에 배터리 사업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마디 충고할까 하다가 곧 그 말을 삼키고 말았다.
최민혁 실장이 모를 리가 없을 테니까.
최민혁도 오현종 박사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무시했다.
“특히 배터리 쪽으로 연구하는 이들을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현종 박사는 신기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거야 문제가 안 되기는 하지만 단순히 그 정도면 됩니까?”
그는 상대의 은근한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도와주면 더 좋습니다.”
“좋습니다.”
* * *
오현종 팀장은 이미 CDMA 연구도 있고 해서 최민혁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했다.
그가 나선 덕분에 전자부품 연구원 쪽과는 약속 잡기가 쉬웠다.
전자부품 연구원에게 약속도 잡지 않고 방문해서 담당자를 만나는 일도 쉽게 해결되었다.
최민혁은 오현종 팀장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악수만 했다.
[아, 최민혁 실장님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덕분에 전자부품 연구원 중에 최민혁 실장을 보고 놀라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호가호위는 당연히 아니다.
이보다는 최민혁 실장 자신의 명성 덕이 컸다.
전자부품 연구원 중에는 최민혁 실장을 우상시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전자부품 연구원들은 얼마든지 배터리 관련 원천기술을 도와주기로 약속했다.
물론 그 이유는 있다.
그들이 지금 진행하는 배터리 기술은 아직 돈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저런 논문을 쓰기는 하지만 효율은 생각보다 많이 떨어졌다.
형식적인 논문에 불과한 것이다.
더욱이 이 연구를 지원한 곳은 정부 통신부였다.
이동통신 핵심 과제로 10억 원을 지원받아서 진행한 일이었다.
결국은 빛 좋은 개살구 수준의 연구였기에 최민혁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또한 별다른 탐욕을 내는 이도 없었다.
그들로서는 최민혁 실장이 배터리 사업을 하는 것 자체가 그저 구경거리였다.
이번 배터리 담당자인 김종국 선임 연구원은 그저 최민혁 실장에게 잘 보이려고만 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전자부품 연구원을 통해서 기술 지원을 받기로 한 미래 기술 배종구 사장이 허겁지겁 나타났다.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기술 지원을 중단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마치 공장에 불이 난 사장처럼 질려 있는 배종구 사장은 패닉에 빠졌다. 그는 지금 일어나는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묘한 눈으로 배종구 사장을 쳐다보았다. 자신과의 관계는 다름 아닌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사실 워낙에 나이 차이가 나서 서로 잘 모른다.
그가 배종구 사장을 알게 된 것도 인생 1회 차에 고등학교 동창을 찾아다니던 와중 면식을 조금 익힌 것에 불과했다.
놀라운 것은 고작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것만으로 배종구 사장이 최민혁을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17년 후의 일이지만.’
배종구 사장은 사람이 아주 좋아서 고생을 많이 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인맥을 꾸준히 쌓았다.
그게 그 자신의 자산이 된다.
결국에는 역경을 이겨내고 홀로서기에 성장하니까.
최민혁은 전생에 진 빚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부분은 배종구 사장을 롤 모델로 삼았다. 그는 배울 만한 점이 많았다.
‘호구란 점을 빼고 말이야.’
배종구 사장이 그린 비전은 아주 간단했다. 이 배터리 기술을 이전받아서 이동전화에 적용할 생각이었다. 성공만 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오성 전자 측과는 이미 구두로 영업 계약을 했을 정도이니까.
하지만 최민혁은 그 계약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배종구가 사장으로 있는 미래 기술은 오성 전자와의 계약만 믿고 무리하게 투자를 하다가 자금 압박으로 벼랑 끝으로 몰리기 때문이었다.
‘결국 한강에서 뛰어내렸지만 운 좋게 살기는 살았지.’
그 이후에 배종구 사장은 다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난관을 극복한다.
하지만 그건 미래의 일.
지금 당장은 피로에 지쳐서 팍 썩어버린 배종구 사장은 전형적인 중소기업 사장의 모습이었다.
최민혁은 전생에서 자신이 벼랑 끝에 있을 때 도와준 배종구 사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고등학교 선배 이전에 흔치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지. 절대로 배신할 사람은 아니었다. 뚝심도 있고, 인내심도 있다. 배터리 쪽을 맡기기에는 나쁜 선택은 아니니까.’
다만 인생 1회 차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래서 크게 당황한 김종구 선임 연구원에게 눈총을 줬다.
“저분은…….”
김종구 선임 연구원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난입에 식은땀을 흘렸다. 자칫하다가는 최민혁 실장과의 관계도 틀어지기 때문이다.
“자, 잠깐만요. 배 사장님, 사실 지금 진행하는 연구 성과가 썩 좋지가 않습니다.”
배종구 사장이 버럭 소리쳤다.
“김 선임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시간만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게 하…….”
그는 고민했다. 최민혁 실장의 차가운 시선은 마치 판사처럼 자신을 판단하려 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괜한 거짓말을 했다가는 최민혁 실장에게 찍힌다.
김종구 선임 연구원은 결국 배종구 사장에게 90도 폴드 인사를 했다.
“죄, 죄송합니다. 솔직히 연구 성과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중간에 끝낼 수는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성과를 내야 했습니다!”
갑자기 나온 진실.
그 이야기는 흔하디흔했다.
형식적인 연구였다.
딱히 속일 의도는 아니었다.
일단 끝까지 연구를 해보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봐서는 결과가 어려워 보인다.
거기서 굳이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한다는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옆에서 구경하는 이들은 다들 혀를 찼다.
그래도 눈치가 있는 배종구 사장은 마치 아들을 잃은 사람처럼 넋을 놓고 말았다.
“그, 그럴 리가… 마, 말도 안 돼!”
미래 기술의 자금 사정이 좋지가 않았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오직 배터리만 밀었다. 이 기술만 성공한다면 회사는 도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다 헛된 희망이었다.
그때 나선 것은 바로 최민혁이었다.
“잘되었네요. 어차피 배터리 생산 업체가 필요했는데, 미래 기술이 그쪽에 경험이 있다면 한번 밀어줄 수도 있습니다. 제 제안이 어때요?”
그는 최민혁의 말을 듣고서야 뒤늦게 상대가 최민혁 실장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아, 마, 맙소사. 당, 당신은 설마 최민혁 실장님이었습니까?!”
“알아봐 주시니 감사하네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제 제안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물론 최 실장님의 높은 명성은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배터리 기술이 없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요? 하긴 그것도 문제이군요. 제가 그 부분을 채워야 하니, 아무래도 미래 기술의 가치는 좀 떨어진다고 생각해도 되겠죠?”
“그거야…….”
“지금 봐서는 배종구 사장님도 힘든 것 같은데, 배터리 기술 쪽은 저희 쪽에서 맡겠습니다. 미래 기술은 생산만 하는 거죠. 물론 우리 쪽에서 지분 투자를 하겠습니다. 우리 회사가 필요한 배터리 수량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 네? 네.”
배종구 사장은 갑작스러운 최민혁 실장의 제안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실상 최민혁 실장과 동행한 조성돈 팀장 역시 크게 당황해서 최민혁의 말에 끼어들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최민혁 실장이 조성돈 팀장의 말을 듣지 않았다.
“미래 기술 지분을 넘겨야 저도 여기 우리 팀장님을 만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의 말에 당황해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게 무슨…….”
최민혁은 계속해서 배종구 사장을 밀어붙였다.
“이미 다 들었습니다. 미래 기술 재정 사정이 안 좋다는 것을요. 더욱이 지금 사장님은 이 배터리 기술만을 쳐다보고 있었지 않습니까?”
“…….”
그는 아직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최민혁은 바로 밀어붙였다.
“80% 지분을 40억에 인수하죠.”
“…….”
배종구 사장은 결국 황당한 눈으로 최민혁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저 마른침만 꿀꺽 삼키고 말았다.
회사 지분 가치를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비록 지금은 저렇게 추레해도 10년 후에는 3,000억 매출을 기록하는 회사의 사장이될 사람이었다.
사람 성격이 좋아서 이런저런 안 좋은 일을 자주 경험하지만 결국은 성공하는 이다.
최민혁은 전생의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금액을 올렸다.
“탐탁지 않으신가요? 좋습니다. 80% 지분에 50억으로 하죠. 하지만 더 이상은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배터리 원천기술은 우리 쪽에서 보유하고 있으니까.”
“그게 좀…….”
다른 이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하지만 최민혁은 굳이 이 자리에서 주절주절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배 사장님이 먼저 지분을 넘겨야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엔 차세대 배터리 관련 기술도 포함합니다. 아마 보면 깜짝 놀랄 겁니다. 절대로 손해를 보는 일은 아닙니다!”
“…….”
배종구 사장은 크게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의 제안은 분명 나쁘지 않았다. 회사 지분 가치를 아무리 높이 쳐줘도 20억이면 넘치니까. 더욱이 회사 상황도 아슬아슬했다.
아니, 실상 아슬아슬한 정도가 아니었다.
배종구 사장이 마침 전화를 받았는데, 채권자가 공장에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화로 시끄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기로 고소한다는 이야기다.
이미 몇 번 경험한 일이었다.
실제로 은행에서도 압류하겠다는 경고까지 들었던 것이다.
배종구 사장은 이를 악물었다. 그나마 안테나 쪽이라도 매출이 작년처럼만 나왔으면 괜찮았을 테지만 그 물량도 이미 다른 중견기업에 빼앗긴 지가 오래다.
그는 마지막으로 최민혁에게 소리쳤다.
“도대체 왜 저에게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기로 KM 전자는 이미 어지간한 대기업보다 더 덩치가 크지 않습니까?”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덩치가 커서 그런 겁니다. 우리가 배터리 생산까지 할 생각은 없으니까.”
“네?”
“사실 오성 SDI, LC 화학 쪽에서 배터리를 공급받으면 그게 더 편합니다. 그쪽은 품질관리가 중소기업보다는 좋으니까. 말하자면 배종국 사장님에게 기회를 주려고 하는 겁니다!”
그나마 안면이 있는 김종구 선임 연구원이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진심으로 그가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받기를 원했다.
“…아,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같이 간 법무 팀 직원을 이용해서 우선 계약서를 만들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그냥 계약한 것이었다.
송금 역시 마찬가지다.
무려 50억이 바로 이체되었다.
“……!”
배종구 사장은 관리 팀에서 온 전화를 확인하고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자고 일어나니, 돈벼락을 맞은 것이었다.
‘황당하네.’
최민혁 실장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인지는 몰랐다. 솔직히 이게 꿈인가 싶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계약 마무리가 끝나자 필요한 사람만 데리고 회의실로 향했다.
* * *
최민혁은 김종구 선임 연구원이 안내한 연구실에서 잠깐 휴식을 취한 후에 진지한 얼굴로 자신이 설계한 배터리와 특허 기술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건 아직 아이디어 특허 수준에 불과합니다. 다만 특허출원을 했다는 것을 유념해 주기 바랍니다. 따라서 당장 실험이 필요합니다. 검증도 필요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