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3.
박상기 차장은 다시 반박했다.
[물론 성능이 좋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MP3 파일을 모바일 CPU로 돌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아니, 음원이 된다면, 동영상도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역시 MP3에 이어서 나온 MP4.
아직은 스마트폰의 개념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를 못 해서 나온 질문이다.
스마트폰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는 8년 후, 하지만 그 시작은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이후부터 7배 이상 급성장한다. 이때는 오성 전자를 비롯한 인탤과 같은 글로벌 기업이 속속 끼어든다.
모바일 CPU는 어떻게 보면 캐시카우 역할을 하게 된다.
딱 모바일 CPU만 해도 그렇다는 거다.
이것만 해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최민혁 실장은 굳이 이런 스마트폰의 미래까지 언급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물끄러미 조창호 차장을 쳐다보았다.
조창호 차장 역시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자 잠깐 고민했다. 아무리 자신이 말해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정확히는 스마트폰 미래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한 선택은 굳이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의 지시를 받아서 일하다가 혹시나 해서 가져온 테스트 플랫폼을 단상 위에 올렸다.
[……?]
다들 영문을 몰랐다.
그건 최민혁도 마찬가지다. 그는 차세대 ARN IP는 개발에 시간이 더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최민혁 실장님이 몇 가지 제안한 아이디어 덕분에 차세대 ARN 개발에 속도가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 결과입니다.]
이 말에 회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다들 감탄 어린 시선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그저 어깨만 으쓱한 채 테스트 플랫폼을 쳐다보았다.
차세대 ARN IP가 적용된 테스트 플랫폼은 이동전화를 모듈별로 분리해서 전선으로 연결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부가 분리되어 있어서 고장이 난 전자제품 같았다.
이곳저곳에 연결된 전선은 누더기에 바늘을 기워서 만든 것 같았다.
하지만 LC 전자를 스토커처럼 괴롭혀서 받은 3인치 LCD를 단 이 테스트 플랫폼은 보기와는 달리 고장이 나지 않았다.
조창호 차장이 전원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바로 동작했기 때문이다.
초기 화면에는 곧 시스템 체크 화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후 각 기능별로 정상적으로 동작하는 화면이 나왔다.
메모리, RF 인터페이스, 시리얼, 배터리, 무선랜, 심지어 퀄컴에서 고안한 통신 칩까지 말이다. ARN6을 사용한 뉴튼의 메시지 패드와는 달리 ARN7 IP를 채용한 퀄컴 칩은 기본적인 동작은 무리가 없었다.
다만 안테나 쪽은 감도가 좋지 않았다.
테스트 화면상에 감도가 떨어졌다는 경고 메시지가 계속 떴다.
[이게 아직 안정화가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안테나 쪽은 빼고 보면 될 듯합니다.]
LCD에는 터치 기능까지 다 내장되어 있었다.
조창호 차장은 기본적인 기능만 보여주려고 몇 가지 데모를 보여주었다.
K투스, 무선랜, 심지어 MP3 기능까지 다 말이다.
MP4 코덱 칩이 적용되어서 MP4 동영상도 쉽게 동작했다.
단순히 기능만 구현해서인지 역시 제법 문제가 많았다.
동영상 화면이 깨지고, 멈추는 현상도 나타났다.
해상도도 낮아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조창호 차장도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이 나름의 노력을 해보았지만 완벽한 기기를 선보이는 건 무리였다. ARN 본사 엔지니어가 도움을 줘서 그나마 이 정도 결과가 나온 셈이다.
[ARN 대주주가 최민혁 실장님이 아니었다면 이 정도 결과까지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ARN 연구원이 생각보다는 폐쇄적이었습니다. 적어도 1~2년은 족히 더 걸려야 했을 겁니다.]
물론 ARN 대주주가 최민혁 실장이라고 해서 조창호 차장이 그들과 쉽게 소통한 것은 아니었다.
제법 갈등이 있었다.
우선, ARN 엔지니어 나름의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조창호 차장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고, ARN 엔지니어에게 끈질기게 매달렸다.
그 덕분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갑작스러운 결과물에 놀란 이들은 다들 최민혁 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들은 설마 최민혁 실장이 ARN에도 손을 썼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솔직히 테스트 플랫폼이 퀄컴 칩과 같이 결합한 것만으로도 황당했다.
퀄컴 대주주가 최민혁이었기 가능한 일이었다.
솔직히 기가 막혔다.
하드웨어 개발에 어느 정도 경험이 있다면 지금 자신 앞에 놓인 물건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차세대 프로젝트와 관련된 회의였지만 이전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회의실 분위기 변화에 만족한 조창호 차장은 그제야 미소를 짓고 툴툴거리면서 농담했다.
[MP3 IP와는 달리 MP4 IP가 적용된 탓으로 MP4 특허료는 지급해야 할 겁니다.]
[……!]
지켜보던 이들은 농담을 그냥 넘긴 채 멍하니 테스트 플랫폼만 쳐다보았다.
최민혁 실장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게 시현이 가능했습니까?]
조창호 차장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최 실장님에게 받기만 해서 저도 한번 깜짝 놀라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ARN 쪽에서도 흥미가 있었습니다. 실장님의 수정안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 결과가 이것입니다.]
이미 어느 정도 가야 할 방향을 정한 작업은 빨라질 수밖에 없다.
다만 아직 이 테스트 플랫폼이 안정화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최민혁은 꽤 만족했다. 아니, 자신이 지시하지 않은 부분까지 완성된 결과물에 미소 지었다.
최민혁은 가볍게 물개 박수를 쳤다.
[…좋네요. 정말 기대 이상입니다. 조 차장님이 고생했습니다.]
다른 이들도 눈치껏 최민혁을 따라서 박수를 쳤다.
회의실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조창호 차장은 최민혁 실장의 격려에 내심 감격하고 말았다. 그는 대화도 잘 통하지 않는 ARN 연구소에 가서 이 일을 하는 중에 꽤 마음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도와주는 사람은 오직 ARN 쪽 엔지니어다. 그들이 쉽게 마음을 열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이 개발 플랫폼이 조성돈 팀장의 3안과 같다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일치하지만 다른 일부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다만 기본적인 기능은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도 처음에는 3안이 그저 갑자기 나온 기획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들 중에는 물론 사전에 준비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스콧 포스탈이다.
[조 차장님, 그 플랫폼을 좀 이용해도 됩니까?]
[어, 이거 아세요?]
[ARN 쪽 담당자 통해서 공급받은 장비와 비슷합니다. 우리 쪽에서도 그 플랫폼을 이용해서 테스트를 해왔습니다. 다소 달라진 것이 있지만…….]
당연히 두 테스트 플랫폼이 똑같은 리가 없었다.
추가된 것도 있고, 바뀐 것도 있었다.
스콧은 바로 그 점을 확인했다.
덕분에 회의는 잠깐 중단되고 말았다.
최민혁은 원래 이 회의를 통해서 당사자들이 뭘 해야 하고, 앞으로 어떤 희망도 가지고 일해야 할지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스콧이 확인하는 데, 시간이 제법 필요했다.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합니까?]
[…이게 수정을 좀 해야 해서 4~5시간은 족히 더 필요합니다.]
최민혁이 보기에는 5시간으로 무리다. 하지만 스콧의 태도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뭔가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꼈다. 고민한 끝에 각 팀원에게 좀 더 시간을 주기로 했다.
[오늘은 이 정도까지 합시다.]
[…알겠습니다.]
* * *
최민혁은 옥상 휴게실에서 담배를 물려다가 따가운 김명준 과장의 시선을 의식하자 담배를 그냥 휴지통에 던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아버지같이 깐깐한 김명준 과장을 탓하지 않았다.
자기 건강 때문에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한 것이니까.
김명준 과장 역시 오늘 회의를 보면서 느낀 바가 있어서인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신 나선 이는 휴게실에 허겁지겁 올라온 조성돈 팀장이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을 보자 폴더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최민혁은 뜬금없는 조성돈 팀장 태도에 혀를 찼다.
“네? 뭐가요?”
“IP 시티폰 관련해서 실장님을 의심한 것 말입니다.”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이 내미는 커피를 받아서 입술을 축였다.
“그런 말씀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실장님을 정말 믿었다면 그러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뇨. 꼭 그렇지도 않아요. IP 시티폰 미래가 어찌 될지 솔직히 저도 모르니까."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마 정말 IP 시티폰이 성공한다는 말입니까?”
“그게 설명하기가 참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최민혁은 인생 1회 차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당시 시티폰이 불과 얼마 되지 않아서 수천 억의 적자를 내면서 접어야 했던 이유는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였다. 심지어 발신자 전용 서비스라는 근본적인 한계도 있었던 것이었다.
이와는 달리 IP 시티폰은 이런 시티폰의 한계를 극복했다. 더욱이 시기적으로 내년 안에만 시작한다면 최소한 200~300만 가입자는 금방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마케팅을 잘만 활용한다면 IP 시티폰의 열기를 키울 수 있다. 그때는 사업자 역시 힘을 가지게 될 테니까.’
샐로먼 브러더스가 이런 국내 분위기를 이용해서 영업을 키우면, 동남아 시장을 쉽게 장악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시점이 태국 금융위기가 딱 시작되는 시기와 겹친다는 거야.’
정확히는 IP 시티폰 서비스 타이밍을 그렇게 만들 셈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아무리 샐로먼 브러더스라도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솔직히 최민혁도 샐로먼 브러더스가 동아시아 금융위기 사태를 정확히 예측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것은 동남아 금융 혼란이니까.
최민혁은 수십 가지 변수가 관련된 이 태국 문제를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조성돈 팀장은 영문을 몰라서 최민혁의 눈치만 계속 봤다.
그는 최민혁이 이렇게 고민하는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그제야 씩 웃고 말았다.
“계획한 것과는 좀 다른 모습을 보일 수가 있어요. 하지만 나아가는 방향 자체는 IP 시티폰과 CDMA 싸움이 될 겁니다. 문제는 CDMA가 통화료를 낮추게 되면서 IP 시티폰은 힘을 잃게 될 겁니다.”
“…IP 시티폰은 처음에는 저가 통화료로 반짝 뜨기는 하지만 결국 몰락을 거듭한다는 말씀이군요. 심지어 IP 시티폰이 몰락하는 그 시장을 공략하는 것만으로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말씀이고요.”
그는 그제야 만족했다.
“그렇죠. 그러니 우리는 팝콘이나 먹으면서 불구경만 하면 됩니다. 아마 우리 첫째 큰아버지와 샐로먼 브러더스는 탐욕 때문에 자기 자산을 IP 시티폰 서비스에 끝없이 퍼부을 겁니다. 그게 자신의 몰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죠.”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이전과는 달리 최민혁 실장의 말을 곰곰이 씹어보았다. 그랬더니 그제야 최민혁의 의도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X 리포트와 IP 시티폰을 결합해 놓은 걸 보고는 소름마저 느꼈다.
만약 최민혁 실장이 의도한 바대로 된다면 그들도 2~3년은 KM 전자를 압박하기 힘들게 된다.
최민혁 실장이 깔아놓은 덫은 생각보다는 치밀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VM-LCD도 영향을 받으면, KD-LCD 역시 타격이 불가하잖아. DL 그룹도 꽤 큰 손실을 본다는 의미네.’
단 한 번으로 적대 세력을 쓸어버릴 수 있는 절묘한 덫이었다.
물끄러미 조성돈 팀장을 지켜보던 최민혁은 그제야 만족했다.
“조 팀장님도 이젠 좀 느낀 것 같으니, 더 IP 시티폰을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IP 시티폰에서 남은 일은 가장 고가로 IP 시티폰 사업부를 매각하는 겁니다. 콜린스 사업부도 같이 매각하고 나면, 남은 일은 스마트폰에 집중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콜린스 사업부를 매각하게 되면, 매출이 너무 격감하지 않을까요?”
“매출이야 줄 겁니다. 대신 사내 현금은 급증할 겁니다.”
“문제는 캐시카우 하나가 사라지지 않습니까? 스마트폰은 지금 봐서는 2~3년은 족히 걸리는 프로젝트 같습니다. 대안이 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콜린스 사업 매각 완료하는 데, 적어도 1년은 걸립니다. 나머지 기간은 KMP-02B 로열티 수익으로 버티면 됩니다. 에플 판매 수량은 국내와는 격이 다르니까. 그 기간 동안 우리 KM 전자는 구조 개혁을 마무리하는 겁니다.”
조성돈 팀장은 그제야 최민혁 실장이 뭘 염두에 둔 것인지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