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7.
데이비드 싱어 수석 매니저 역시 침통한 표정이었다.
“이 일 때문에 한국 내의 자금 흐름이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기존 계획에 변경이 필요해?”
“한국 기업들의 분위기가 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정확히는 KM 그룹의 구조조정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이 공격적인 사업 매각을 진행하면서 다른 대기업들도 이전과는 달리 이런 행보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최용욱 회장이 왜 굳이 구조조정이 끝난 기업을 매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여전히 무시한 이들도 있긴 했지만, 불안감을 느낀 기업들은 알아서 움직였다.
한국 경제의 큰 흐름이 바뀐 것이다.
샐로먼 브러더스는 결국 자신이 만든 계획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검토해야 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변화를 일으킨 주체가 다름 아닌 KM 그룹이다. 자신이 모를 수가 없다.
자신에게도 다른 대기업들이 조언을 요청하니까.
심지어 그들 중에는 한부 그룹 최명진 회장도 있었다.
적당히 둘러대기는 했지만 따가운 눈총을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제임스 러너 이사는 최문경 부회장의 눈치를 봤다.
“부회장님은 혹시 아는 것이 없습니까?”
“지금 날 의심하나?”
“아닙니다. 하지만 KM 그룹이 현재 계열사 매각에 가장 적극적입니다.”
정보를 흘렸느냐는 질문이다.
최문경 부회장 눈썹이 꿈틀했다.
“도대체 날 얼마나 우습게 아는 건가?”
“그 반대입니다. 최문경 부회장님은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알지 않습니까. 이를 최대한 이용하면 큰 이익을 볼 수도 있습니다!”
“나도 자세한 내막은 몰라!”
하지만 제임스 러너 이사는 최문경 부회장의 태도와는 달리 꽤 집요했다.
“아니, 부회장님은 누구보다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압니다. 모른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합니다.”
“난 정말 모른다니까. 내가 당한 꼴을 보면서도 그런 말이 나와?!!”
제임스 러너 이사는 격렬한 최문경 부회장의 반발에 한 걸음 물러났다.
“…좋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이 너무 심각해서 아무래도 본사에서도 진지하게 재검토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해서 최민혁이 손을 쓴 덕분에 한국 내의 자금 흐름이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의미다. 이런 변화는 샐로먼 브러더스가 전혀 예측 못 한 일이다.
즉,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샐로먼 브러더스가 원점에서 다시 한국 경제를 살펴봐야 한다는 의미다.
그건 그들에게 아주 안 좋은 일이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이동통신 사업이 큰 변화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동통신 사업은 지금 치열한 경쟁 속에 놓여 있다. 기본적으로 휴대전화 시장 자체는 시간이 갈수록 경쟁력이 높아진다.
비록 TDMA 시장이 주류를 형성했다고 해서 CDMA 시장이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 한국형 CDMA 서비스가 만약 다른 국가에도 적용된다면 그 판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샐로먼 브러더스라고 해도 무시할 만한 사업이 아니다.
아니, 그 반대였다.
샐로먼 브러더스는 사전에 이 사업에 손을 대야 했었다.
“…퀄컴 주가가 폭등한 것을 말하는 거야? 그것도 민혁이 그놈이 저지른 일이잖아. 나는 그 사업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 우리 KM 그룹이 끼어들 틈이 없었어!”
“…….”
데이비드 싱어 수석 매니저는 최문경 부회장의 항변에 조용히 침묵했다. 그 역시 자료를 살피면서 상황이 생각한 것보다는 더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히 한국형 CDMA 서비스만 보면 별달리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퀄컴 본사에서 이를 이용해서 다른 국가에 서비스할 수 있다는 점이 진짜 문제였다.
그렇게 본다면 당장 동아시아, 일본과 같은 미국 동맹국들이 전부 다 여기에 해당된다.
그 규모 전체를 고려하면 수백억 달러 규모의 시장이었다.
그리고 샐로먼 브러더스가 사전에 퀄컴 기차에 탑승하지 못했다는 것이 패착이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당장 최민혁 실장 본인과 엮을 수는 없었다.
일은 최민혁 실장이 하지만 퀄컴이 그걸 다 챙겨 먹으니까.
결국 퀄컴 대주주인 최민혁 실장의 주머니만 빵빵해진다는 점이다.
퀄컴의 다른 대주주들 역시 이번에 한몫 단단히 챙겼을 것이고.
골치가 아픈 제임스 러너 이사는 최문경 부회장의 태도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굳이 제임스 러너 이사를 타박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최민혁 실장과 KM 전자에 관해서 추가 조사를 해야겠어. 아, 그리고 시티폰 사업도 한번 확인을 해봐. 최민혁 실장이 관심을 기울인다고 했으니, 뭔가 있을 수도 있어.”
“…알겠습니다.”
데이비드 싱어는 솔직히 시티폰 사업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내심을 말할 수는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이 사업에 이미 손을 댔기 때문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이미 시티폰 사업권을 얻기 위한 로비를 시작했어. 이걸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어.’
* * *
샐로먼 브러더스는 세계적인 투자 은행이다. 따라서 이 회사가 국내 합작 증권 회사를 설립했을 때는 주목을 많이 받았다.
이런 회사의 한국 지사가 긴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많은 이들이 주목했다.
다만 그 조사 내용이 주로 최민혁 실장이란 것에는 순순히 수긍했다.
한국형 CDMA 서비스를 몇 년 일찍 완성한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무시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실상 샐로먼 브러더스만이 아니라 다른 대기업들도 최민혁 실장의 프로필 공부에 열을 올렸다.
그 과정에서 국세청이 조사한 최민혁 실장 프로필에는 국내 모든 대기업에서 다 관심을 뒀다.
아무리 KM 전자 기획실이 능력이 좀 떨어진다고 해도 이런 분위기를 모를 수가 없었다.
조성돈 팀장은 이 상황을 KM 그룹 장승일 실장을 통해서 들었다.
“아무래도 샐로먼 브러더스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새로 지사장이 된 인물이 제임스 러너 이사라고 했죠?”
“과거 미국에서 주로 채권을 주로 다루었고, 최근에는 미국 주식을 주로 담당한 인물입니다.”
“흠.”
최민혁은 자신의 인생 1회 차에서 보지 못한 인물이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나비효과일까?’
조성돈 팀장이 가져온 제임스 러너 이사에 대한 프로필은 꽤 상세했다. 미국 내의 제임스 러너 이사의 행적까지 다 가져온 것이다.
최민혁은 오히려 이 상세한 조사 결과가 의아했다.
“아니, 조 팀장님이 이런 고급 자료를 어떻게 얻은 겁니까?”
“강준석 팀장이 자료를 보내 왔습니다.”
“아, 강 팀장 말인가요.”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강준석 팀장이 얼마나 집요한지 잘 안다. 미국에 보내놓으니, 알아서 이리저리 건드렸을 것이다.
“샐로먼 브러더스에 대해서는 따로 조사했나 보군요.”
“아무래도 샐로먼 브러더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까요.”
“그런가요? 가만, 새로운 인물도 왔다고 하는데, 우리 부회장님은 뭐 하고 있던가요?”
“지난주에 최문경 부회장이 직접 샐로먼 브러더스 한국 지사를 찾았습니다.”
그가 내놓은 건 최문경 부회장이 샐로먼 브러더스 한국 지사를 방문한 장면을 찍은 사진이었다. 차량에서 내릴 때 장면을 잘 잡았다.
“…그 사진은 김명준 과장님이 저에게 주신 겁니다.”
최민혁은 멋쩍은 표정을 한 김명준 과장을 한 번 살핀 후에 고개를 갸웃했다.
“제임스 러너 이사가 한국에 오기가 무섭게 이곳을 찾았다는 말이군요. 혹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건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다만 뭔가요? 괜찮으니 말해보세요.”
“두 사람이 독대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KM 그룹 비서실 내에서 도는 이야기입니다. 장승일 실장님도 운 좋게 그 정보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래요?”
최민혁 실장은 정말 흥미로운 눈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가 인생 1회 차를 모른다면 도저히 이 이야기의 의미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 예상대로 일이 꼬이네. 이러면 이야기가 복잡한데, 만약 시티폰으로 타격을 입어도 미국으로 튀면 그만이라는 이야기잖아?’
그렇다면 미국으로 튀어도 휘청거릴 만큼 타격이 커야 했다.
즉, 시티폰 사업에 샐로먼 브러더스 역시 껴야 한다는 소리다.
‘으음, 이대로는 곤란해.’
* * *
최민혁은 시티폰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다. 이왕이면 최문경 부회장이 늪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야 했다. 그렇게 본다면 역시 시티폰이 제법 괜찮았다.
그는 이전과는 달리 샐로먼 브러더스가 이번 일에 반드시 낄 것으로 생각했다. 아니.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결국 그는 시티폰이 인생 1회 차에서 실패한 원인이 아닌, 왜 지역 사업자가 이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는지를 살폈다.
그 이유는 제법 간단했다.
기존에는 본격적인 PCS 시장이 오기 전에 틈새시장이 있다고 봤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 때문에 이 상황이 바뀌었다.
‘아니지, 아직 CDMA 시장이 완전히 열린 것은 아니니까.’
CDMA 시범 서비스가 성공적이라고 해도 아직은 여러 가지 문제가 존재했다.
최민혁 자신이 돕는다면 그 문제를 좀 더 빨리 처리할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럴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타이밍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IMF 일정하고도 맞추어야 해. 거기에 첫째 큰아버지와 DL 그룹도 날려 버려야 하니까.’
최민혁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시티폰 사업이 좀 더 빨리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기존에 한 연구를 토대로 다시 시티폰 서비스와 관련된 자료를 살폈다.
시티폰 서비스는 일반전화 교환망, 기지국, 무선 링크를 통해서 휴대 장치와 연결이 된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고정 장치로부터 150m라는 일정 거리를 벗어나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시티폰 서비스 기술은 그렇게 복잡한 편은 아니지만, 제약이 심하네.’
그는 다른 통신 사업에 대한 기대 때문에 시티폰 사업의 한계를 과소평가하는 사업자들의 반응에 대해서 혀를 차고 말았다.
‘원천기술은 영국의 브리티시 텔레콤이 가지고 있어. 나로서는 정말 재미없는 아이템이군. 하지만 영국 애들 입장은 다르겠지. 그리고 샐로먼 브러더스는 꽤 관심을 둘 만해.’
최민혁은 방향을 잡자 보기 싫은 시티폰 서비스에 대한 개요를 살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꽤 있었다.
브리티시 텔레콤이 원천기술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세부 항목에서 기술적인 표준이 명확하게 만들어져 있지는 않았다.
그도 이 부분을 자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스승인 이지수에게 철저하게 교육을 받긴 했다.
이지수가 보기에 몰락한 시티폰 사업에 대한 교훈은 최민혁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최민혁은 인생 1회 차에서 시티폰 관련 지식도 꽤 깊이 들여다봤다. 그 당시에는 그저 영양가 없는 기술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빡세게 교육받은 게 효과가 있구나.’
당시 그는 이지수를 겉으로는 몰아붙였지만, 그녀가 시키는 것은 다 따랐다. 그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다.
최민혁은 자신이 시티폰 관련 기술을 하나씩 메꿔 나가면서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솔직히 이번 일은 정말 하기 싫었다.
그래도 해야 했다.
영국 통신 회사가 관련돼 있으면 샐로먼 브러더스도 미끼를 물 것이라 생각했다.
최소한 이 시티폰 사업이 6개월이 아니라 1년 정도는 버텼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시티폰 사업을 활성화한 다음에 CDMA 서비스로 박살을 내버리면 타격이 엄청날 테니까.
‘그래, 해보자. 정 안 되면 시티폰과 VOIP를 섞은 기술을 내놓아도 되니까. 필요하다면 스마트폰 출시 시기를 당겨도 돼. 내가 의심하지 않을 수준이어야 해. 그래야 이놈들이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지. 이자들도 바보는 아니니까.’
* * *
임기석 부장은 최근 CDMA 서비스 론칭 이후에는 퀄컴에서 자료를 받아서 혹시 추가할 만한 원천기술이 더 있나 열심히 확인 중이었다.
그는 오랜만에 최민혁 실장의 호출을 받자 CDMA 원천기술뿐만 아니라 최근 사들인 MP3 특허를 비롯한 관련 자료를 다 챙겼다.
그런데 기획실장실에 들어갔을 때 최민혁의 반응은 예상과는 달랐다.
“…그게 다 뭡니까?”
“아, 이번에 새로 출원한 특허 항목입니다.”
최근 KM 전자는 계열사를 늘리면서 다양한 기술을 확보했는데, 그 과정에서 새끼를 친 기술이 다양하였다.
전부 다 최민혁 자신이 지시한 것이다.
정작 지시를 내린 최민혁 자신은 다 잊었다.
하지만 지시를 받은 임기석 부장의 입장은 달랐다. 그는 특허 팀을 총동원해서 지금까지 줄기차게 특허를 계속 출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