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3.
김현탁 본부장은 어금니가 부러지도록 지난 원한을 곱씹으며 이를 악물었다. 최민혁 실장의 상판을 보자 지난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하지만 오늘 만남은 그에게도 중요한 일이었다.
이번 일이 어떻게 보면 KD 통신 사장의 역량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심호흡까지 해서 일단 진정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최민혁 실장의 면상에 주먹을 한 방 날려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라면 한 대 맞고, 검찰에 고발해서 이슈를 터뜨릴 인간이기 때문이다.
“제가 알기로 최민혁 실장님은 IP 시티폰 사업에는 손을 떼기로 한 것으로 압니다.”
최민혁은 당당하게 말했다.
“물론이죠. 한국 시티폰 사업에는 더 손을 쓰지 않을 겁니다.”
허탈한 김현탁 사장은 잠깐 멈칫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만, 그러면 다른 나라 시티폰 사업에는 끼어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최민혁 실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IP 시티폰 사업부가 매각된다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은 IP 시티폰 사업부를 팔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상황이 가변적이니까요. 언론 반응도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괜히 오기가 생겼습니다.”
김현탁 사장은 불안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또 미친 짓을 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해보니, 실제로 그럴 것 같았다.
“…그, 그게 무슨 뜻입니까?”
최민혁은 똥줄 타는 김현탁 사장을 보면서 내심 배꼽을 잡았다. 다만 겉으로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최악의 경우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단 얘기죠. 전 헐값에 우리 사업부를 매각할 생각이 없으니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해외 시티폰 시장을 개척할 겁니다.”
김현탁 사장은 경영진이 걱정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생각도 못 한 난관에 크게 당황했다. 최민혁의 말대로 해외에서 시티폰 사업을 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문제는 그렇게 되었을 때 생기는 특허료였다.
“자, 잠깐만요. 아직 IP 시티폰 사업 매각에 대한 일이 정해진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성급하게 결정할 문제는 아닙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가만, 그러면 KD 통신에서 우리 IP 시티폰 사업부를 제값에 인수라도 하겠다는 말입니까?”
“그, 그게…….”
제값이란 말에 김현탁 사장은 내심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일이 또 최악으로 흘러갔다. 최민혁 실장 이 새끼가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과 정확히 일치했다.
최민혁은 팔짱을 한 채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한 가지 제안을 던졌다.
“얼맙니까?”
“…그게.”
그는 힐끗 박태정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크게 당황한 김현탁 사장을 대신해서 박태정 비서실장이 나섰다.
“최 실장님은 얼마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질문을 질문으로 받다니. 꽤 무례한 분이군요.”
“아직 IP 시티폰 가치가 시장에서 명확하게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솔직히 언론에서 거품을 키워서 그렇지 시티폰은 제약이 많습니다. VOIP 폰 역시 네크워크 기반이라 유선 전화기와 비교해도 성능이 떨어집니다.”
“그건 기술로 극복 가능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유선 전자 업체가 VOIP 폰에 대해서 반발할 겁니다. 자기들 밥줄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박태정 비서실장은 통쾌하게 말을 이어갔다.
김현탁 사장이 옆에서 열렬하게 옹호했다.
최민혁은 어이가 없었다. 결국, 그도 김현탁 사장을 벼랑 끝으로는 몰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공감하죠?”
“…네.”
“좋네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지금은 몇 달 전과는 상황이 또 다릅니다. 삼우 통신 덕분에 IP 시티폰 장비 프로토타입 개발을 곧 끝낼 수 있으니까.”
김현탁 사장은 짜증스러웠다. 최민혁 이 새끼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삼우 통신 인수 대금까지 포함해서 얼마를 생각하는 겁니까?”
“2,950억!”
“이런 미치…….”
김현탁 사장은 최민혁의 제안에 치를 떨었다. 그도 이미 KM 전자의 IP 사업부를 조사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들어간 돈이 얼마인지도 안다.
삼우 통신 역시 매각 대금이 얼마인지도 대충 안다.
‘고작 300~400억에 불과한 것으로 아는데, 정말 너무하네.’
물론 그렇다고 내심을 다 말할 수는 없었다.
심보가 가득한 최민혁의 얼굴을 봐서는 성격대로 들이받았다간 또 사고를 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솔직히 2,950억은 좀 그렇지 않습니까. IP 시티폰의 원천기술이 있다고 해도 딱 그거 위주인 것으로 아는데, 인건비까지 포함해도 200~300억에 불과하고, 삼우 통신을 아무리 높이 쳐 줘도 300억이면, 500억이면 충분…….”
최민혁 실장은 뻔뻔하게 나갔다.
“글쎄요. IP 시티폰 가치에 대한 제 평가는 좀 다르군요. 더욱이 삼우 통신 덕분에 우리 IP 시티폰의 가치는 더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아직 인수합병 계약서 잉크도 마르지 않았을 텐데, 무슨 기술을 더 고안했다는…….”
“삼우 통신 엔지니어가 가진 기술이 제법 있었습니다. 그 기술과 우리 회사의 원천기술을 합쳐서 발전된 핵심 특허 300가지를 더 출원했습니다. 덕분에 우리 IP 시티폰 가치는 급격히 올랐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후에 최민혁은 두 사람을 다시 쳐다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두 분도 삼우 통신 기술력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은행까지 동원해서 압박한 것일 테고? 이 바닥 장사 처음 합니까?!”
“…….”
두 사람은 마치 자기들 머릿속을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처럼 말하는 최민혁의 행동에 입을 쿡 다물고 말았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한 말은 그냥 장난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삼우 통신 고대진 소장은 뛰어난 엔지니어였고, 그 밑에서 일하는 이들 중에는 실력자가 많았다. 덕분에 그들이 최민혁의 IP 시티폰 기술을 보고 다양한 특허를 꽤 많이 출원했다.
또한 특허 팀 역시 이들 엔지니어와 손을 잡고, 다시 추가 작업을 진행했다.
삼우 통신에는 지금 KM 전자 특허 팀, IP 시티폰 사업부, 삼우 통신 엔지니어가 머리를 맞대서 특허를 막 찍어내는 중이다.
물론 하이브리드 장비 역시 고안했다. 물론 이 장비가 프로토타입이다 보니 많은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이전 장비보다는 확실히 더 나아진 장비였다.
“직접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좋습니다.”
* * *
김현탁 사장은 KM 전자의 연구소가 아니라 삼우 통신에 도착할 동안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하이브리드 시티폰 장비를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예상한 것과는 달리 실제로 그럴듯했다.
심지어 동작도 했다.
물론 놀란 사람은 정작 최민혁 실장이었다.
‘어, 동작하는 거였어?’
물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기능 구현은 정말이었다.
놀랍게도 그 짧은 시간 안에 IP 시티폰 장비 개발이 업그레이드된 셈이다.
충격을 받은 김현탁 사장은 멍하니 최민혁 실장에게 끌려다니기만 하다가 결국 KD 통신에 복귀했다.
그는 물론 바로 경영진을 불러 모아서 자신이 본 것을 말했다.
“아무래도 일이 심각해졌습니다. 최민혁 실장이 업그레이드한 IP 시티폰 장비는 방송에 나간 것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
이필영 전무, 주광진 상무를 비롯한 경영진은 다들 말이 없었다.
그들은 각자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따로 조사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조차 설마 최민혁 실장이 벌써 IP 시티폰 장비를 고안했을 것이라는 상상도 못 했다.
다만 매각 대금 2,950억이 문제였다.
그런데 주광진 상무는 의외로 이 금액이 무조건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솔직히 동남아, 중국, 일본, 유럽 시장 공략에 성공한다면 2,950억은 비싼 금액이 아닙니다. 다만 수익이 나지 않는 지금 상황에서는 확신하기 힘든 금액입니다.”
다른 이들은 다들 이 의견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큘러스 프로젝트 결과 때문에 일어난 위성 사업의 서비스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만 해도 최민혁 실장에게 사기당했다는 소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특히 오성 전자는 이 위성 사업으로 후계자 구도 기반을 만들었다.
그 일은 단순히 돈으로 환산하기 힘든 일이다.
이번 KD 통신에 오성 전자가 굳이 끼어든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오큘러스 프로젝트가 비싼 만큼 제 몫을 했기 때문이었다.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자 오히려 김현탁 사장이 소리쳤다.
“아니, 정말 2,950억이나 줘서 IP 시티폰 사업을 인수하겠다는 말입니까?”
오성 전자에서 파견한 김광헌 이사가 슬쩍 끼어들었다.
“IP 시티폰이라고 하면 쉬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새로 시작한다면 2년은 족히 더 걸릴 겁니다. 그동안 들어갈 비용과 기회비용을 고려하면 2,950억이 무조건 비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미쳤구나.’
김현탁 사장은 차마 내심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는 더욱이 경영진들이 굳이 가격을 더 깎으려 하지 않는 것이 황당했다.
‘하긴, 최민혁 그 새끼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좋습니다. 시간을 더 줄 테니, 한번 각자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하지만 2,950억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우리 회사 자본금이 1,000억이란 것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추가 투자가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그것도 가능한 한 빨리 말이다.
“…네.”
KD 통신 경영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편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들 역시 이 문제를 사전에 다 들었기 때문이었다.
최민혁 실장의 악명은 원래부터 자자했다.
그라면 무리한 제안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 삼우 통신을 이용해서 해외 쪽에 직접 손을 쓰려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특히 주광진 상무는 제임스 러너 이사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골치가 아팠다.
* * *
제임스 러너 이사는 예상한 최민혁 실장의 반응에 혀를 찼다.
2,950억이라니.
무려 4억 달러가 넘는 돈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제안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 제안을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KM 전자가 가진 IP 특허를 우회할 방법은 없는 겁니까?”
노텔 출신으로 네트워크 전문가인 주광진 상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힘듭니다. 사실 핵심 특허를 다 보유한 곳이 KM 전자입니다. 아마 그 특허를 인수하지 않고는 IP 시티폰 사업을 진행하기조차 어려울 겁니다.”
당장 특허 침해로 고소만 당해도 KD 통신은 모든 일이 올 스톱이었다.
제임스 러너 이사는 명불허전이란 말을 이번에 절감했다.
“…데니스 이사 말이 마냥 황당한 주장은 아니란 말이군요.”
“일단 브리티시 텔레콤을 비롯한 컨소시엄 쪽에 이야기해서 각자 리스크를 분담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다음에 협상을 통해서 매각 대금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합니다.”
“최민혁 실장이 응하겠습니까?”
그래도 경험이 많은 주광진 상무는 고개를 내저었다.
“최민혁 실장이 말한 동남아 시티폰 공략은 현실적으로 무리수가 많이 따릅니다. 당장 동남아 국가 쪽에서도 반발할 것이고, 우리 쪽에서 압박을 넣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사실이었다.
동남아 쪽에 진출해 있는 통신 기업은 많았다.
샐로먼 브러더스가 투자한 기업도 있고 말이다.
“데니스 이사 일도 있으니, 최민혁 실장은 우리 쪽을 견제할 겁니다. 우리와 같이 죽자고 달려들지는 않겠죠.”
“알았어요. 그러면 주 상무가 알아서 한번 이번 일을 지휘해 보세요. 하지만 2,950억은 좀 곤란해요.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인수 대금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들도 최민혁 실장이 저 금액을 계속 고집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협상 전에 먼저 크게 불러놓고 타협할 계획일 테니까.
문제는 그렇다고 해도 최종 IP 사업부 인수 대금 규모가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제임스 러너 이사는 데니스 샐로먼이 한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최민혁 실장 이 인간이 진짜 미친놈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