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6.
KM 그룹 비서실에서 너무 자주 전화가 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알고 싶은 것은 당연히 최민혁 실장의 근황이었다.
최민혁 실장이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등등 말이다.
그들은 심지어 최민혁 실장이 화장실에 몇 번 가는가까지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화가 난 정영일 사원이 그것 때문에 KM 그룹 비서실 2팀 민상수 부장과 싸웠고, 결국 무리수를 두다가 들통이 난 것이다.
아니, 이전에도 이미 정영일 사원의 행동에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현장에서 덜미가 잡힌 셈이었다.
조성돈 팀장 역시 이쪽저쪽에서 들은 바가 있어서 혀를 찼다.
“정영일 사원이 사정이 있어서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그래도 남의 눈치는 봐야 하잖아. 지난주에는 시와 때를 가리지 않았어.”
“그, 그게…….”
“설마 지금 이 자리에서 거짓말을 할 건가?”
“아, 아닙니다.”
정영일 사원은 두 사람 눈치를 계속 봤다. 하지만 차가운 두 사람의 표정을 보자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박상기 차장이 다시 먼저 끼어들었다.
“하나만 묻자. 이번에 월급이 올랐잖아. 아니, 연봉도 오성 전자 이상 받잖아. 어지간해서는 우리 회사가 직원을 자르지도 않아. 필요하다면 제2의 기회도 주니까. 도대체 왜 우리 회사 등에 칼을 꽂은 거야?”
“그게 사실은…….”
정영일 사원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 역시 양심에 찔렸다. 하지만 이미 했던 일을 쉽게 멈추지는 못했다. 민상수 부장이 가끔 협박도 했기 때문이다.
이를 모르는 조성돈 팀장 역시 박상기 차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실장님도 이 일을 크게 키울 생각은 없어. 그러니 솔직하게 말해 봐. 나 역시 잘 이해가 안 되니까. 도대체 얼마나 회사가 잘해줘야 하나.”
정영일 사원은 두 사람을 눈치를 보다가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솔직히 좀 불안했습니다.”
“아니, 뭐가 불안한데? 회사 일을 하다가 애로 사항이 생기면 인사 팀에 문의하면 되잖아. 필요하면 내가 휴가도 내줄 수가 있어. 그건 평소에 누누이 한 말이잖아?”
실제로 KM 전자 내부 팀장은 주기적으로 직원의 애로 사항을 체크했다. 만약 그 일이 맞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제2의 기회를 줬다.
이게 다른 기업과는 달리 일상적인 일이 되어서 이제는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명꼴로 보직을 옮기는 이가 있었다.
하지만 정영일 사원은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박광민 사원만 해도 실적을 탄탄히 쌓아갔습니다. 아이컴을 담당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달랐습니다. 이것저것 잡다한 일만 떠맡았으니까요.”
조성돈 팀장은 한숨을 쉬었다.
“본인이 지시받은 일을 이제까지 잘 처리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맡은 일은 결과가 나오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당장 위성 사업부가 그 시작이었습니다.”
확실히 아이컴과 위성 사업부 일은 일의 성격 자체가 달랐다. 아이컴은 에플 쪽을 지원만 하면 되는 일이고, 위성 사업부도 비슷하기는 하지만 외부 업체 성향이 달랐다.
에플 대주주는 최민혁이었는데 반해서 위성 사업부는 그저 외주업체였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 때문에 아무래도 정영일 사원의 성과가 좋을 리가 없었다.
조성돈 팀장은 그제야 정영일 사원이 뭘 고민했는지 깨달았다.
‘이 친구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일 처리가 원만하지 않아. 아무래도 그런 문제가 있잖아. 배 과장도 그것 때문에 늘 불만을 토로했으니까.’
그래서 소모성으로 일을 대충 잘라서 넘겼다.
그 일은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없어도 그만이다.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박광민 사원과 점점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니 계속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내지 못한 채 겉돌았다.
급료를 많이 받아도 회사 생활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박광민 사원은 이와는 반대였다. 그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꼼꼼하게 다 처리했으니까. 지시받지 않은 일은 잘 검토해서 보완하기도 했다.
솔직히 일을 주는 사람 처지에서도 편하다.
그러니 중요한 일은 전부 박광민 사원에게 몰렸다.
“더욱이 강준석 팀장은 회사 들어오기가 무섭게 대리를 달고, 지금은 미국에서 팀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곧이어서 과장을 단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조성돈 팀장도 강준석 팀장 이야기가 나오자 흠칫했다.
박상기 차장 역시 자신과 다를 바가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도 이제는 최민혁 실장이 왜 그렇게 무리하게 일을 진행했는지 안다.
“그건 자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 단순히 우리 기획 팀만이 아니라 경직된 회사 분위기를 바꾸려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니까.”
“네?”
“하, 생각을 해봐. 고액 급료를 받으면서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회사 분위기는 그저 시키는 일만 하면 끝난다고 생각하잖아? 그러니 회사가 기대한 이상의 성과를 도출하면, 정상적인 절차를 뛰어넘는 보상을 해줄 필요가 있어. 그래야 다른 직원도 자기 능력을 뛰어넘은 실적을 도출할 것 아냐? 그게 곧 회사의 성장으로 이어져.”
실제로 강준석 대리는 누구 지시를 받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일을 찾아서 하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가볍지가 않았다.
벨린 소프트가 대표적이었다.
스콧 포스탈이 회의 중에 자신이 한 일의 기획안을 잡은 사람이 강준석 대리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조성돈 팀장은 이를 무조건 옹호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영일 씨 의견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KM 그룹에 내부 정보를 넘긴 행동이 합리화되는 것은 아니야. 범죄행위잖아?”
“…죄, 죄송합니다.”
조성돈 팀장은 축 늘어진 정영일 사원 모습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번 일에 자신도 책임이 없다고 하기 어려웠다.
한편으로 또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다른 대안이 없었다.
“조용히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아마 그러면 자네가 한 일에 대해서는 회사도 법적 조처를 하지 않을 거야.”
“…하, 한 번만 기회를 더 주면 안 됩니까?”
“아니, 힘들어.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회사가 점점 바빠질 거야. 그런데 내부 정보를 흘린 이를 같이 데리고 갈 수는 없잖아?”
“…알겠습니다.”
정영일 사원은 두 사람이 회의실을 나가는 모습을 보고 일어나려다가 곧 자리에 앉고 말았다. 그는 뒤늦게야 자책했다.
물론 KM 그룹에 보험을 걸어두었다.
그런데 과연 KM 그룹에 들어가서 자신이 잘 적응할지는 자신할 수가 없었다.
막상 지금까지 기획실 생활을 떠올려 보았다.
쉽게 지난 기억을 떨칠 수가 없었다.
가족 같은 분위기.
솔직히 아주 좋았다.
항상 옆에서 자신을 지켜봐 주는 동료가 있었던 것이다.
‘하, 이게 잘한 짓일까?’
* * *
배종대 과장은 자기 짐을 챙겨서 떠나는 정영일 사원 모습을 보면서 황당했다.
“영일 씨, 아니, 뭐 하는 거야?!”
“…사직서 냈습니다.”
‘뭐? 아니 왜? 지금 우리 회사 분위기 알면서 사직서를 냈다고? 설마 오성 전자로 이직하는 거야? 아무리 오성 전자도 우리보다 대우가 좋을 수가 없어?!“
사실이기도 했다.
KM 전자는 이미 사내에 현금이 너무 넘쳐서 주체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앞으로는 들어올 로열티는 얼마가 될지도 모른다.
거기에 새로운 원천기술을 또 확보하기도 했고 말이다.
오성 전자 같은 대기업보다 오히려 회사 분위기도 더 좋았다.
정영일 사원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속마음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 역시 뒤늦게 이런 상황을 후회했다. 왜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귀신에 홀린 걸까?’
박광민 사원도 위로 했다.
하지만 정성근 대리를 비롯한 몇몇 직원은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다. 그들은 다들 정영일 사원과 관련해서 안 좋은 소문을 들었다.
꼭 기획 팀이 아니어도 그렇다.
다른 팀에서 간혹 수상쩍은 정영일의 행동을 보고 이런저런 말을 했던 것이다.
박상기 차장은 착잡했다.
“이렇게 정영일 씨과 끝내게 되다니, 좀 그래. 사전에 내가 알았다면 이야기를 했을 텐데, 너무 아쉬워.”
“아닙니다. 이제까지 감사했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마지막으로 정영일과 악수했다.
“팀장으로서 참 미안해. 내가 자네를 좀 더 신경을 써야 했어. 어디 가서도 잘 지내.”
따스한 말에 정영일 사원은 가슴이 울컥하는 것을 느꼈지만, 곧 작별 인사를 한 후에 회사를 떠났다.
배종대 과장은 조성돈 팀장의 눈치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우리랑 인연이 아니었나 보지.”
* * *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에게 대충 정영일 사원 이야기는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결국 조직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란 말이군요. 그 정도는 보직 이동으로 해결이 안 되었을까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건 조 팀장님 잘못으로만 볼 수는 없으니까.”
최민혁 자신도 솔직히 팀장 영역을 침범할 수는 없었다.
팀 내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조성돈 팀장은 조금 다른 문제를 꺼냈다.
“괜찮겠습니까?”
“아, 차세대 프로젝트 기획안 말입니까?”
“네, 이미 정영일 그 친구도 가지고 있을 텐데…….”
최민혁은 씩 웃었다.
“그 기획안으로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다른 안은 그렇다고 해도 3안은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그 기획안에는 3안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요. 그걸로 뭘 추리할 수 있을까요? 당장 모바일 CPU만 예를 들어보죠. 굳이 멀리 갈 것도 없이 핸드폰 CPU 예가 좋죠. 그 일이 쉬울까요?”
“핸드폰이라면…….”
당장 모토로라와 오성 전자의 핸드폰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것만 해도 따라가기 힘든 제품이었다. 당장 KM 전자가 새로운 폰을 만들어서 이 시장에 뛰어들기는 어려웠다.
일단 핸드폰을 만들기도 쉽지 않지만, 경쟁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런데 차세대 프로젝트 기획안에는 이런 핸드폰만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저것 잡다한 것이 꽤 많이 들어갔다.
백화점식으로 나열된 그 부분을 모두 취합해서 뭔가 만든다.
그건 설사 오성 전자도 쉽게 도전할 과제가 아니었다.
이들이라고 해도 수백 명의 엔지니어와 수백억의 자본이 필요했다.
심지어 개발 기간은 최소로 잡아도 4~5년은 족히 걸릴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개발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어려웠다.
“…역시 힘들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그제야 회의 중에 나온 스마트폰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 물건이 나온 것 자체가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최민혁이 씩 웃었다.
“설사 일부 정보를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유는 우리 역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모바일 CPU, KMOS를 시작으로 각각의 모듈별로 배당해야 할 인원도 필요합니다.”
“…그 부분은 따로 검토하겠습니다.”
“그래요. 기획 팀이 해야 할 일은 그게 우선이니까. 정영일 사원 그 친구 문제는 이제 잊도록 해요. 그 친구는 아직 자신이 소모품이라는 것을 모를 테니까.”
“…네.”
조성돈 팀장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왜 굳이 폐기한 3안으로 된 차세대 프로젝트 기획안을 굳이 기획 팀원들에게 주고, 정영일 사원에게도 넘긴 것인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안 것이다.
‘최문경 부회장도 아예 IP 시티폰 사업을 매각한 최민혁 실장님에 대한 정보를 모르면 불안해서 계속 이쪽저쪽을 찔러볼 테니, 최 실장님은 그걸 사전에 막고 싶었던 거야.’
* * *
조성돈 팀장이 갑자기 회의를 소집하자 기획 팀은 어수선했다.
다들 정영일 사원의 사직에 대한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성돈 팀장은 팀 회의를 시작하자 일단 차세대 기획안부터 돌렸다.
이번에는 기획 팀을 놀려주려고 박상기 차장이 기획안 복사본을 돌렸다.
“……?”
다들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배종대 과장은 특히 팀 회의의 내용이 정영일 사원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자 영문을 몰랐다. 하지만 그는 굳이 입을 열려다가 곧 멈추고 말았다.
기존 차세대 기획안이 아니었다.
스마트폰이 추가된 기획안이었다.
아니, 그냥 단순히 바뀐 것이 아니라 팀 회의에서 나온 결과물이 구체적으로 다 첨부된 기획안이었다.
다만 스마트폰 세부 항목과 관련된 일정이나 계획은 제대로 나와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