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6.
그런데 무선랜 기술을 활용한 IP 시티폰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이 기술이 호텔, 공공기관과 같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적용된다면 상업적으로 충분한 강점이 있다.
게다가 이런 부분은 건축과 결부시켜서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런 점을 본다면 중화학 공업 쪽으로 계열사를 넓혀 가려는 DL 그룹에는 너무 이상적인 사업이다.
다만 이런 부분을 최민혁 실장이 모를까 하는 게 걸렸다.
최문경 부회장 역시 김현탁 본부장의 고민을 모르지 않았다.
“내 생각에 민혁이 그놈은 충분히 앞으로 생길 문제를 고려했을 거다. 그게 아니면 MP3 로열티 수익 협상 때문에 그럴 수도 있어. 이번에 재미를 단단히 봤잖아.”
오성 전자와 같은 대기업은 이미 KM 전자와 MP3 로열티 협상에 착수했다. 심지어 먼저 400억 가까운 계약금을 내놓기로 했는데, MP3가 사용된 전자 제품을 전부 묶은 계약금이다.
400억이란 돈이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오성 전자 입장에서는 차라리 이게 더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다만 KM 전자 측은 여전히 미적거렸다.
그러니 다른 대기업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아마 그것 때문에 서두른 것일 수도 있어. 이전처럼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 민혁 그놈에게 이를 갈고 있는 이들은 차고 넘치니까!”
“…….”
김현탁 본부장은 바로 그 당사자들 중에 자신이 속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분노가 가득한 눈을 한 최문경 부회장 말에 반박하지는 못했다.
‘정말 잘하는 짓일까?’
석연치 않은 점.
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KD LCD 분위기가 아주 좋아서 이번 일을 의심하기도 힘들어.’
실제로 KD LCD 내부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VM-LCD 품질 자체가 IPS LCD보다 오히려 나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기술과 관련해서 여전히 말이 나오는 것 한 가지가 있다.
바로 터치.
VM-LCD 방식은 IPS-LCD와 비교해서 터치를 적용하기가 어려웠다.
아직은 이게 무슨 문제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시티폰 사업이 망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단하기는 힘들었다.
실제로 최민혁 인생 1회 차와는 달리 기술적 개선점이 제안된 지금 이 시점에서는 말이다.
거기에 IP 시티폰은 더 상황이 다르다. 이동통신 업자의 견제도 없는 지금 시점에서는 상업적으로 충분히 강점이 있었다.
김상구 회장은 손자 김현탁 본부장의 반론을 곰곰이 생각했다.
“하면 이번 일은 KM 그룹과 우리 DL 그룹이 힘을 합치는 것으로 끝인가?”
최문경 부회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샐로먼 브러더스 측에서도 자본을 대기로 했고, 필요하다면 브리티시 시티콤과도 손을 잡기로 했습니다.”
“…….”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샐로먼 브러더스가 관련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더욱이 이들이 브리티시 시티콤과 협상을 진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국내 시장만을 본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즉, 국내 시장은 그저 시험대로 본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일이 그저 환상 속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 증거가 바로 최민혁표 CDMA 서비스다.
이 서비스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퀄컴은 보수적인 태도였다.
그런데 이 서비스가 나온 이후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퀄컴은 따로 ETRI에 연구진을 추가로 보내서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거기다 다른 것을 떠나서 퀄컴의 주가를 보면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가 있다.
IP 시티폰이 꼭 최민혁표 CDMA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김상구 회장은 탐욕을 숨긴 채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국내 시장이 아니라 해외 시장을 고려한 건가?”
“동남아 쪽은 이제 시티폰이 걸음마 단계입니다. 따라서 그 시장에 기반을 다질 수 있다면, 수익성은 굳이 말할 것도 없습니다.”
“호오.”
브리티시 텔레콤 이야기가 나오자 그다음 이야깃거리는 뻔했다. 이들이 나서서 동남아 각국의 통신 회사와 손을 잡을 테니까.
결국 그런 식으로 사업을 늘려가면, 어지간한 동남아 국가는 다 관련이 된다.
그 수익은 천문학적일 것이다.
아니, 이게 다가 아니다.
통신 쪽에서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이 인맥을 이용해서 좀 더 사업 규모를 키울 수 있다.
그 이익이 얼마가 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본만 대는 것으로 이권을 챙길 수가 있는 셈이다.
김상구 회장은 밝은 미소를 한 채 결국 최문경 부회장과 손을 잡았다.
“우리 쪽에서는 최문경 부회장 자네를 밀지. 필요하다면 최용욱 회장에게도 이야기해 놓겠네. 이번 일은 한 번 잘해보세. KD-LCD와는 달라. 이동통신 서비스 사업이 주는 부가가치는 자네가 누구보다 잘 알 테니까.”
“물론입니다!”
* * *
최용욱 회장은 김상구 회장에게서 IP 시티폰과 관련된 전화를 받고 나서는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이미 자신이 승인한 사업이니까.
최문경 부회장의 행보 역시 이번 IP 시티폰 사업에 무한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다만 그가 걱정한 것은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이었다.
그는 혹시라도 불협화음이 생길 것을 염려해서 KM 전자를 찾았다.
KM 전자 로비는 이전과 비교하면 더욱더 정신이 없었다.
KM 전자를 찾아온 바이어들의 숫자 때문이다.
특히 최민혁표 CDMA 서비스 성공 이후에 IP 시티폰 사업 이야기가 돌고 나서는 바이어 숫자가 더 급증했다.
회사 브랜드인지도가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것이었다.
“…대단하군.”
장승일 실장이 최용욱 회장의 뒤를 따르면서 조심스럽게 말해주었다.
“이번에 출시한 125와트급 델타 3500이 출시되기가 무섭게 매진되었다고 합니다.”
델타 3500은 CD 7장을 동시에 넣어서 들을 수 있는 음악 장비다. 고출력이란 점을 고려해도 소비자 가격은 무려 220만 원이 넘었다.
이 비싼 장비가 출시하기가 무섭게 전량 다 팔린 것이었다.
심지어 수출을 원하는 바이어 숫자도 넘쳐났다.
오디오 사업부가 최민혁 실장 덕분에 또다시 대박을 친 것이다.
최용욱 회장 처지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그가 아는 KM 계열사 중에는 이런 실적을 쌓은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실 좀 미안했다.
IP 시티폰 사업을 최문경 부회장이 먹는 것 자체가 이제까지 최민혁 실장이 하려는 신사업을 가로채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은 때문에 약간 마음에 들지 않는 회사 모습이 있어도 그저 웃기만 했다.
거기다 그는 최민혁과 마주해서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회사 분위기가 좋더구나.”
“다 할아버지 덕분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 할 필요는 없어. 오디오 사업부 대박도 다 너 덕분이니까.”
“하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장승일 실장이 조용히 보고 있다가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이달 오디오 사업부 매출은 작년과 비교해서 무려 400%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압니다. 제품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이전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데도 이런 성과가 나왔습니다. 이건 회사 브랜드가치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즉, 실장님이 선택과 집중을 통해서 회사 가치를 키웠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최민혁은 장승일 실장의 노골적인 칭찬을 웃으면서 받아넘겼다.
그 모습은 이제 풋내기 경영인과는 많이 달랐다.
최용욱 회장이 바로 그 점을 짚고 넘어갔다.
“이제 진급해야 하지 않느냐?”
“아, 이사, 부사장 자리 말입니까? 아직은 지금 이 자리가 좋습니다.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네 역량은 이제 단순히 기획실장 수준을 넘어섰다. 적어도 부사장 정도는 되어야 격에 맞지 않겠느냐?”
꼬장꼬장한 최용욱 회장의 지적에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부사장이 되면, 실무에 직접 관여하기 어려워집니다. 하려면 하겠지만, 딱히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기획실장 자리에 있을 생각입니다.”
기획실장 자리는 어떻게 보면 KM 전자의 모든 사업 아이템을 관리하는 자리이다. 실제로 엔지니어에 간섭할 수도 있고 말이다.
최용욱 회장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하지만 그는 오늘 이 자리가 최민혁을 깨려고 온 자리는 아니었기에 순순히 수긍했다.
“그런데 말이다. IP 시티폰 말인데, 혹시 그룹 차원에서 이 사업을 미는 것은 어떠냐?”
최민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내 말은 이미 넌 CDMA 사업에도 어느 정도 숟가락을 올렸지 않느냐? 그런데 시티폰 사업까지 먹는 것은 좀 보기 그래서 하는 소리다.”
“아니, 할아버지가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뜻을 모르겠습니다.”
“너에 대해 반감을 품은 세력이 늘어났다. 당장 국세청 내사가 그 증거의 하나다. 비록 불법적인 일이라고 해도 이런 문제가 과거에는 생기지 않았어.”
“이 일도 그럼 결국 제가 혼자 다 먹어서 그렇다는 말입니까?”
“그래. 너에 관해서는 계속 말이 나오고 있어. 밝은 자리이든, 어두운 자리이든 마찬가지다. 너무 한쪽에 치우친 것은 좋지 않다.”
“그 이야기는 더 듣고 싶지 않습니다. 가만, 설마 우리 첫째 큰아버지에게 시티폰 사업을 맡기겠다는 말입니까?!”
최용욱 회장은 냉랭한 최민혁의 목소리를 듣자 몸을 움찔 떨었다.
그가 생각해도 좀 너무 나간 것 같았다.
걱정되어서 이 자리에 온 것인데, 최민혁의 반응은 예상보다 더했다.
장승일 실장이 최용욱 회장의 시선을 받자 바로 나섰다.
“시티폰 사업은 정보 통신부를 비롯해서 여러 이권 단체가 많이 엮여 있습니다. 아직 최 실장님은 그쪽에는 인맥이 약한 것으로 압니다. 차라리 이번 일은 그룹 차원에서 진행하는 것이 매끄럽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은 좀 달라요. 시티폰 사업은 이제 걸음마 단계이고, 시장 자체가 그렇게 크지 않아요. 그러니 CDMA 서비스와는 좀 다릅니다.”
냉랭한 최민혁 실장의 반응에 장승일 실장은 다소 당황했다. 그가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IP 시티폰 사업이 지금까지 진행한 최민혁 실장의 다른 사업과는 좀 달랐기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도 그 점을 인정했다.
“민혁아, 이건 널 위해서 하는 소리다. 지금처럼 사방에 적을 자꾸 만들다 보면, 고립될 수가 있어. 이럴 때는 한 걸음 물러서 주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흠.”
최민혁은 내심 크게 웃고 말았다. 설마 최용욱 회장이 직접 찾아와서 이런 제안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자신이 틈을 줬기 때문이다.
장승일 실장도 바로 그 점을 파고들었다.
“이미 최 실장님이 방송을 통해서 이동통신 사업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이게 결국 문제가 될 겁니다. 그러니 차라리 더 말 나오기 전에 그룹 차원에서 IP 시티폰 사업을 진행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최민혁은 단호했다.
“한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래. 이런 제안을 해서 미안하기는 하다만 이건 민혁이 네가 자초한 거야. 방송에서 그런 이야기만 하지 않았다면 이런 제안을 하지 않았을 거다!”
“…알겠습니다.”
* * *
최민혁은 갑작스러운 최용욱 회장의 방문에 사무실에서 한참 동안 웃고 말았다. 그는 뒤늦게야 이 일이 최문경 부회장이 김상구 회장을 만난 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원한 그림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부터 내 메소드연기가 중요하겠어. 억울하게 여론에 밀려서 기술을 강탈당하는 연기를 해야 하니까.’
물론 보상은 제대로 받아야 했다.
최용욱 회장에게도 챙길 것은 챙길 거다.
‘KM 산업 지분이 좋겠지. 많이 달라고 하면 거절할 테고, 역시 2%가 좋을까?’
이것저것 챙길 만한 것을 고민했다.
당연히 이게 가능한 것은 IP 시티폰 기술이 진짜였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무선랜 관련 원천기술 매각은 할 수가 없었다.
뭐 적당히 특허료를 받기만 해도 된다.
어떻게 보면 좋은 기회인 셈이다.
그는 이 단계에 접어들자 이전과는 좀 다른 방향을 생각했다.
곧이어 그는 홍보 팀장 이용식 부장을 호출했다.
“방송국과 한번 이야기를 해보세요.”
이용식 부장은 최민혁의 갑작스러운 지시에도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모바일 통신 사업의 미래에 대한 시사 프로그램으로 한 번 방송국과 이야기해 보란 말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