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7.
“그렇죠. 아마 이와 유사한 프로그램을 고민하는 방송국이 있을 겁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최민혁의 인생 1회 차에서 이동통신과 관련하여 제작된 다큐 프로그램이 있다. 다만 그게 나온 시기가 지금 이 시점은 아니었다.
‘결국 방송사 PD와 알아서 적당히 조율하라는 이야기인가?’
최민혁은 물론 말로만 하지 않았다.
“연구소 측에 이야기해서 필요하다면 IP 시티폰을 실제로 테스트하는 장면을 내보내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이용식 부장은 최민혁의 지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조성돈 팀장 통해서 알음알음들은 바가 있어서 더 언급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게 정말 효과가 있는지는 의문스러웠다.
“저기 실장님, 이 IP 시티폰은 다른 기술과는 좀 다른 것 같은데, 이것만으로 효과가 있을까요?”
“광고도 해야죠. 이왕이면 괜찮은 연예인도 섭외하고, 한번 제대로 광고를 내보내세요. 비용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이 없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업과는 달리 당장 수익이 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요즘 MP3 특허료 협상 자리에서 나오는 금액은 아시죠? 오성 전자 측에서만 400억 정도를 계약금으로 내놓을 겁니다. 그런데 고작 광고 비용이 걱정됩니까?”
“…실장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실제로 KM 전자는 어지간한 중소기업에는 로열티를 아예 받지 않았다.
그런데 오성 전자를 위시한 한국 전자 대기업들에게는 계약금을 따로 받았다.
문제는 이들 업체가 마냥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심지어 전자 산업과는 관계가 없는 HY 자동차 역시 차량용 MP3 개발 때문에 수백억의 특허료 협상을 진행 중이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현금이 필요하므로 당장 손해를 보는 척하면서 계약금을 당겨서 받은 것이다.
그러니 만약 IP 시티폰 계획만 성공한다면 이 일은 크게 문제가 될 소지가 없었다.
* * *
김현탁 본부장은 IP 시티폰 신사업과 관련된 협상이 빠르게 진행되자 오히려 다급했다. 이번 일이 성사되면 그가 그렇게 원했던 계열사 사장이 되기 때문이다.
얼핏 봐서는 좋은 일이다.
그런데 만약 이 새로운 사업이 망해 버리면 그는 재기 불능이 된다.
이유는 여기에 들어가는 세력이 너무 많아서다.
그들을 교통정리 하면서도 IP 시티폰을 이끌어가야 하는데, 솔직히 느낌이 싸했다.
원래라면 좋아할 일이지만 오히려 더 불안하기만 했다.
“…KM 산업이 비메모리 사업 쪽에 투자금을 더 늘렸다고?”
김현탁 본부장의 지시를 받아서 KM 그룹을 다시 들여다본 후에 보고서를 제출한 박태정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에플을 비롯한 몇몇 기업과의 칩 공급 계약으로 이익이 나온 시점에서 다시 0.35미크론급에 투자를 검토 중입니다.”
0.5미크론급 주문형 반도체 개발에 LC 반도체가 성공한 시기가 불과 작년이다.
이런 LC 반도체조차 주문형 반도체 투자를 3억 달러까지 끌어올려서 투자를 대폭 늘렸다.
그리고 LC 반도체의 이런 비메모리 사업에 대한 진출은 시작에 불과했다.
대운 전자 역시 비메모리 사업사와 합작 사업을 준비 중이니까.
이 살벌한 격전장에 KM 산업이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그런데 그 주인공은 어이가 없게도 최영란 본부장이었다.
“하면 정말 최문경 부회장이 최영란 본부장에게 밀리고 있다는 소리야?”
“그런 이야기가 KM 그룹 내에 돈다고 합니다. 아직 확인되지 않는 사실이기는 한데…….”
김현탁 본부장은 하도 황당해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그가 아는 재벌 3세 중에 이런 식으로 승진한 경우는 없었다.
더욱이 상대는 여자다. 최용욱 회장이 얼마나 남자를 선호하는데, 장녀에게 이런 식으로 일을 맡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말이 안 되잖아. 아무리 AD 설계가 대박 났다고 해도 이건 앞뒤가 맞지 않아.”
“더 파고는 있는데,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설마 최영란 본부장의 배후에 최민혁 실장이 있다는 소리야?”
“…네, 그런 것 같습니다.”
“하.”
김현탁 본부장은 KM 전자 내에 돌아가는 상황을 알게 되자 이게 그저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깨달았다.
충분히 가능한 스토리다.
다만 최영란 본부장이 최문경 부회장의 장녀라는 점이 문제다.
하지만 재벌가 내에서는 형제간의 골육상쟁도 벌어지는데, 부녀간의 갈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뭐,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김현탁 본부장은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런데 박태정 부장이 전화 연락을 받고 난 후에 TV를 틀었다.
이동통신 사업의 미래라는 시사 프로그램이었다.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최민혁 실장에 대한 인기는 엄청났다.
실제로 방송국 PD들은 계속 최민혁에게 전화해서 인터뷰하려 했다.
다만 최민혁이 굳이 이를 거절했다.
따라서 최민혁 실장이 직접 나서주겠다는 것을 거절할 PD는 없었다.
심지어 최민혁 실장이 원하는 주제로라도 말이다.
이게 최민혁 실장이 방송국을 이용하려는 이유다.
김현탁 본부장은 진작에 이런 분위기를 알고 있었음에도 막상 방송에 나온 최민혁의 얼굴을 보자 깜짝 놀랐다.
“아니, 저걸 왜 보여 주… 최민혁?”
최민혁 실장은 이동통신 사업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서 넌지시 IP 시티폰 이야기를 꺼냈다.
[저도 원래 이동통신 서비스 쪽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워낙에 이 분야를 좋아하는 분이 많아서 가능하면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알게 된 것이 바로 시티폰입니다.]
그럴듯한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최민혁이 IP 시티폰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딱 한 가지다.
[바로 저렴한 통신 요금 때문입니다. 3분에 50원 안팎으로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가 일반화가 된다면 일반 서민 삶에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통화료였다.
PCS와 CDMA 서비스가 얼마나 비싼지를 열심히 떠들었다.
[전 일반 서민의 통신료 절감을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면 IP 시티폰과 같은 서비스에는 결코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겁니다.]
구구절절한 호소였다.
자신이 한 말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을 피력했다.
그다음에는 IP 시티폰이 가지는 강점이 어떤지 설명해 주었다.
아니, 단순한 설명으로 끝내지 않았다.
KM 전자 연구실 내에서 테스트 중인 IP 시티폰을 직접 나타내 보였다.
잡다한 전선과 보드가 연결되어 있어서 실제 제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잘 동작했다.
운이 좋았다.
실상 이 테스트를 진행한 엔지니어들은 뒤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들도 최민혁 실장의 지시를 받아서 일방적으로 막 밀어붙이긴 했는데, 이렇게 동작할 수 있는 경우는 고작 10%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실상 생각보다는 더 문제가 많았다.
다만 그래도 수신 부분의 문제가 해결된 점은 고무할 만한 일이었다.
시티폰으로 발신하고, IP 시티폰으로 수신하는 장면을 여과 없이 보여준 것이다. 삐삐와 같이 사용한다면 꽤 그럴듯한 서비스였다.
“기가 막히는군.”
* * *
김현탁 본부장은 최민혁 실장의 이동통신 사업에 대한 방송을 보고 난 후에 오히려 최민혁의 행동에 대해서 더 의심했다.
그가 아는 최민혁 실장은 저런 놈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해가 안 되는 점은 이제 막 IP 시티폰 서비스 연구를 시작한 참인데, 그런 시점에서 저렇게 숨김없이 그대로 기술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설마 이 새끼가 사기를 치는 거야?’
하지만 김현탁 본부장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최민혁 실장이 막 나가도 저렇게 방송에다가 대놓고 사기를 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DL 화재 김희찬 부사장이 직접 자신을 찾아왔다.
“최문경 부회장, 한부 그룹, 우리 DL 전자, 그리고 오성 전자와 HY 전자 역시 이번 일에 손을 잡기로 했다.”
“네? 저, 정말입니까?”
“오성 전자 역시 IP 시티폰에 대해서 확신을 못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브리티스 텔레콤이 계속 이 일에 집착하는 것을 보자 지켜볼 수만은 없다고 판단했나 봐.”
김현탁 본부장도 깜짝 놀랐다. 브리티시 텔레콤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기 때문이다.
“브리티시 텔레콤이 IP 시티폰에 눈독을 들인다는 말입니까?”
“당연하잖아. 이제 사용자 숫자가 고작 10만 명대를 유지하는 것이 시티폰이다. 이 정도 시장이면 큰 강점이 없어. 그런데 IP 시티폰은 이야기가 달라. 이런 문제를 단숨에 일소할 만하니까.”
“그거야 다른 이동통신 서비스가 없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한 이야기 아닙니까?”
“아니, 그건 아닐 거다. IP 시티폰은 VOIP와 시티폰을 결합한 서비스다. 기술 개발에 따라서 VOIP 비중을 더 늘릴 수도 있어.”
VOIP에 관한 이야기는 대략 10년 후에나 나올 만한 이야기다.
근데 그 이야기가 지금 나온 셈이다.
그런데 이 기술은 10년 후에 나올 때도 장밋빛이 가득한 기술이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지금 이 시점에서는 VOIP 문제보다는 가능성을 더 크게 바라봤다.
인터넷 서비스는 앞으로 더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VOIP 기술도 덩달아서 발전하게 된다.
즉 미래에는 IP 시티폰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도 있었다.
“…….”
김현탁 본부장도 꽤 그럴듯하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런데 지금 정말 그렇게 된다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문제였다.
IP 시티폰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TDMA도 있고, CDMA가 있다.
그런데 과연 그들과 시티폰이 경쟁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은 삐삐가 폭발적으로 팔린 시점이다.
국민 삐삐란 말이 있을 정도로 다들 삐삐를 한 대씩 소유했다.
시티폰은 바로 그 시장을 기반으로 한 사업이었다.
지금 당장은 안 된다고 장담하기가 어려웠다.
김현탁 본부장은 그제야 한 가지를 질문했다.
“설마 정말 시티폰 회사 사장 자리를 저에게 주겠다는 말입니까?”
“어. 네가 그렇게 원한 일 아니냐? 설마 싫다는 소리야?”
“…그건 아닙니다.”
그는 차마 아버지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다만 자신이 계속 늪 속으로 깊이 빠져든다는 것만 느낄 뿐이다.
‘최 실장, 이 새끼가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는 거지?’
* * *
김현탁 본부장의 의문과는 별개로 IP 시티폰 이야기는 꾸준히 나왔다.
특히 KM 전자에서 내놓은 광고가 대박이었다.
최국진이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시티폰을 받는 CF가 시선을 끌었다.
공중전화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이 일상인 시대였으니까.
그런데 시티폰이 있는 사람은 굳이 공중전화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다른 장면은 호텔 로비다.
그 안에서는 IP 시티폰을 사용하면 간단히 수신과 통화를 같이할 수가 있었다.
기존 시티폰과는 차별화된 모습이었다.
이 광고는 IP 시티폰 때문이 아니라 광고 그 자체로 대중의 시선을 끌었다.
자연스럽게 IP 시티폰에 관한 이야기가 늘어났다.
IP 시티폰에 대해 문의하는 사람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IP 시티폰 정식 서비스는 언제부터 시작하는 겁니까?]
[IP 시티폰 통화 요금은 확정된 겁니까?]
[IP 시티폰으로 전화를 걸 수만 있다고 들었는데, 수신도 되는 겁니까?]
IP 시티폰에 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한영 일보도 IP 시티폰을 그냥 쳐다만 볼 수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여러 곳에서 압력 전화를 받았다.
최경진 편집장도 식은땀을 흘렸다. 생각보다는 무시하기 힘든 이들이 많았다. 특히 한부 그룹은 마치 스토커처럼 자신을 괴롭혔다.
그런데 이동수 부사장은 이미 최민혁 실장에게 된통 당한 후라 이 일에 끼어들지 않았다.
전권을 넘겨받은 최경진 편집장은 공포에 떨었다. 그는 최민혁 실장과 이미 약속까지 한 마당이니 최민혁을 공격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범용구 기자가 합리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굳이 고민하기보다는 최민혁 실장과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어떨까요? 어차피 이미 시티폰 이야기가 나온 마당에 덮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야, 범 기자, 너라면 외부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사를 내야 한다고 하면 좋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