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553화 (553/1,021)

#553.

그가 떠올린 것은 과거 최민혁 실장의 선친 최병문 상무가 벨린 투자를 이용해서 전 세계를 누비면서 투자를 할 때다.

한창 최병문 상무가 잘나갈 때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 역시 최병문 상무를 이용해서 최대한 이익을 봤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막이 밝혀지지는 않았다.

다만 최병문 상무가 죽기 전까지 말이 많았던 것이었다.

만약 벨린 투자의 이익금이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컸다면 이를 두고 대립과 갈등이 이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조성돈 팀장은 힐끗 최민혁 실장의 얼굴을 살폈다.

당시에 있었던 일 대부분이 소문에 불과해서 명확하지 않은 사실.

그는 물론 확실치도 않은 일로 입을 열지는 못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본다면 분명 최문경 부회장과 관련이 있다.

최민혁 실장이 최문경 부회장을 박살 내려고 할 때마다 새로운 기술이 하늘에서 뚝뚝 떨어졌다.

그런 점을 본다면 최민혁 실장은 지금까지 진정한 자신의 실력을 내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새삼 두 사람 사이의 복잡한 알력 문제와 최민혁의 잠재력을 깨닫고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이건 내가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야.’

* * *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이 나선 덕분에 곧바로 정보통신부의 이원한 실장과 약속을 잡았다.

이미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놓은 덕분에 만남은 어렵지 않았다.

이원한 실장은 최민혁 실장을 만나기가 무섭게 CDMA 서비스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최민혁 실장님 덕분에 많은 리스크와 비용을 줄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의례적인 말이 아니었다. 겉으로 봐서는 최민혁 실장은 얻는 것이 별로 없었으니까.

물론 그런 이야기를 꺼내려고 공식적인 이 자리에 온 것은 아니다.

그는 이원한 실장의 진심 어린 이야기를 들은 후에 넌지시 시티폰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시티폰 사업을 좀 더 빨리 진행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네? 시티폰 사업 말입니까?”

“네. 아무래도 PCS 사업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봤을 때도 이번이 최적의 적기라고 생각됩니다.”

시티폰 서비스는 PCS의 가장 초기 단계로 이미 천 명이 넘는 대상을 상대로 시범 서비스에 들어갔다.

올 연초에 시작된 이 서비스는 기지국을 중심으로 반경 150m 내에서 발신 통화만 할 수 있다.

인근 기지국을 통해서 일반 전화 통신망과 연결이 된다.

다만 발신 전용이라는 한계 때문에 구역을 넘어갈 때 자동 전환되는 핸드오프 기능이 없어서 이동 중에는 사용하기 어렵다.

결국 사람이 많이 몰리는 지하상가, 버스 정류장, 호텔과 같은 공공장소 위주로 테스트가 진행 중이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한국통신도 골머리를 앓았다.

말이 좋아서 시범 서비스이지 결과는 기대 이하였기 때문이다.

아예 시티폰 사업을 접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정 안 되면 그냥 사업자에게 허가만 주고 물러나자는 소리도 있다.

더욱이 최민혁표 CDMA 시범 서비스가 대대적으로 성공한 게 문제였다.

그때 이후로 한국 통신도 이 시티폰 사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국가별 가입자 수다.

홍콩이 13만 명, 프랑스 10만 명, 싱가포르 3만 명, 중국 1만 명으로 사람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최민혁은 오히려 이 상황을 반대로 해석했다.

“시티폰 서비스는 프랑스, 네덜란드, 핀란드와 같은 유럽뿐만 아니라 동남아, 캐나다, 미국에서도 설치 중입니다. 잘하면 오히려 이 시장을 역으로 공략할 수도 있습니다!”

이원한 실장은 최민혁의 눈치를 봤다. 원론적으로 반대할 제안은 아니었다.

“정보통신부에서도 내부적으로 시티폰 사업에 대해 많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사용자 숫자가 그렇게 많이 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실장님의 CDMA 서비스 때문에 그렇게 일정을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CDMA와 시티폰 서비스는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그건 정보 통신부에서 고민할 부분이 아닙니다. 정보통신부에서는 허가만 내주면 될 일입니다.”

“허가 말입니까?”

“정보통신부에서는 가이드라인만 주고, 방향만 잡으면 됩니다. 나머지는 한국통신과 지역 사업자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아니, 저도 시티폰 사업을 돕겠습니다. 또 혹시 압니까. 이번 시티폰이 대박 나서 해외로 수출할 길이 열릴 수도 있습니다!”

“해외 수출 길이라…….”

이원한 실장은 고민에 빠졌다. 지금 정보 통신부는 CDMA 사업으로 난리였다. 한국 내의 모든 기업이 죄다 몰려와서 이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문의하는 중이다. 게다가 정보 통신부는 이권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피력했다.

이 모든 일이 다 최민혁 실장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따라서 최민혁 실장 제안을 이제는 무시할 수 없었다.

다만 이원한 실장으로선 시티폰 사업은 머리 한구석에 처박아놓은 상태였기에 그걸 꺼내서 다시 살피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최 실장님은 본인 스스로 이동통신 사업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PCS 사업이 그렇다는 거죠. 시티폰 사업은 이야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당장 외국 사용자 숫자를 봐도 PCS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뭐, 그렇기는 하지만…….”

이원한 실장도 정말 그런가 고민했다. 그런데 확실히 두 아이템은 차이가 있다. 다만 언론에서 이걸 걸고넘어지면 문제가 된다.

하지만 그도 한 가지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최민혁 실장이 직접 시티폰 사업에 뛰어든다면 그만큼 일정이 당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이권 문제는 나중에 가서 정보 통신부가 중재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시티폰이 간단한 기술은 아닙니다. 이번 시범 서비스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고, 그걸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시티폰 사용 서비스의 도입이 내년 6월부터라고 하지만 실상 그렇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최민혁 실장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시티폰 관련 자료를 내놓았다.

“여기 있습니다.”

“…이게 뭡니까? 설마…….”

이원한 실장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민혁 실장이 내놓은 자료를 살폈다. 하지만 그는 CDMA 서비스와는 자료에 질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슬그머니 최민혁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최민혁도 할 말이 있었다.

“시간이 너무 없어서 간략하게 정리만 했습니다. 이 기술은 기존의 시티폰 단점을 극복한 IP 시티폰입니다.”

“…IP 시티폰이라니.”

이원한 실장은 황당해서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를 따라서 자리에 참석한 실무진들은 IP 시티폰 자료를 보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 역시 관련된 정보를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이건 시범 서비스와는 다르잖아.]

[아, 무선랜을 이용해서 시티폰 단점을 극복한 것 같습니다.]

[어, 이게 되는 거였어?]

[무선랜을 이용해서 발신 한계를 극복하는 아이디어는 제법 있었습니다. 실제로 연구를 하는 쪽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잖아!]

두런두런거리는 이야기 속에는 놀람만이 가득했다.

무선랜을 이용한 통화 기술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꽤 나왔다.

다만 아직 무선랜 기술도 안정화되지 않은 시점이다 보니 성급한 주장이었다.

그런데 최민혁이 가져온 자료에는 그 부분에 대한 대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기술특허도 말이다.

특허 항목과 내용을 살피는 실무자는 곧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들은 최민혁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CDMA 서비스 자문 때문에 정신이 없던 최민혁이 도대체 언제 시티폰 관련 기술을 연구했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이로써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최민혁은 굳이 이 자리에서 정보 통신부 실무자를 무리하게 압박하지 않았다.

굳이 자신이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최민혁표 CDMA 서비스 때문에 그의 영향력은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검토를 해보세요. 아마 이 자료를 보면 시티폰 엔지니어도 다른 의견을 내놓을 겁니다.”

“그래요? 하면 이번 시티폰 사업에도 최민혁 실장님이 나서서 힘을 보태겠다는 말입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다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굳이 그런 부분을 숨기지도 않았다.

“아무렴 제가 이 사업에 직접 뛰어드는데,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이번 사업에 대해서는 손해가 나는 부분에 대해서 감수를 하겠습니다.”

이원한 실장은 뻔히 속 보이는 최민혁 실장의 코멘트에 별다른 의견을 달지 않았다. 그가 아는 바로 최민혁 실장이 무슨 일을 하든 손해 보는 것을 못 봤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내부적으로 한번 검토를 해보겠습니다.”

* * *

최민혁은 이원한 실장을 만난 후에 김명준 과장에게 따로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최문경 부회장에게 이 정보를 흘리라는 말씀입니까?”

“네, 특히 강조해야 할 점이 바로 이 사업 영역을 동남아 쪽으로 투자를 늘리려고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걸 최문경 부회장이 믿을까요?”

“글쎄요. 그게 중요할까요? 시티폰 서비스는 나름 PCS 사업이 일반화되지 않는 곳이라면 파고들 틈이 꽤 많아요. 특히 동남아 시장이 그렇죠. 그곳은 PCS 사업이 아직 자리 잡으려면 시간이 꽤 걸리니까.”

정확히는 최민혁의 인생 1회 차 기준으로 볼 때 한국에서 PCS 시장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는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3~4년 후다.

따라서 동남아 쪽은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 내에 시티폰이 성공한다면 이를 이용해서 동남아 시장에 진출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이 단계까지 나아간다면, 이후 전 세계 틈새시장을 공략하기에도 충분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지금 시점에서 시티폰 사용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IP 시티폰이 국내에서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둔다면 세계 시장에서 시티폰의 위상은 달라질 것이다.

‘뭐, CDMA가 좀 더 일반화가 된다면 IP 시티폰의 몰락도 필연이지. 통신사업자가 IP 시티폰을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이유는 이해관계 때문이다.

통신사업자는 다양한 이유를 들어서 시티폰을 압박할 것이다.

CDMA 상용화가 아직 제대로 되지 않은 시점이라면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비싼 TDMA 서비스가 바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니까.

더욱이 이 새로운 시장 진출을 주장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한국형 CDMA 서비스 공략에 앞장선 최민혁 실장 자신이었다.

김명준 과장은 고민을 거듭했다. 그는 최민혁이 도대체 뭘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괜찮겠습니까. 제가 통신 시장을 잘 모르지만, 최 실장님은 지금 시티폰 끝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러는 것 같아서요.”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라고 해서 항상 성공하라는 법이 있습니까?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시티폰 서비스 자체는 나쁘지 않아요. 가격 단가를 낮추면 PCS 서비스보다 압도적인 경쟁력을 가집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오영근 사장님에게는 제가 따로 말을 해둘 테니, 우리 첫째 큰아버지나 계속 견제를 해주세요. 그것이면 됩니다.”

“…네.”

* * *

오영근 사장은 최근 최민혁 실장이 바쁘다는 것을 들었기에 묵묵히 자기 역할만 했다. 그는 딱히 최민혁 실장의 눈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역시나 최민혁 실장이 자신을 찾아와서 IP 시티폰에 관한 이야기를 넌지시 꺼냈다.

더욱이 그는 IP 시티폰의 문제에 대해서는 숨기지 않았다.

정확히는 애매하게 말을 빙빙 돌려서 이야기했다.

“…하면 최 실장 말은 IP 시티폰 사업을 접을 수도 있다는 소리잖아? 결국 최악에 IP 시티폰 사업을 매각하겠다는 소리인가?”

오영근 사장은 말을 하면서도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최민혁 실장이 사업부를 매각해서 재미를 봤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IP 시티폰 사업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이해관계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아, 물론 무선랜 기술은 매각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굳이 이런 상황을 내색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IP 시티폰 쪽에 집착하는 듯한 면만 보이면 됩니다.”

“그 내용을 KM 그룹 사장단 회의에 가서 말하란 소리인가?”

“네, 대신 일본 내수 시장에서 벌어진 콜린스 돌풍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처리한 다음에 꺼내주세요.”

“그건 잘 알겠네.”

오영근 사장도 눈치는 있다. 그는 최민혁 실장과 최문경 부회장의 갈등을 잘 알았다. 그래서 무리하게 최민혁을 자극하지는 않았다.

그는 최민혁의 주장을 정리한 후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최영란 본부장 쪽에 힘을 실어주라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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