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536화 (536/1,021)

#536.

권재홍 비서실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데이터 송수신 기능 표준 규격이 모두 정립된 것은 아니잖아?”

“네. 그건 사실입니다. 캐나다는 기존 CT-2 서비스에 자신만의 표준안을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프랑스를 비롯한 몇몇 유럽 국가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 자신만의 독특한 표준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면 최 실장 이놈이 독자적인 CT-2 원천기술을 고안했다는 소리잖아?”

“그건…….”

물론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최민혁이 손을 댄 부분은 일부에 불과했고, 딱 그 부분만큼은 CT-2 취약점을 극복했다. 따라서 민상수 부장은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그가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KM 전자는 CT-2와 관련된 원천기술까지 보유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과연 그럴까 하면 그건 또 모르는 일이다.

지금까지 최민혁 실장이 뒤통수 친 경우는 꽤 많았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아니라고 했다가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자신이 전부 책임져야 하는데, 자칫하면 회사에서 아웃될 상황이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식은땀을 흘리는 민상수 부장을 보면서 최문경 부회장에게 말했다.

“어떻게 할까요?”

최문경 부회장도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까지 최민혁 실장에게 병신같이 당해왔다. 이대로 또 지켜보다가 뒤통수를 맞을 수는 없었다.

“최대한 정보를 모아. 아니, 이 CT-2 보고안도 다시 철저하게 재검토를 해봐. 설마 지금까지 그렇게 당하고도 또 당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러니 이번에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매달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사전에 KM 전자 기획실 직원 쪽을 파봐. 그쪽 분위기를 알아야 하니까.”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 * *

CT-2는 비용 문제에 있어서 셀룰러 서비스보다는 저렴했다.

따라서 이런 강점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만약 보편적인 서비스가 된다면 그 규모 자체가 커져서 수익성이 좋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비용 측면에서의 이점은 공공 서비스라는 관점에서도 나쁘지 않다.

즉, 이게 한국 통신이 굳이 CT-2 서비스에 매달리는 이유고, 한국 대기업이 이 서비스를 포기하지 않는 원인이기도 했다.

특히 음성 서비스와 데이터 서비스 간의 결합은 다른 이동통신 서비스와는 차별화되는 요소다.

따라서 이런 강점을 살릴 수 있는 기능이 들어간 기획안은 기존에 기획 팀이 만든 것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배종대 과장조차 최민혁 실장의 수정안을 보면서 탄식을 금치 못했다.

“우리 실장님은 정말 능력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이정원 과장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같은 보고서인지 의심스럽네.”

나름 초호화 요트 안에서 의욕을 발휘해서 만든 기획안인데 그걸 몇 단계 더 발전시킨 모델에 기획 팀은 감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또 다른 부분을 걱정했다.

이 수정 기획안이 적용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당장 산적한 문제도 많은데, 여기에 CT-2까지 합치다니.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부정적이지는 않았다.

그들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정영일 사원도 겉으로는 팀 분위기에 수긍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이번 일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고속 승진을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스야!’

* * *

정영일 사원은 흥분한 기획 팀의 분위기 속에서 슬쩍 빠진 후에 얼마 전부터 긴밀한 소통을 해오던 민상수 부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민상수 부장이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난 장소는 도시 외곽에 있는 고깃집이었다.

잠깐 술잔이 오고 간 후에 정영일 사원은 CT-2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을 가감 없이 말했다.

“조성돈 팀장님도 이번 CT-2 사업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추가 수정안에 몇 가지를 더 보강해서 임원 회의에 올릴 생각입니다.”

“오영근 사장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가는 거야?”

“아무래도 신사업이니까요. 어차피 KM 전자 내에 쌓인 현금이면, 이 CT-2 사업을 넉넉하게 진행할 수 있습니다.”

“하긴.”

민상수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기술적인 검토는 이미 했기에 이보다는 기획 팀이 이 새로운 사업을 대하는 자세를 물었다.

정영일 사원은 술이 좀 취해서인지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다.

“당장 무리수가 따르기는 하지만 이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분위기입니다. 기획 팀 분위기 때문에 최 실장님도 적극 검토 중입니다.”

“다른 문제는 없어? 왜, 그냥 검토만 하고 끝낼 수도 있잖아?”

“이미 임기석 부장 팀과 미팅을 진행한 사안입니다. 아마 따로 특허 출원이 진행되는 것으로 압니다.”

“혹시 그 특허가 뭔지 알 수가 없을까?”

“그건 좀 무리입니다.”

KM 전자는 내부적으로 계속 조직 개편을 진행했는데, 그 과정에 생긴 독특한 특징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팀별로 다 분리가 되었다는 점이다.

각 팀은 독자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팀장이 아니고서는 다른 팀 내부 사정을 알기 어려웠다. 특히 보안이 철저한 특허는 더 심했다.

민상수 부장은 입맛을 다셨다.

“하면 이번 CT-2 사업은 적극 진행한다는 소리 같은데, 일전에 최민혁 실장이 통신 서비스 사업에는 끼어들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건 어떻게 대응할 생각이야?”

“그건 KM 전자가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KM 그룹을 통해서 다른 이동통신 계열사를 하나 만들어서 진행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

눈 가리고 아웅 하기 전략에 민상수 부장은 피식 웃고 말았다.

“으음, 고맙네.”

“민 부장님, 이번에는 제대로 챙겨주는 것 맞습니까?”

“아, 걱정하지 마. 다만 자네 역할이 있어서 당장 그 안에서 빼낼 수는 없어.”

“알겠습니다.”

정영일 사원은 꽤 만족했다. 하지만 그가 굳이 요즘 최고의 주목을 받는 KM 전자의 임직원인데도 KM 그룹을 동경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경쟁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특히 성과 면에서 좋지가 않았다.

인사 팀장이 주기적으로 자신을 불러 이야기를 할 정도이니까.

정영일 처지에서는 자구책을 찾아야 했다.

‘KM 그룹 내에서 과장 자리를 단다면 그다음은 나도 잘할 수가 있어!’

민상수 부장은 정영일 사원의 속내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무리 잘나가는 기업의 직원이라고 해도 개인이 다 잘나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승진에서 밀릴 수가 있지. 이 친구를 잘만 활용한다면 괜찮을 것 같아.’

* * *

KM 그룹은 전략 기획실과 비서실을 총동원해서 CT-2와 관련된 사업성 문제를 검토했고, 지금도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안을 조사했다.

사실 CDMA, TDMA 쪽은 KM 그룹에 부담이 된다.

하지만 CT-2는 오히려 KM 그룹의 덩치와 잘 맞아 들어간다.

실제로 정부도 KM 그룹 덩치 수준의 중견 기업에 우선권을 줬다.

다만 CDMA 서비스 일정이 빨라지면서 이 상황도 혼돈으로 치닫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은 KM 그룹에게 괜찮은 기회임은 틀림없다.

겉으로 봐서는 말이다.

그런데 특기해야 할 건 KM 전자 기획실 직원이 유럽 쪽의 CT-2 원천기술 업체와 연락을 했다는 점이다.

KM 그룹 비서실은 운 좋게 이 점을 발견했다.

운이 좋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이상하게 운이 좋은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조카 최민혁 실장은 실로 지독할 정도로 철저하니까.

“민혁이 이놈이 수작 부리는 것은 아닐까?”

권재홍 비서실장은 힐끗 민상수 부장을 쳐다보았다.

민상수 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한 달 전이라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국세청의 강상혁 조사국장이 수갑을 차고 끌려 나오는 장면을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딱 그 시점에서 갑자기 CT-2 기획안이 나오다니.

이걸 운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아니, 이 자체는 확실히 좋은 일이다.

KM 전자 기획실 직원이 숨김없이 그대로 CT-2 원천기술을 보유한 유럽 기업 담당자를 만나는 정보를 확인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과연 이게 KM 그룹 비서실의 능력이 좋아서일까.

아니면 차라리 최민혁 실장이 덫을 깔아놓은 거라고 해야 할까.

‘정말 모르겠네.’

“…솔직히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이 CT-2 기획안은 너무 뜬금없이 나와서 말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필요해?”

“적어도 이 주일은 더 있어야 합니다.”

“그래. 시간을 충분히 줄 테니, 철저하게 조사를 해 봐.”

“…알겠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가 않았다. 그는 얼마 전이었다면 CT-2 기획안을 들고 바로 최용욱 회장에게 찾아갔겠지만, 지금은 내키지 않았다.

‘설마 이것도 함정일까?’

그런데 설사 함정이라도 최문경 부회장은 도저히 유혹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CT-2는 그 자신에게 너무도 잘 맞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업만 성공하게 한다면 최용욱 회장에게 인정을 받을 수도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불안한 경영권을 다시 굳힐 수도 있었다.

다름 아닌 비메모리 사업 쪽에서 벌써부터 밀리고 있는 장녀 최영란 본부장을 압박할 수도 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어쩌다가 내 모양이 이렇게 된 건지. 최민혁 이 새끼 때문이잖아!

울화통에 미칠 것만 같은 최문경 부회장은 최용욱 회장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젠장, 어쩔 수 없어.’

* * *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 실장이 만든 폭탄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사고는 최민혁 실장이 쳤는데, 정작 자신에게도 연락이 무지 왔다.

아니, 심지어 자신을 만나자고 청해온 인물도 있었다.

다름 아닌 임광준 국세청 차장이었다. 그는 괄괄한 성격 탓에 속을 숨기지 못하는 인물이다. 때문에 최용욱 회장을 보자 바로 소리쳤다.

“최 회장님, 정말 이럴 겁니까?!”

“미안하네.”

최용욱 회장은 자신보다 어린 나이의 임광준 차장을 무시하지 않았다.

국세청장 바로 밑의 고위 관료가 임광준 차장이었기 때문이다.

실무적인 업무 총괄은 그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지금 사과한다고 해서 끝날 문제입니까? 도대체 국세청을 얼마나 얕잡아 봤으면…….”

하지만 최용욱 회장은 순순히 당하지 않았다.

“자네들이 내 손자 민혁이를 내사한 것은 불법이네.”

“그건 말입니다. 관행적인 일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 그러십니까? 최 실장의 자산 형성 과정에 대한 의혹이 넘쳐났습니다. 그 여론을 우리 국세청이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불법이 합법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면 국세청의 불법성이 완전히 드러날 거야.”

“회장님!”

흥분해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임광준 차장 얼굴은 붉은색 등신불 같았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은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알아. 민혁이 그놈이 너무 지나쳤다는 것을 말이네. 하지만 그놈은 국세청이 처음이잖아. 아무래도 불안해서 그랬을 거야. 당할 바에는 먼저 선제공격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지,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아니, 상황이 그렇다는 거야. 난 내 손자 편을 들 수밖에 없으니까. 애초에 자네들이 빌미를 주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좋습니다. 그렇게 나오신다면 우리도 끝장을 보겠습니다!”

최용욱 회장은 단단히 화난 임광준 차장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냉정하게 말했다.

“앉게.”

“하, 지금 절 협박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내 손자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민혁이 그놈은 나와는 달라. 만약 국세청이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태도를 보이면, 국세청을 통째로 날려 버릴 거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어디 한번 해보십시오. 우리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을 테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번 강상혁 조사국장의 미국 자산에 FBI와 미국 연방 법원이 끼어들어서 손을 쓴 것을 알면서도 그래?”

미국 정부의 대응은 실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어찌 보면 임광준 차장이 굳이 최용욱 회장을 만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미국 정부가 나서면서 최민혁 실장이 대체 어느 정도의 역량이 있는 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자칫 이번 일이 확전으로 치닫는다면, 미국 내의 재산도 문제의 소지가 있다.

따라서 임광준 차장은 최민혁 실장이 미국 내에서 어느 정도 힘을 쓸 수 있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따라서 아픈 곳을 찔린 덕분에 쉽게 최용욱 회장에게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건…….”

임광준 차장은 아킬레스건을 찔린 덕분에 최용욱 회장 눈치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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