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
최용욱 회장은 임광준 차장을 계속 압박했다.
“강상혁 조사국장 뇌물 사건에 대한 미국 정부의 반응은 너무 기민했어. 한국 정부가 부탁해도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이번 건을 보고 민혁이 녀석의 능력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겠지? 그래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닌가?”
“…….”
자존심이 상한 임광준 차장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최용욱 회장은 내심, 이 상황을 즐겼다. 솔직히 그 자신도 임광준 차장을 상대로 이러지는 못했다. 이게 다 잘난 손자 때문이다.
아니, 솔직히 통쾌했다. 간혹 국세청 고위직을 만나는 술자리가 있지만 이렇게 대하지는 못한다. 어느 정도 눈치를 봐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자신이 갑이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가 있었다.
그가 그렇다고 이 일을 계속 키울 수는 없었다. 적당한 선에서 정리해야 했다. 임광준 차장 역시 본인이 원해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는 슬쩍 임광준 차장에게 술을 권했다.
임광준 차장도 내키지 않았지만, 잔을 받고, 다시 잔을 권했다.
두 사람이 서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자 그제야 긴장 국면이 좀 풀렸다.
최용욱 회장은 이 사태를 적당하게 마무리를 해야 했고, 임관중 차장은 최민혁 실장에게 어떤 대응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임광준 차장은 뒤늦게야 최용욱 회장이 이런 사고를 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최용욱 회장이라면 적당히 뇌물을 줘서 문제를 조용히 해결할 타입이니까.
결국 이번 일은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최민혁 실장이 독단으로 저지른 일이다.
이제 대학교 1학년 나이라면 충분히 욱해서 사고를 칠 만했다.
문제는 그놈이 국세청도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미친놈이라는 거다.
“…어쩌자는 겁니까?”
최용욱 회장은 그제야 꼰대다운 기질을 슬쩍 보여주었다.
“이보게, 임 차장, 이번 일은 자네들 국세청에서 크게 실수한 거야. 그걸 인정해야 해. 그래야 대화하기가 편하니까.”
“지금 끝장을 보자는 겁니까?!”
“계속 도돌이표 말을 하는군. 자네 측 잘못을 인정해야 그다음 이야기로 갈 수 있어!”
임광준 차장은 내심 이를 갈았지만, 최용욱 회장의 압박을 무시하지 못했다. 어차피 칼자루는 최용욱 회장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로서는 울화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제기랄, 그놈의 내사 한 번 했다고 이렇게까지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다니.’
하지만 불행히도 최민혁 실장의 공격은 무자비하고, 잔혹해서 은근히 두려움마저 느낀 그는 결국 한 걸음 물러났다.
“그렇다고 합시다.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내가 듣기로 강상혁 조사국장 라인이 다 날아간 후에 국세청 내부가 정신이 없다고 들었어.”
“…….”
‘역시 알고 있었구나.’
임광준 차장은 내심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실상 그 자신이 이 자리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공석이 된 조사국장 자리가 문제였다.
각각 다른 파벌이 서로 이 자리에 자기 사람을 앉히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의 이 상황은 최민혁 실장의 스트레이트 때문에 만들어진 거라 정상적이지 못했다.
그러니 서로 조사국장을 차지하기 위해서 극한 대립을 하기 시작했다.
정작 일을 이렇게 만든 이는 최민혁 실장인데, 오히려 최민혁 실장에게 책임을 돌리는 이들은 없었다.
괜히 최민혁 실장에게 보복당할 것을 염려한 것이었다.
최용욱 회장은 이미 손자 최민혁과는 달리 자기 인맥을 총동원해서 국세청의 내부 사정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파악하고 있었다.
“이 정도에서 끝내자고. 그게 서로에게 좋지 않겠나?”
“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내 말은, 자네들이 먼저 빌미를 제공해서 이 일이 생겼잖아. 하지만 당한 민혁이 그놈 입장은 달라. 그 녀석은 자네들을 믿지 못할 거야. 그러니 이번 기회에 자신에게 칼을 들이민 세력을 뿌리까지 박멸하려고 할 거야.”
임광준 차장은 이를 악물었다. 그 역시 그게 불안해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과는 대화해 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서 최용욱 회장을 찾은 것이니까.
“…그래서 어떻게 이 상황을 봉합하자는 말입니까?”
“민혁이 그 녀석은 내가 알아서 중재하지. 대신 자네들도 내사 같은 문제를 만들지 마. 혹시라도 검찰 쪽과 힘을 합쳐서 수작을 부릴 생각도 하지 마.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내가 그냥 있지 않을 테니까!”
임광준 차장은 생각 같아서는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국세청 내부에서 조사국장을 둘러싼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최민혁이 이 사태를 최대한 이용해서 또다시 국세청을 공격한다면 옷을 벗어야 하는 인물이 더 늘어날 것이다.
게다가 자신 역시 그 공격을 피하기 어려웠다.
사실 최민혁 실장의 반격은 그들에게도 충격적이었다.
불과 며칠 남짓한 사이에 강상혁 조사국장을 탈탈 털고 언론을 이용해서 대중 앞에서 생매장시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어, 저게 무슨 일이야?’라는 말이 나올 시점에 이미 검찰은 강상혁 조사국장 손에 쇠고랑을 채워서 구속해 버린 것이다.
그 신속하면서도 무자비한 보복이 국세청도, 자신도 최민혁 실장을 은근히 두려워하는 이유였다.
“…정말 최민혁 실장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걱정하지 말게 이 친구야. 민혁이 그놈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내 손자란 사실은 변치 않으니까.”
그는 넥타이를 풀어헤치면서 술을 연거푸 마신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휴우, 알겠습니다.”
임광준 차장은 내심 울화가 복받쳐서 폭발할 것 같았지만 자중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최용욱 회장과 싸워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일단 국세청 내부 갈등을 수습해야 했다.
게다가 실상 한 가지 더 큰 문제가 있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강상혁 조사국장이 미국 내에 자산을 숨긴 것을 어떻게 안 겁니까? 제가 알기로 FBI도 이 정보를 몰랐습니다.”
“그게 내 손자의 진짜 능력일세. 그러니 자네들도 자중하는 것이 좋아. 민혁이 그놈이 마음먹으면 국세청은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릴 정도의 정보가 차고도 넘치니까.”
허풍이었다. 그런데 이게 단순한 협박은 아니었다. 강상혁 조사국장의 예가 있기 때문이다. 서안 유통 건은 국세청 감사실에서도 뒤늦게 조사하고서야 알았다. 그런데 최민혁은 도대체 이런 정보를 어떻게 얻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임광준 차장은 도저히 최용욱 회장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한 일 때문에 또 완전히 그러지도 못했다.
다만 그는 이번 일로 최민혁 실장의 정보 능력이 국정원 못지않다는 것을 알았다.
뜨거운 맛을 당하고서야 최민혁 실장이 무서운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진짜 가볍게 볼 친구는 아니야.’
* * *
최민혁은 먹음직한 미끼를 던져놓고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는 그 과정에서 나온 공정거래위원회의 반응도 즐겼다.
이번 계열사 간의 내부 거래 실태에서 처음으로 KM 그룹이 빠졌기 때문이다.
여태껏 자기 계열 기업과의 부당 거래 의혹 행위에 KM 그룹이 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특이한 케이스였다.
“…이거 정말입니까?”
조성돈 팀장 역시 당황했다.
“이번에 KM 건설 쪽과의 거래 때문에 말이 나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일단 상황을 알아보는 중입니다.”
KM 전자와 KM 건설 간의 거래 항목은 딱 하나뿐이다.
바로 콜린스였다.
추가 항목이 있다면 콜린스와 연결되는 오디오 시스템이다.
이 토탈 패키지 상품을 다 합치면 족히 천오백만 원이 넘어갔다.
그럼에도 고객 중에는 이 새로운 상품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계열사 밀어주기로 보일 수 있었다.
“뜻밖이군요.”
“콜린스의 화질 때문이라는 소리가 있습니다.”
콜린스의 독특한 화질은 이미 소니를 뛰어넘었다는 평가가 파다했다.
그렇다 보니 그 화려한 화질에 어울리는 음향 시스템을 찾는 것은 당연하다.
문형섭 부사장은 이런 고객 수요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기존 오디오 모델의 개량판으로 콜린스 오디오 시스템을 고안했다.
이 시스템은 기존 시스템과 비교하여 음향 차이가 향상되기는 했지만 그렇게 차이가 크지는 않았다.
다만 디자인 변화는 상전벽해였다.
콜린스 디자인을 슬쩍 차용한 덕분에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하다.
결국 콜린스는 불티나게 팔렸다.
거기다 KM 건설 덕분에 인지도를 얻자 다른 건설 업체에도 공급되었다.
공정위도 딱 KM 건설의 이 부분만을 골라서 차별적 취급이나 거래 거절 행위로 몰아갈 수는 없었다.
정확히는 국세청 압수수색의 여파가 꽤 크게 작용했다.
공정위는 강상혁 조사국장 사태를 보면서 지레 겁을 먹고, 문제의 소지가 있어도 그냥 넘어간 것이다.
이번 점검 업체 중에는 오성 계열사, HY 전자, LC 전자를 비롯한 어지간한 대기업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최민혁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새삼 권력 맛이 달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번 밟아주니, 확실히 효과가 있군요.”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자꾸 이런 식으로 나가면 공무원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아니. 제 생각은 달라요.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으라고 이럴 때일수록 박차를 가하는 것이 중요해요. 다만 그 전에 우리 첫째 큰아버지는 어때요? CT-2 사업에 관심을 두던가요?”
“아무래도 KM 그룹 분위기를 봐서는 그런 듯 보입니다.”
최민혁 실장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하긴 그 수정 보고서 안에 들어간 기술 일부는 꽤 매력적이죠. 설사 장승일 실장님조차 그걸 조작했다고 믿지는 못할 겁니다.”
“실상 그 문제 때문에 장승일 실장님도 최문경 부회장에게 불려 가서 또 한바탕한 것 같습니다.”
“아니, 왜요?”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인지라 의심하는 눈치입니다. 특히 이 사업이 잘못되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게 마땅치 않습니다.”
“아니, 우리 첫째 큰아버지는 그 계획안을 보고도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는 겁니까?”
“…네.”
“하, 역시 인물은 인물이네.”
실제로 장승일 실장은 공식적으로 최문경 부회장에게 CT-2에 대해서 보고하지 않았다.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서 최문경 부회장이 정보를 획득한 것이다.
장승일 실장은 이 문제를 가지고 계속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가 아는 상식으로는 최민혁 실장의 행보가 너무 이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최문경 부회장도 더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결국 장승일 실장을 직접 건드려서 허실을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최민혁은 입맛을 다셨다.
“역시 너무 성급했을까요?”
조성돈 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불협화음이 있지만 쉽게 포기한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그건 장 실장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실장님을 의식하는 눈치입니다.”
최민혁은 혀를 찼다. 그는 여기서 더 밀어붙일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 CT-2에 대해서는 일단 지켜봅시다. 우리 첫째 큰아버지 탐욕과 집착을 감안하면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아, 공정위는 하는 행동이 그럴듯하지만, 국세청 애들은 어떻게 할지 고민이에요.”
“네? 어쩌시려고요? 서안 유통과 같은 사태가 또 있습니까?”
“아뇨.”
최민혁은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인생 1회 차 기억을 되짚어 봐도 아직은 떠오르는 지식이 없었다. 어느 정도 연결 고리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일단 한번 밀어볼 생각입니다. 검찰 쪽에서 강상혁 조사국장의 배후를 조사할 테니까. 그러니 잘 지켜보세요. 필요하다면 지속적으로 압박도 해보시고.”
“…알겠습니다.”
* * *
국세청 강상혁 조사국장 사태는 실상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국세청 고위직이 중견 기업을 상대로 뇌물을 받아먹는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오고는 했지만 이렇게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언론과 검찰 수사를 통해서 대대적으로 말이다.
이 일 때문에 국세청의 패악질에 당한 많은 이들이 국세청을 상대로 맹비난했다.
다만 박두영 부장검사는 국세청의 압력 때문에 강상혁 조사국장을 마음대로 다루지 못했다.
그는 신문 과정에서도 강상혁 조사국장을 꽤 배려했다.
하지만 막상 최민혁 실장의 연락을 받자 마냥 소극적인 태도만 보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