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555화 (555/1,021)

#555.

그녀는 힐끗, KM 그룹 본사를 오가는 임직원이 최민혁 실장뿐만 아니라 자신을 보고도 화들짝 놀라 물러서는 모습을 봤다.

이전에는 없던 모습이다.

아무리 그녀가 KM 그룹의 재벌 3세라고 해도 저러지는 않았으니까.

임직원이 보이는 행동 속에는 존경과 함께 두려움도 있었던 것이다.

최민혁은 물론 이런 분위기가 익숙했다.

“내가 해줄 말은 이미 다 끝난 것 같아. 이제는 KM 산업을 시작으로 해서 KM 그룹에서 영향력을 계속 키워가 봐.”

“그래. 그리고 고마워.”

“가족끼리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그녀는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최민혁이 자신을 찾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에게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최민혁이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최영란 본부장은 수행원을 뒤로 물렸다.

그녀는 최민혁 옆에 바짝 붙었다.

“무슨 일이라도 터진 거야?”

“아, 그런 것은 없어. 다만 내가 지금 IP 시티폰이라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거야. 뭐, 대충 들은 이야기는 있을 테니, 자세한 말은 할 필요가 없지.”

여기까지 말한 최민혁은 최영란의 표정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IP 시티폰 사업에도 무선랜 관련 장비나 칩 개발은 있어. 그것까지는 해도 좋은데, 시티폰 자체에는 너무 적극적으로 끼어들지 마.”

“…시티폰 사업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거야?”

최민혁도 이와 관련해서는 자세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거야 모르는 사실이지. 다만 리스크가 너무 높은 사업이니까. 굳이 IP 시티폰 쪽에 손을 댈 거면, 선택과 집중을 하라는 거야.”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어?”

“우리 부회장은 IP 시티폰 사업에 전력투구할 테니까. 그러니 부회장에게 적당히 밀리는 척을 하면 좋겠어.”

최영란 본부장은 그제야 최민혁이 굳이 자신을 만나러 온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가 이번 사장단 회의를 통해서 인정을 받은 만큼 괜히 오버할 것을 염려한 것이다.

최민혁의 예측대로 된다면 KM 그룹에서 자신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진다. 심지어 최문경 부회장을 압박할 수도 있었다.

“…알겠어. 시티폰 사업은 조심할게.”

최민혁은 그제야 만족했다.

“다만 다른 사업은 좀 달라. 할 수 있는 최대한 능력을 발휘해서 우리 큰아버지를 압박해 봐. 덩치가 커진 만큼 누나 능력을 인정받을 거야. 아마 한 2년만 빡빡하게 밀어붙이면, 할아버지도 누나를 인정할 거야.”

“…고마워.”

최영란 본부장은 굳이 최민혁에게 자세한 의문을 표시하지 않았다. 오늘 사장단 회의에서 이미 최민혁의 능력을 충분히 느꼈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도 시티폰 사업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익히 알았다.

“그런데 정보 통신부에서 말이 나오지 않을까?”

최민혁은 방긋 미소 지었다.

“그쪽은 이미 손을 써 놓았으니, 걱정하지 마.”

“…알았어.”

그녀는 간단히 용건만 끝내고 돌아서는 최민혁의 뒷모습을 보면서 혀를 차고 말았다.

자신에게 손을 쓴 것도, 시티폰 관련 사업도 뭔가 노림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설마 시티폰 사업 때문에 KM 그룹도 악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일까?’

* * *

이원한 실장은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받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그의 지시를 따라서 행동하지는 않았다.

우선 정보 통신부 내부 검토는 물론 기술 전문가를 통해서 IP 시티폰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IP 시티폰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바로 저렴한 통신료 때문이다.

이 부분은 공공성하고도 관련이 있다.

또한 이 시스템은 CDMA나 PCS와는 서로 다른 영역에 존재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아직 이동통신 카르텔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이동통신 사업자가 힘이 있다면 그들이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서 IP 시티폰에 압력을 넣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 정도의 힘을 갖추진 못했다.

이원한 실장은 결국 IP 시티폰 관련 자료를 한국 통신 측에 슬쩍 떠넘겼다.

그리고 한국 통신은 최민혁 실장의 시티폰 자료를 받고 나서는 이를 진지하게 검토했다. 최민혁 실장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는 이미 CDMA 서비스를 통해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자료는 CDMA 서비스보다는 질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이동통신 사업에서 밀린 시티폰 관련 지역 사업자는 IP 시티폰에 환호를 내질렀다.

세세한 기술적인 면은 부족했지만, 그 방향 자체는 옳았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자료에 주로 나와 있는 것이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만이 아니란 것이었다.

오히려 임대 판매, 할부, 가입비와 관련된 마케팅 측면에 대해 잘 나와 있었다.

그 외에도 시티폰 시장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안이 있었는데, 이런 부분이 지역 사업자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한국 통신은 이 부분을 가지고 지역 사업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장 활성화를 위한 공조 체제 부분은 확실히 그들이 예상한 바이지만 이렇게까지 구체적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 기술의 강점은 기존 시범 서비스 수준과는 격이 많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무선랜을 이용한다면 기존 시티폰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었다.

다만 이들 지역 사업자가 걱정한 것은 이 사업에 최민혁 실장이 끼어들려고 하는 점이다.

최민혁 실장이 내놓은 자료는 CDMA 기술에 비해서는 어설픈 내용이지만 기술적인 특허를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결국 일은 자신이 하고 이익은 최민혁 실장이 챙길 확률이 높았다.

실상 이미 최민혁표 CDMA 서비스가 그랬다. CDMA 서비스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이 심해지는 것도 결국 최민혁 실장과 ETRI가 이익을 너무 많이 가져가기 때문이었다.

다만 아직은 IP 시티폰 사업을 CDMA 사업처럼 처리할 수는 없었다.

“다 좋습니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기술에 불과합니다. 과시적으로 결과가 필요합니다. 그게 있다면 굳이 IP 시티폰을 채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즉, 결과가 나오면 그때 가서 이야기하자는 거다.

“…알겠네.”

그로서는 한결 부담을 던 결정이었다.

이건 딱히 특혜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IP 시티폰이 정말 가능하기는 할까?’

* * *

IP 시티폰를 둘러싼 이야기는 정보 통신부를 시작으로 관련 사업자에게도 흘러 들어갔다.

만약 최민혁 실장이 이 IP 시티폰 기술과 관련된 특허를 내지 않았다면 심각하게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최민혁 실장이 IP 시티폰 관련 특허 수백 건을 출원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정도에서 그쳤다면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 특허들 안에 무선랜 관련 특허가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무선랜 특허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소에서 관심을 두고 들여다봤다.

따라서 IP 시티폰 기술이 기존 시티폰 기술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부인하는 이는 없었다.

특히 최문경 부회장은 이 IP 시티폰에 이전과는 달리 집착했다.

장녀 최영란 본부장이 KM 산업에서 자기 역량을 키우는 만큼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KM 그룹과는 계열 분리된 KM 전자의 오너인 최민혁 실장과는 이야기가 달랐다.

KM 산업 자체는 최문경 부회장의 구역이기 때문이다.

그는 구석으로 몰리자 이런저런 다양한 고민을 했다. 솔직히 KM 그룹을 포기하면 그뿐이다. 차라리 분위기를 보면서 얻을 것을 챙기는 것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최용욱 회장이 자신에게 꽤 많은 것을 상속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샐로먼 브러더스가 최민혁 실장을 공격하는 틈을 이용해서 어부지리를 취하는 방법도 있으니까.

‘아니,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솔직히 조카 최민혁 실장이라면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그도 처음에는 한부 그룹 최명진 회장에게 다시 도움을 청할까 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최 회장은 부동산 쪽 전문가야. 전자 쪽하고는 거리가 있어.’

그러다 결국 택한 차선책이 DL 그룹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고민한 끝에 DL 그룹 김상구 회장에게 연락했다.

다행히 김상구 회장은 마치 자신의 연락을 기다린 사람처럼 바로 약속을 잡았다.

만남 장소는 굳이 멀리 가지 않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DL 그룹 본사에 직접 찾아갔다.

회장실 안에는 뜻밖에도 김희찬 부사장을 비롯한 김현탁 본부장도 자리해 있었다.

특히 김현탁 본부장은 IP 시티폰 이야기를 듣고는 의문이 많은 얼굴이었다.

실상 전자 쪽을 잘 모르는 김상구 회장이나 김희찬 부사장을 대신해서 나선 것이다.

“…저도 IP 시티폰에 대해서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정말 궁금해서 하는 질문인데, 도대체 KM 전자는 언제부터 IP 시티폰 기술을 연구한 겁니까?”

건방진 질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김상구 회장이나 김희찬 부사장 역시 끼어들지 않았다. 두 사람 역시 김현탁 본부장과 비슷한 얼굴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역시 잘 모르는 사실이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나와 있는 기술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었다.

“굳이 그런 사실까지 알아야 하나?”

김현탁 본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KD LCD에서 적용된 LCD 원천기술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기술이 바로 IP 시티폰입니다. 특히 무선랜 원천기술에 관한 연구는 이제 막 활성화되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무선랜에 대한 표준이 나온 시기는 몇 년이 채 되지 않았다.

따라서 상업적인 무선랜에 관한 기술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주파수 표준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 때문에 이 기술은 아직 그리 나아가지 못한 상황이다.

문제는 최민혁 실장이 내놓은 무선랜 특허 중에 일부가 이 한계를 극복했다는 점이다.

김현탁 본부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문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그는 이전과는 달리 근원적인 부분을 지적했다.

최문경 부회장도 그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김현탁 본부장과는 입장이 달랐다.

“굳이 그런 것까지 알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IP 시티폰 기술을 우리가 얻는다면, 그 출처는 중요하지 않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마 최민혁 실장이 IP 시티폰 기술을 양보할 거로 생각하는 겁니까?”

“당연하지. 그 녀석은 자기 입으로 이동통신 시장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잖아.”

“그건 저도 압니다. 그런데 그 정도 약속은 말을 바꾸면 간단히 될 일입니다.”

“내 생각은 달라. 민혁이 그놈에게 불만을 품은 언론 세력도 많아. 그들을 뒤에서 부추긴다면 여론을 충분히 그놈에게 불리하게 몰아갈 수 있어.”

“…글쎄요.”

김현탁 본부장도 이 계획에는 슬쩍 양손을 든 채 물러나고 말았다. 최문경 부회장의 제안이 틀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최민혁 그 새끼가 과연 양심이 있느냐가 문제겠지.’

김상구 회장이 조용히 두 사람의 논쟁을 듣다가 불쑥 끼어들었다.

“최민혁 실장 그 녀석은 이미 CDMA를 통해서 충분히 이동통신 시장에 발을 들여놓았잖아. 여기에 IP 시티폰 기술까지 독단적으로 하는 것으로 문제가 있어.”

바로 독과점 문제였다.

정보 통신부도 부담을 느낄 일이었다.

때문에 이들이 언론과 정치권을 이용해서 최민혁 실장을 공격한다면 최민혁 실장도 무조건 자기 뜻대로 할 수 없어질 터였다.

최문경 부회장은 김상구 회장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은 저, DL 그룹, 필요하다면 다른 우군까지 끌어들여서 진행할 일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민혁이 그놈도 고집을 부리기 어려울 겁니다.”

김현탁 본부장은 썩 마음에 든 얼굴은 아니었다. 다만 그도 할아버지 김상구 회장의 능력을 잘 알았다. 그리고 최문경 부회장도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한부 그룹 최 회장과도 가까이 지낸다고 했잖아. 거기에 최민혁 그놈을 좋아하는 대기업 회장은 거의 없으니까.’

결국 시티폰 지역 사업자를 끌어들여서 최민혁을 압박한다면 최문경 부회장의 계획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옆에서 조용히 대화를 듣던 김희찬 부사장이 끼어들었다.

“현탁이 네 녀석이 평소 원하는 이동통신 기술을 할 기회인데, 부정적이냐?”

“아뇨. 저도 IP 시티폰이 가능성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지금까지 시티폰 사업이 제대로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은 기술적인 한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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