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
“강 국장님.”
“…….”
초췌한 강상혁 조사국장은 입을 쿡 다문 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대신한 변호사가 차가운 눈빛을 번쩍였다. 정확히는 꼰대질을 시작했다.
“박 부장검사, 자네도 지금은 한창 무서운 것이 보이지 않을 거야. 하지만 조직 일이 그렇게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아.”
박두영 부장검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 직위를 생각하면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입니까?”
“이번 법무부 인사 결과를 본다면 알게 되겠지만 조심하는 것이 좋아.”
곧이어서 다가올 법무부 인사.
그 내부 정보를 담당 변호사는 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럴 수가 있었다.
상대 변호사는 전관 변호사로 꽤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다만 박두영 부장검사는 자신을 좌천시킬 것이라는 협박에도 어깨만 으쓱했다. 다만 드러내지 않았다 뿐이지 내적으로는 꽤 당혹스러웠다.
“…전 법대로 할 뿐입니다.”
“알아. 하지만 아직 강 국장님은 판결을 받은 죄인이 아냐. 무죄추정의 원칙, 아주 기본적인 거야. 그런 식으로 깔보는 말투는 자제하게.”
솔직히 자신을 선배라고 소개한 이 변호사는 박두영 부장검사도 잘 모르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그를 가볍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강문철 변호사라고 소개한 이는 놀랍게도 조정수 중앙지검장보다 사법연수원 1년 선배였다. 그것도 부장판사 출신으로 말이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이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해야 합니다.”
“지랄하네. 야, 박 부장, 너 정말 세상 모르는구나. 이번 일은 이 정도에서 끝내. 쓸데없이 일을 키울 생각은 하지 마!”
박두영 부장검사는 일방적인 강문철 변호사의 압력에 쉽게 대응할 수가 없었다. 그가 하는 말은 법무부가 어쩌고, 사법부가 어쩌고 하는 말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재판 과정에서 검찰이 제시한 증거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피력했다.
그로서도 이렇게 노골적인 압박은 처음이었다.
‘젠장맞을.’
* * *
조정수 중앙지검장은 박두영 부장검사가 푸념을 늘어놓는 것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아니, 그러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내가 오죽하면 영장을 직접 발부받으려고 했겠어. 그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설마 법무부와 사법부가 이 문제를 걸고넘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정확히는 재판 과정에서도 담당 판사가 강문철 변호사 편을 들어줄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건 물론 사실이다.
강문철 변호사는 이번 재판 과정에서 자신과는 별개로 전관 변호사 세 명을 더 투입할 예정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강상혁 조사국장의 구체적인 범죄 행위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떠들어도 증거는 속일 수가 없어. 그러니 재판 과정에서 인내를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 더 중요해.”
“꼬투리를 잡히지 말라는 말입니까?”
“강 선배의 실력은 대단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송을 질질 끌려고 할 거야. 필요하다면 증거가 불법적인 면을 강조할 거야. 만일 그렇게 된다면 기껏 어렵게 얻은 증거 효력이 줄어들 거고.”
그 틈이 드러나면 담당 판사도 여유를 가질 수가 있게 된다. 좀 무리수를 두는 만큼 언론에서 뭐라 떠들기는 하겠지만, 그뿐이다.
“설마 무죄판결이 나온다는 말씀입니까?”
조정수 중앙지검장은 혀를 찼다.
“그렇다고 없는 죄가 사라지지는 않아. 뭐 형량이 깎일 수는 있지만.”
“이대로 두고만 보실 겁니까? 최민혁 실장은 이들 배후까지 추적하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배후? 당연히 있겠지. 문철 선배가 그 난리를 치는 것을 보면 당연한 거야.”
“가, 강문철 변호사를 아십니까?”
“어, 말했잖아. 사법연수원 1년 선배라고, 자주 연락하고 지낸 선배이니까. 한때는 정말 잘나갔지. 최연소로 검찰총장이 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으니까.”
박두영 부장검사도 강문철 변호사에게 직접 들은 내용이라서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정치 노선을 잘못 탔어. 결국 정치 보복을 당했고, 한직으로 물러났으니까. 야망이 많은 그 선배는 결국 옷을 버렸어.”
검찰 라인 윗선으로 올라가면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자기 계열이 아니면 아예 승진을 시켜주지 않으니 말이다.
강문철 변호사는 한때 정말 잘나갔지만, 신뢰를 잃어서 그만둔 경우다.
조정수 중앙지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나도 그럴 수 있어.”
박두영 부장검사도 잔뜩 긴장했다.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국세청의 임광준 차장이 직접 나섰다는 이야기가 있어. 아무래도 강상혁 조사국장 배후는 그 양반일 확률이 높아. 아니, 더 윗선일 수도 있어.”
암묵적인 국세청장 이야기까지 나오자 박두영 부장검사는 안색을 굳히고 말았다.
“네? 하면 이대로 사건을 적당한 선에서 덮자는 말입니까?”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조정수 중앙지검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검찰총장을 만나서 한바탕 잔소리를 들었다는 것까지는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말하지 못했다.
지금의 검찰총장이 자신을 중앙지검장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는 부정적인 편이었다.
사건을 더 키우기를 원치 않은 것이다.
‘뭐, 윗선의 정치 역학 문제까지 신경을 쓸 필요는 없지만, 어떻게 보면 적당한 선에서 끊으란 소리겠지.’
고민을 거듭한 그는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넌지시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여기서 끝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아니면 최민혁 실장에게 도움을 청해봐. 서안 유통과 같은 건이 또 있다면 방법이 없지는 않으니까.”
“…알겠습니다.”
* * *
최민혁 실장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고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부탁한 일이 뜻밖에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듣고는 혀를 찼다.
‘역시 아직 한계가 있구나.’
또 다른 서안 유통 건?
자신이 무슨 신도 아닌데, 미래 전체를 다 알 수는 없었다.
이보다는 최민혁 역시 자신이 다소 성급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조정수 중앙지검장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검찰총장이 되기 전에 밟아야 할 코스를 제대로 가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원하는 방패 역할을 제대로 할 테니 말이다.
물론 그가 조정수 중앙지검장을 강제로 밀어줄 수는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바로 반발이다.
권력 실세가 최민혁 실장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면, 힘을 합쳐서 반격할 것이다.
승급하게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아직은 최민혁 자신도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 이제 고작 두 명이었으니까.
‘역시 시기상조일까?’
더욱이 그를 걱정하는 이는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최용욱 회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이례적으로 KM 전자 기획 실장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는 한동안 최민혁 실장의 맞은편에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하고 싶은 말은 정말 많았다.
그런데 막상 최민혁 실장이 한 일을 생각해 보면 욕하기도 그랬다.
과감한 저돌성.
생각도 못 한 크로스 카운트.
그 한 방에 그 대단한 국세청도 녹아웃 되어서 공황에 빠져 버렸다.
최용욱 회장도 선제적인 최민혁의 공격에는 내심 감탄하고 말았다.
자신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그러지 못하니까.
“…앞으로 어쩔 생각이냐?”
“CT-2 말입니까?”
“…그 이야기는 복잡하니, 나중에 이야기하자꾸나. 내 말은 강상혁 조사국장 배후까지 조사하려고 한다면서?”
“배후라기보다는 내사라는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찾는 겁니다.”
최용욱 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말이 그 말이잖아. 그리고 네가 모를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그자들도 괜히 그러는 것이 아니야. 네가 가진 재산. 아무래도 그것이 문제야. 당장 KM 전자 주식 가치만 해도 그래. 많아도 너무 많아. 오성 그룹 안 회장처럼 차분하게 재산을 불려갔다면 인정이라도 하지. 네 경우는 너무 달라. 너무 단기간에 천문학적인 재산을 만들었어. 여론조사 결과로는 이 부분에 부정적인 사람이 적지 않아. 그들 중에는 널 시기하고, 질투하는 인간들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 없다.”
최민혁은 쓰게 웃고 말았다. 질투심에 사로잡혀서 최민혁 실장의 자산 형성 과정을 들여다보자는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그 정점은 역시 CDMA 서비스에 대한 정보 통신부의 태도 변화 이후다.
CDMA 서비스가 주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최민혁의 재산 규모는 일주일에 서너 번 언론에서 언급됐다. 심지어 가짜 뉴스를 뿌리는 조직도 생겨났다.
CDMA 통신 서비스 특허료의 반수 이상을 쥐고 있는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기 때문이다.
최민혁도 최용욱 회장의 충고를 무시하지 않았다. 확실히 아직은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 지금은 차분히 아군을 늘릴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겨우 국세청에 스파이를 침투시켰다. 그러니 다른 정부기관에도 손을 쓸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그가 원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다. 최문경 부회장을 끌어내리는 일이다. 지금은 덫을 까는 작업에 집중해야 했다.
“설마 저보고 국세청에 고개를 숙이란 말입니까?”
“그럴 수는 없지.”
“하면 할아버지가 중재를 해주실 겁니까?”
“그 정도는 내가 해주마.”
“흠.”
최민혁은 잠깐 침묵했다. 솔직히 자존심이 상했다. 확 들이박아 버리고 싶지만, 최용욱 회장을 지금 당장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KM 그룹 지분만 얻는다면 이럴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그게 참 쉽지 않단 말이야. 이것도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니.’
“…알겠습니다.”
그리고 최용욱 회장은 손자 최민혁의 대응에 혀를 찼다.
“그리고 영란 일도 그렇고, 일전에 약속한 KM 산업 지분 1%는 다음 주 중으로 바로 처리해 주마.”
“2%가 좋은데…….”
“나도 그 정도 생각했다만 셋째 동영이 입장도 있어. 더욱이 너도 돈이 많지 않으냐.”
“KM 산업 지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정 답답하면 공개적으로 매수해.”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시장에서 돌아다니는 KM 산업 주식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도 없었다. KM 산업 지분은 IMF 이후 헐값이 되면 그때 매수해도 되니까.
하지만 최용욱 회장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손자이지만 도대체 어디로 튈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 싸움도 격화된다면 둘 다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자가 타격을 입는 만큼 정부 역시 치명타를 받을 수도 있었다.
‘이 녀석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오죽하면 그자들이 나에게 중재를 요청했을까.’
최용욱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문득 한 가지를 질문했다.
“그런데 서안 유통 조중국 사장 일은 어떻게 안 거냐?”
“우리 회사 보안 팀 능력이 제법 대단합니다.”
“글쎄다. 내가 알기로 국세청 감사 팀에서도 그 사실을 몰랐어. 그런데 무슨 재주로 KM 전자 보안 팀이 그 정보를 알아?”
그랬다.
국세청 윗선이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강상혁 조사국장의 일이다.
강상혁 조사국장은 생각보다 철저하게 강은택 이사를 이용해서 돈을 빼돌렸다. 이 일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최민혁이 도대체 이 정보를 어떻게 얻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강상혁 조사국장의 일이 다른 이들에게도 적용된다면 생각보다 치명적일 수 있으니까.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감입니다.”
“코, 콜록.”
정작 최민혁의 말에 반응한 것은 김명준 과장이었다. 그는 최용욱 회장의 시선을 받자 크게 당황해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최용욱 회장은 잠깐 최민혁의 두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하지만 최민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쯧, 네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이제 아는 사람은 다 알게 되었다. 하지만 조심하는 것이 좋아. 자칫하면 그들이 힘을 뭉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
최민혁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최용욱 회장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네가 원하는 것은 국세청을 다 날려 버리는 거냐, 아니면 이번 일에 대한 보복이냐. 만약 보복이 우선이라면 차라리 한 걸음 물러나서 지켜보는 것이 훨씬 낫다.”
“왜 그렇습니까?”
“강상혁 조사국장 라인이 다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국세청 내부는 겉보기와는 달리 그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대립 중이다. 청와대에서도 당황하고 있어. 이런 일은 예상을 못 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네가 달려들면, 그들도 위기감을 느낄 거다. 그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겠냐?”
“지금은 어렵습니다만…….”
최용욱 회장은 여전히 지지 않는 손자 최민혁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기반만 만든다면 청와대도 날려 버릴 생각을 하는 손자 모습 때문이다.
“차라리 세력을 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