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9.
“…아직 기획안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최문경 부회장이 버럭 소리쳤다.
“혹시 민혁이 그놈이 의도적으로 흘린 정보 아냐? 민 부장 자네가 민혁이 그놈에게 병신같이 놀아났고?!”
민상수 부장은 최문경 부회장을 보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서,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지금까지 그놈이 한 짓을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도 없어. 정영일인가 그 친구를 갑자기 자른 것도 이상하잖아.”
“…….”
민상수 부장은 설마 그렇게까지 최민혁 실장이 머리를 굴렸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이 이제까지 한 짓을 떠올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충분히 개연성이 있어.’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야기는 더 겉돌았다.
기획 3안이 최민혁 실장의 함정인지, 아니면 진짜 어떤 제품의 기획안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앞에 낫 놓고 ‘ㄱ’ 자를 못 알아보는 상황이었으니.
최문경 부회장이 소리쳤다.
“정확한 정보를 알려면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해?”
“이, 일주일, 아니, 이 주일은 족히 필요합니다.”
“확실해?!”
“네!”
최문경 부회장도 민상수 부장을 딱히 더 타박하지 않았다. 차라리 과거처럼 멍하니 손 놓고 있다가 당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뭔가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좋아, 시간을 더 줄 테니, 반드시 확인해 봐. 뭔가 냄새가 나니까.”
무슨 냄새가 난다는 뜻일까.
다들 서로 쳐다보기 바빴다.
최문경 부회장은 구명진 팀장을 보고 소리쳤다.
“구 팀장도 민 부장을 도와!”
구명진 부장은 내키지 않았지만, 최문경 부회장의 눈치를 보자 수긍하고 말았다.
“아, 알겠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이 손짓하자 와 있던 이들은 우르르 사무실을 나섰다.
다들 나가면서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서로 수군거리기 바빴다. 그들로서는 생뚱맞은 3안이 황당하기만 했던 것이다.
* * *
정영일 사원은 인사 팀 면담을 받으면서도 불안했다. 막상 자신이 원하는 대로 풀려갔지만 한 가지 걱정거리가 생겨났다.
과연 KM 그룹에서 잘 생존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인사 팀 면담이 끝나자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장승일 실장의 최측근인 구길모 차장이었다. 그는 밝은 미소를 한 채 정영일 사원을 데리고 KM 그룹 휴게실로 데려갔다.
KM 그룹 휴게실 분위기는 나쁜 편이 아니었다.
최근 ATI 사에서 갑자기 비메모리 쪽에 투자를 한 덕분이다.
이 일은 정말 갑자기 진행된 일이었다.
그런데 뒤늦게 알고 보니, ATI 대주주 중에 한 사람이 최용욱 회장이었다.
ATI는 컴퓨터 CD, 멀티미디어 칩셋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업이었다. 이들이 안정적인 칩 확보를 위해서 KM 산업에 투자한 것이다.
물론 이 일을 진행한 것은 다름 아닌 최영란 본부장이었다.
덕분에 그녀의 인기가 심상치 않았다.
구길모 차장은 그런 점을 피력했다.
“요즘 회사 분위기가 어수선하지? ATI 측에서 투자를 받아서 그래. 그쪽에서 우리 KM 산업을 선택할지는 몰랐으니까.”
실제로 이 사실은 언론을 통해서 뉴스에 나왔다.
KM 산업 주가가 오랜만에 치솟아 오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정영일 사원도 꽤 놀랐다.
“…대단하네요.”
구길모 차장은 정영일의 표정이 상기된 것을 보자 그제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정영일 씨도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 그룹의 안정성은 이미 다들 인정하는 것이니까.”
“아, 네.”
정영일은 구길모 차장의 눈치를 계속 봤다. 명함을 받아서 그의 신분이 기획 조정실 소속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건 그냥 궁금해서 하는 질문인데, 민상수 부장과는 언제부터 알고 지낸 거야?”
“네? 그건…….”
“내가 듣기로 자네를 추천한 사람이 민상수 부장이라고 하길래 그런 거야. 비서실이 요즘 시끌시끌하잖아. 그래서 물어본 것에 불과해. 자네도 KM 그룹에 입사하면 어차피 가야 할 부서를 정해야 하잖아.”
말을 빙빙 돌리는데, 꼭 좋은 뜻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영일은 시작부터 이런 상황이 닥쳐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다행이라면 그를 구제한 사람이 있었다.
넥타이까지 풀어헤친 채 이쪽저쪽을 둘러보던 민상수 부장이었다.
“야, 구 차장,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구길모 차장은 잔뜩 흥분한 채 달려와서 삿대질하는 민상수 부장 행동에 슬쩍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아, 별것 아닙니다. 새로운 사원이 입사한다고 해서 사전 면담을 했을 뿐입니다.”
“그걸 말이라고 해? 뻔히 내가 데려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소리야?!!”
민상수 부장의 극단적인 반응에 구길모 차장은 크게 당황해서 사과만 한마디 하고는 휑하니 도망쳐 버렸다.
“구 차장, 너 다시 이딴 짓 하면 절대로 그냥 있지 않을 거야!!!”
“…….”
정영일 사원은 시작부터 사내 정치 파벌 싸움에 엮인 것을 깨닫고는 민상수 부장의 눈치만 봤다.
민상수 부장 역시 이전과는 태도가 사뭇 달랐다.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네? 아, 아무 이야기도 안 했습니다!”
“구 차장, 저 새끼가 장승일 실장 측근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
“아, 아뇨, 전혀 모릅니다!”
정영일 사원은 맹렬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민상수 부장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수상쩍은 시선으로 정영일 사원을 쳐다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설마 KM 그룹에 와서도 스파이 노릇 할 생각은 아니겠지?”
“말도 안 됩니다!”
“글쎄.”
여전히 의문이 가득한 민상수 부장은 튀어나온 배를 흔들면서 정영일을 쳐다보았다. 그의 말투가 좋을 리가 없었다.
바로 기획안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차세대 프로젝트 기획안은 이미 연초부터 계속 말이 나온 이야기였는데, 본격적인 미팅을 시작한 것은 이게 처음입니다.”
“아니, 그러면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잖아?”
“그, 그게…….”
“야, 정영일, 너, 지금 이게 장난으로 보여?!”
“그, 그건 아닙니다. 전 정말…….”
“만약 일이 잘못되면, 이 회사에 계속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저, 절대로 아닙니다. 아, 아니, 제가 한 번 더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가능하겠어?”
“네, 아직 저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들이 있으니까요. 그쪽을 통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힌트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좋아. 하지만 결과가 없으면 자네 회사 생활은 시작부터 꼬인다는 것을 명심해.”
그렇게 좋게만 이야기하던 민상수 부장은 자신 역시 위기감을 느끼자 카멜레온처럼 태도를 바꾸었다.
정영일은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하, 씨발, 뭐 이렇게 상황이 꼬이냐.’
* * *
정영일 사원은 위기감을 느끼자 일단 KM 전자 전화번호부 리스트를 확인했다. 이들 중에 안면이 있는 이들에게 연락했다.
그런데 대다수는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심지어 받는 이들조차 시간이 없다는 명분으로 만나지 않았다.
그나마 한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 좋은 기획 팀 박광민 사원이었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나온 박광민 사원의 표정이 좋지가 않았다.
“영일 씨, 잘 지내요?”
“아, 그냥 그래요.”
평소 박광민은 사람 좋은 이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전혀 관계없는 타인 같았다.
정영일은 위기감을 느끼자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기획 팀은 잘 돌아가요?”
“잘 돌고 말고가 없잖아요. 영일 씨 나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래요.”
“혹시 차세대 기획안도 그대로 진행되는 건가요?”
박광민은 오히려 수상쩍은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해요?”
“아, 그게…….”
“영일 씨는 우리 기획 팀이 바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설마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타인에게 할 거로 생각해요?”
“아, 미, 미안해요.”
정영일 사원은 크게 당황했다. 그 순둥이 박광민 사원이 이렇게 냉정하게 나올지는 몰랐다.
그런데 박광민 사원의 말은 더 놀라웠다.
“솔직히 저도 영일 씨에게 불만이 많았어요. 생각 같아서는 그런 질책을 하고 싶었으니까. 그래도 같은 회사 동기라서 참은 거예요. 그런데 지금 뭘 하자는 겁니까? 설마 절 통해서 회사 기밀을 또 빼돌리려고 하는 겁니까?”
“저, 절대 아니에요. 진짜요!”
박광민 사원은 차가운 눈을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정영일 씨는 사회생활이 장난인가 봐요. 아니면 절 아주 병신 취급했던가 말이에요. 사회란 게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정신 차리세요. 그러다가 지금 간 직장에서도 토사구팽이 될 테니까. 전 이만 가볼게요. 다시는 연락하지 마세요.”
“…….”
정영일은 입을 딱 벌린 채 떠나는 박광민 사원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자신이 아는 그 박광민 사원인지 맞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기획 팀 막내로서 잡다한 일을 다 하는 박광민을 우습게 봤다.
그런데 그건 자신의 착각이었다.
박광민은 나름 치열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단지 자신이 그 진실을 몰랐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 * *
최문경 부회장은 한동안 깊은 번민에 빠졌다. 솔직히 최민혁 그놈이 이제까지 한 일이 있으니, 차세대 기획안을 쉽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혹시나 하는 심정에 기획안을 몇 번이나 다시 봤다. 그나마 설명을 들어서 이 내용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그렇지만 스마트폰의 가치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아무리 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민상수 부장은 구명진 부장과 같이 나름 철저하게 조사를 해봤지만 별다른 특이점을 찾지 못했다. 그가 특히 심혈을 기울인 것은 정영일이었다.
그런데 정영일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영일에게 크게 실망해서 살포시 밟아준 것은 덤이었다.
정영일이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은 것 같지만, 차라리 스스로 회사에서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런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 채 내용이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분노한 최문경 부회장은 참다못해서 기획안을 집어 던진 후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결국 다른 안건을 꺼냈다.
“IP 시티폰 사업부 인수는 어떻게 되어가?”
권재홍 비서실장은 말을 머뭇거렸다. 아직 이 일은 결정된 바가 없었다.
“…좀 더 검토가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로열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낫지 않아? 시간을 질질 끌면 민혁 그놈이 무슨 짓을 알고 내버려 두는 거야?!”
“…우리가 나서봐야 최민혁 실장이 보일 반응은 뻔합니다. 차라리 KD 통신 설립 후에 로열티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 역시 순순히 수긍했다. KM 그룹이 나서봐야 최민혁이 그놈을 자극할 것이 뻔했다. 그건 하지 않는 것만 못한 일이었다.
“민혁 그놈이 매각 대금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요구할 것 같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권재홍 비서실장이 뭘 망설이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이와 비슷한 일이 불과 몇 달 전에 있었던 것이다.
“오큘러스 사업부는 얼마를 요구했어?”
“처, 천억이 넘었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히는 이천억에서 좀 빠지는 금액이었다.
굳이 그 말까지 해서 최문경 부회장을 자극하지 않았다.
“하아, 그러면 이천억을 불러도 이상하지 않잖아?”
“하지만 IP 시티폰은 오큘러스 프로젝트와는 차이가 크게 납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또 조카 최민혁에게 당했다고 생각했다.
“글쎄. 내 생각은 달라. IP 시티폰은 당장 돈이 되잖아. 그걸 빌미로 더 뜯어내려고 할걸? 이 새끼가 TV 나와서 눈물 질질 짤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쇼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따지고 보면 최문경 부회장은 일방적으로 이익을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뭔데? 내 조카라서 하는 말이 아니잖아. 이놈이 손해를 볼 일을 하겠어?!”
“하지만 아직 상황은 모르는 일입니다. 당장 중국 쪽에도 서비스할 수가 있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전혀 생각도 못 한 말에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중국이라니? 그게 가능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미 삐삐 시장도 나쁘지 않습니다. 이 소비자 계층을 노린다면 못 할 일도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 쪽에는 샐로먼 브러더스가 있지 않습니까? 그들의 도움을 얻는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