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546화 (546/1,021)

#546.

약속 장소는 샐로먼 브러더스 한국 지사장 사무실이었다.

샐로먼 브러더스는 데니스 샐로먼 이사를 태국으로 좌천시킨 이후에 이전보다 한국 지사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렸다.

그 행보 중의 하나가 역삼동 스타 타워 한 층을 통째로 임대하는 거였다.

최문경 부회장은 연락을 받기가 무섭게 이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고압적이었던 제임스 러너 이사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최문경 부회장에게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입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지금까지의 샐로먼 브러더스의 소극적인 태도에 분노하려다가 살가운 상대방 태도에 흠칫 놀랐다.

“응? 날 아는가?”

“과거 협상 자리에서 부회장님을 봤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뒤늦게야 과거 기억을 떠올렸다.

“아, 투자 자리에서 실무진으로 참석한 친구 중의 한 사람이었군.”

“제임스 러너 이사입니다.”

그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는 샐로먼 브러더스 본사에서 제법 힘을 쓰는 인사였다. 그렇다면 샐로먼 브러더스에서 딱히 자신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 제임스 러너, 하, 벌써 이사 자리를 달았나 보군.”

“이미 꽤 되었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따라온 수행원들과 권재홍 비서실장이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자리를 잠깐 비켜주게.”

“네?”

권재홍 비서실장은 의아한 눈으로 최문경 부회장을 쳐다보았다. 최문경 부회장의 가장 최측근인 자신보고 자리를 비워달라고 하다니. 그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정색한 최문경 부회장의 표정을 보자 곧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그건 제임스 러너 이사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이 자리에 동석한 데이비드 싱어 수석 매니저에게 눈짓해서 밖으로 내보냈다.

* * *

단 두 사람만 남자 분위기는 아주 달라졌다.

최문경 부회장은 데니스 샐로먼 이사를 상대하던 때와는 달리 소파에 등을 기대고, 편하게 앉았다. 그는 팔짱을 한 채 흥미로운 눈으로 제임스 러너 이사를 쳐다보았다.

“본사가 요즘 날 우습게 보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부회장님도 잘 알겠지만 최근 사내에 일이 많습니다. 미국 정부의 압박이 점점 강해진 것이 문제입니다.”

몇 년 전에 더 많은 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거짓 입찰을 제출한 것 때문에 2억 달러의 벌금을 부과받은 이후, 약간의 변화가 생겨났다.

미국 정부가 샐로먼 브러더스를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샐로먼 브러더스의 국채에 대한 시각 자체가 바뀌었다.

위험을 감수하는 투자 방식으로 전체적인 회사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제임스 러너 이사는 이런 사내 분위기 변화에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했으니까.

최문경 부회장은 혀를 찼다. 그 역시 샐로먼 브러더스 내부 분위기를 자세히는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제임스 러너 이사가 투덜거리는 것을 손으로 막았다.

더 듣고 있어 봤자 골치만 아플 뿐이었다.

제임스 러너 이사는 그제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소식 들었습니다.”

“그런가? 소문 한번 빠르군. 미국에도 내 이야기가 돌았다니.”

최문경 부회장은 똥 씹은 표정을 한 채 담배를 하나 꺼내서 베어 물었다. 그는 그제야 좀 숨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번 최민혁표 CDMA 서비스의 결과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만 같았다. 당분간은 그 일을 아주 잊어버리고 싶었다.

“아주 돌겠어.”

제임스 러너 이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그렇게 안 좋습니까? 저도 최민혁 실장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도저히 잘 믿기지 않아서 말입니다.”

“밖에서 보는 것과는 결과가 다르니까.”

“생각보다 더 심각하군요.”

“그거 알아? 내 장녀가 에플에서 500만 개 가까운 칩 생산 주문 계약을 진행 중이야. 그 덕분에 내 꼴이 우습게 되었어. 안 그래도 KM 그룹 내에서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었는데, 이번에 더 상황이 악화되었어.”

정확히는 최민혁 실장이 최영란 본부장을 본격적으로 밀어줬다. 그리고 그 대안 중의 하나로 KMP-02에 들어가는 칩 생산을 KM 산업에 맡겼다.

이미 KM 산업은 소량의 비메모리 양산 체제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거기에 최영란이 본부장이 되면서 이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일련의 영업은 모두 최민혁 실장이 중재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겉으로 평가되기로는 전부 최영란 본부장의 실적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AD 설계를 KM 산업과 합병하면서 바로 성과를 내놓았다.

결국 KM 산업 내에서도 이 일 때문에 말이 무성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기존 사업 관리는 잘했지만 새로운 사업을 일으키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설사 최영란 본부장이 기존 KM 산업의 비메모리 사업 부분을 최대한 이용했다고 해도 그 결과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걸 한번 살펴봐. 당신네 회사에서도 알아야 할 사안이니까.”

“…….”

제임스 러너 이사는 최문경 부회장이 챙겨 온 KM 산업 내의 비메모리 사업 현황을 보면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그는 에플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기에 더욱 놀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구나. 이렇게 많은 제품 판매가 정말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나?’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에플의 결정이잖아. 그걸 무시하기도 어려워. 정작 문제는 에플 내부 상황이 내 꼴을 우습게 만든다는 거야. 최소한 미국 내의 사정인데, 당신네 회사에서 도와줘야 하는 것 아냐?!”

제임스 러너 이사도 어깨를 으쓱했다.

“부회장님이 이렇게 궁지에 몰리다니 잘 믿기지 않습니다.”

“내 능력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군. 솔직히 해외 자금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 당장 데니스 샐로먼 그 친구도 모르잖아. 그쪽에서도 날 아는 친구는 손으로 꼽아.”

“하긴.”

제임스 러너 이사 역시 한국 지사장 자리를 흔쾌히 수락한 것은 다름 아닌 최문경 부회장의 행보가 궁금해서였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이 왜 굳이 KM 그룹에 집착하는지 의아했다.

“이런 식이라면 굳이 KM에 그룹에 매달릴 필요 없이 그냥 해외 자금을 이용해서 새로운 사업을 일궈도 되지 않습니까?”

최문경 부회장은 쓰게 웃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KM 그룹은 내 뿌리이기도 하니까. 난 솔직히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어. 그뿐이야.”

“…부회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이보다 샐로먼 브러더스에서 그렇게 잘나가던 제임스 러너 이사가 왜 굳이 한국에 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괜한 이야기는 집어치우지. 그런데 이상하군. 자네가 왜 굳이 샐로먼 브러더스 한국 지사장 자리를 받아들인 건가?”

제임스 러너 이사는 최근 미국 내의 퀄컴, 에플, ARN 주가 변화에 따른 이야기를 천천히 시작했다. 덕분에 손실을 꽤 입었다는 것도 피력했다.

“솔직히 좀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전 보수적인 관점에서 투자 계획을 잡았는데, 그럼에도 막대한 손실을 보고 말았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으로서는 한국 내에서 벌어진 일들이라서 모를 수가 없었다. 특히 CDMA 시범도시 서비스 결과는 실로 황당한 일이었다.

“…그것도 민혁이 그놈 때문이군.”

“네, CDMA 시범도시 서비스 이후로 사태가 격화되었습니다.”

이미 충분한 보고를 들은 제임스 러너 이사도 아직 상황을 실감하지 못했다. 크리스 스페이더 부사장의 충고처럼 미국에 계속 있었다면 지금의 태도가 영영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가 그렇게 충고를 했는데, 샐로먼 브러더스 본사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도 한편으로는 답답했다. 말로는 리스크가 큰 사업에 투자한다고 하는데, 정작 잘 들여다보면 사실이 아니었다.

“앞으로 어쩔 생각인가?”

“일단 최민혁 실장을 조사해 볼 생각입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텐데?”

“최민혁 실장에 관한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습니다. 제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만.”

여전히 최민혁을 무시하는 태도.

최문경 부회장은 피식 웃었다. 그는 지금까지 최민혁 실장에게 그렇게 당한 덕분에 조카 최민혁 실장의 진면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한다고 해서 제임스 러너 이사가 믿을 것 같지도 않았다.

지금도 봐라.

그렇게 최민혁 실장에 대해 경고를 했는데, 결국 샐로먼 브러더스는 또 큰 손실을 봤다.

그래도 한 가지는 위안이었다.

“이봐, 제임스 이사.”

“네? 말씀하시죠.”

“내가 자네 능력을 얕잡아 봐서 하는 소리가 아냐. 내 조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민혁이 그놈을 얕잡아 볼 생각은 마.”

“…압니다.”

“아니, 자네는 몰라. 샐로먼 브러더스 본사에 있을 때 30~40억 달러를 굴렸으니, 한국이란 나라가 우습게 보일 거야. 그러니 내 조카 최민혁 같은 녀석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거야.”

“그건 아닙니다만…….”

“아니, 자네는 모른다니까. 그래도 일단 조사를 한다고 하니, 최민혁 그놈을 가능한 철저하게 조사해. 겉으로 드러난 것도 중요하지만, 입소문을 통해서 도는 것도 살펴봐. 아, 이왕이면, 국세청에서 최근 민혁이 그놈을 내사했다고 하니, 그 자료부터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제임스 러너 이사는 생뚱맞은 표정으로 최문경 부회장을 쳐다보았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이 왜 이렇게 최민혁 실장을 두려워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뭔가 다른 것이 더 있다는 말인가?’

물론 그런 그에게 최문경 부회장은 한마디를 더 남겼다.

“그리고 CDMA 사업부터 확인하겠지만, 시티폰 사업도 빼놓지 말고 한번 살펴봐. 어쩌면 자네 쪽에서 관심을 둘 만한 사업이니까. 국내만이 아니라 동남아 쪽을 고려하면 무시할 만한 일은 아니잖아.”

“…확인해 보겠습니다.”

* * *

샐로먼 브러더스는 국채와 같은 항목에 주로 투자를 하는데, 위험자산에 대한 투자가 제법 크다.

따라서 이 회사는 전 세계 국가 고위층과도 꾸준히 소통한다. 투자 규모가 국가적인 규모로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세청이 최근 조사한 최민혁 실장의 내사 결과 자료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확히는 최민혁 실장에 반감을 품은 임광준 국세청 차장이 완벽한 최민혁 실장 자산 이력을 다 넘긴 것이었다.

제임스 러너 이사도 이 자료를 보고 나서는 꽤 큰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이, 이게 정말이야?”

데이비드 수석 매니저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능하면 이런 정보는 늦게 보기를 원했다.

“…사실입니다.”

“하, 하지만 말이 안 되잖아. 에플에 투자한 금액이 무려 15억 달러가 넘었어. 그런데 에플 주가는 벌써 5달러를 행보 중이잖아.”

정확히는 에플 주가는 최근 6달러를 돌파했다가 차익 매몰에 밀려서 다시 5달러로 곤두박질쳤다. 설사 이 기준으로 봐도 무려 5배 이상의 수익을 올린 셈이다.

무려 75억 달러였다.

이 금액도 에플 주가를 기준으로 잡은 금액이다. 아마 KM 전자를 비롯한 다른 회사 자산을 다 합치면 족히 몇 배가 된다.

아무리 샐로먼 브러더스가 세계적인 투자 회사라고 해도 가볍게 볼 금액은 아니었다.

“…이 자산 내역 조사는 얼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에플 주가가 폭등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주였습니다.”

즉, 이 최민혁 내사 내역이 나온 지는 얼마 되지 않은 셈이다.

샐로먼 브러더스 본사도 이제 막 정보를 알았을 테니 말이다.

따끈따끈한 최민혁 실장의 정보에 제임스 러너 이사는 크게 당황했다. 지금은 최민혁 실장과 대립하기보다는 오히려 VVIP 고객으로 최민혁 실장을 대우해야 할 시기였다.

그는 한참이나 최민혁 실장 내사 자료뿐만 아니라 CDMA 관련 보고서를 꼼꼼하게 살폈다. 이걸 보고 있자니 퀄컴도 더 이상 무시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특히 ETRI 내에서 진행되는 CDMA의 완성도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 자료 역시 정보 통신부 고위직을 통해서 얻은 자료였다.

즉, 절대로 과장되거나 허황된 내용이 아니란 뜻이다.

당장 이번 사업에 끼어든 한국 대기업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그들은 당장 투자 금액을 늘리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샐로먼 브러더스가 지금 들어가기에는 타이밍이 애매했다.

“…이거 진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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