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535화 (535/1,021)

#535.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어.”

김환진 사장은 이번이 항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그는 이전처럼 대충 물러나지 않았다.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아니,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흑자인 기업을 왜 팔아치운다는 말입니까?!”

절절한 호소였다.

이번만큼은 김환진 사장도 진심을 드러냈다. 이미 구조조정 명단에 오른 계열사 사장을 대리해서 이 자리에 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마냥 옳은 것은 아니다.

그간 김환진 사장이 최문경 부회장만을 믿고, 빼돌린 재산이 꽤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자금 일부를 최문경 부회장에게 상납했다는 점이다.

실상 그 대표적인 기업이 바로 KM 전자였다.

김환진 사장은 차마 상납금에 대해서 떠들지는 않았지만, 말을 빙빙 돌려서 계속 항의했다.

“만약 이대로 계열사 매각이 진행된다면,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이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들은 법적 대응을 할지 모릅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부회장님만을 믿고 있었습니다.”

“다른 계열사 사장은 몰라도 김 사장은 민혁이 그놈에게 알랑방귀를 뀐 것으로 아는데?”

“절대 아닙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어이가 없어서 권재홍 비서실장에게 사진을 받아서 그의 앞에 내밀었다.

사진 안에는 최민혁 실장 옆에서 아부 자세를 취하는 김환진 사장의 모습이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진은 무릎을 꿇은 채 최민혁 실장에게 술을 따라주는 장면도 있었다.

아예 최민혁 실장의 충성스러운 부하처럼 행동한 것이었다.

“이, 이건…….”

“아, 미리 말해두지만 김 사장 자네를 감시한 것이 아니야. 민혁이 그놈을 지켜본 거야. 그냥 거기에 딸려서 나온 사진이야.”

그가 계속 내놓는 사진은 다른 계열사 사장들과 최민혁이 서로 식사를 하는 장면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팔짱을 한 채 입을 다물고 눈동자를 계속 교활하게 굴리는 김환진 사장을 쳐다보았다.

‘진짜 믿을 수 없는 인간이야. 이거 어쩌면 민혁이 이놈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모르겠어.’

사실 어지간한 인물이면 이 정도에서 물러나야 마땅했다.

그런데 김환진 사장은 그 어지간한 사람과는 달랐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솔직히 부회장님은 그저 옆에서 입만 다문 채 지켜보기만 했지 않습니까. 저라도 최민혁 실장의 약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자존심을 다 버리고 최선을 다한 것뿐입니다!”

“하하하.”

최문경 부회장은 혼자 드라마의 한 장면을 찍는 김환진 사장을 보면서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눈물마저 글썽이는 모습만 봐서는 진심인 것 같았다.

‘진짜 악어의 눈물이잖아.’

그는 혀를 내두른 채 더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비서실 직원을 동원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김환진 사장을 내쫓았다.

[부회장님, 정말 이렇게 나올 겁니까? 다른 계열사 사장이 절대로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겁니다. 정 안 되면 최민혁 실장을 지지해서 당신을 몰아내고 말 겁니다!!!]

억지로 버티다가 비서실 직원에게 붙들려 끌려 나가는 김환진 사장을 본 권재홍 비서실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겠습니까?”

최문경 부회장은 질질 끌려가면서 자신에게 욕설을 퍼붓는 김환진 사장의 독기에 혀를 내둘렀다.

“정말 대단한 인물이야.”

“김 사장도 답답해서 저럴 겁니다.”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잖아. 저건 협박이나 마찬가지야.”

“그렇기는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은 권재홍 비서실장마저 김환진 사장을 옹호하자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지금은 아버지 뜻이 그렇다면 막을 방법이 없어. 설마 또 나서서 아버지에게 찍혀야 속이 시원한 거야? 영란이가 KM 산업 부사장으로 승진하게 만들어줄 일 있어?!”

“그렇지만…….”

“영란이가 9% 지분을 가졌어. 그 지분이 경영권에 간섭할 정도는 아니지만 한쪽에 힘을 실어주기에는 충분해!”

그랬다.

9% 지분 수치는 애매한 경우다. 그렇지만 지금 최민혁 파벌과 최문경 부회장 파벌 사이의 우위에는 영향을 주고도 남는다.

특히 최영란은 최문경 부회장을 경멸했다. 그녀가 어디에 손을 들어줄지는 뻔했다. 다만 지금은 최용욱 회장의 눈치가 있어서 노골적으로 나서지 못할 뿐이다.

최용욱 회장은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제대로 된 처벌이자, 복수였다.

최문경 부회장 표정은 더 심각했다.

“소액 주주 쪽은 대체로 민혁이 그놈을 밀어주고 있잖아.”

“…….”

권재홍 비서실장도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CDMA를 둘러싸고 일어난 이슈 때문에 최민혁은 거의 투자의 신으로 추앙받는 중이다.

그러니 일반인은 최민혁 실장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KM 산업 소액 주주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이 난국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런데 회의실에 민상수 부장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정확히는 권재홍 비서실장에게 뭔가를 보고한 후에 서류만 내놓고는 조용히 나가 버렸다.

“뭐야?”

건네 받은 서류를 보고선 권재홍 비서실장은 중요한 회의 중에 뛰어 들어온 민상수 부장에게 하려던 잔소리마저 꿀꺽 삼키고 말았다.

“…신사업 보고안입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황당해서 화조차 내지 않았다.

“아니, 우리 그룹이 지금 계열사 매각을 하는 중이잖아. 안 그래도 내부적으로 어수선한데, 무슨 뜬금없는 신사업이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권재홍 비서실장은 순간 망설였다. 이 보고서를 지금 최문경 부회장이 본다면 폭발할 것 같아서다. 그런데 살기가 가득한 최문경의 시선을 보자 결국 서류를 내밀었다.

“최민혁 이 새끼가 드디어 미쳤구나!”

최문경 부회장은 예상대로 크게 분노했다. 다만 권재홍 비서실장의 예측과는 달리 미친 황소처럼 날뛰지는 않았다.

이보다는 냉정한 시선으로 기획안을 다시 몇 번이나 살폈다.

문득 최민혁 이놈이 드디어 자만심에 미쳐서 무리수를 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불과 며칠 전에 당한 수모를 잊지 않았다.

당시 자신을 상대하던 최민혁 그놈은 여유가 넘쳐났다.

그런 놈이 무모한 도전을 한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진지한 얼굴로 기획안을 꼼꼼하게 읽었다. 하지만 그는 구체적이고, 개연성이 높은 기획안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장난이 아니야.’

특히 보고서에 강점을 둔 부분이 CT-2 서비스 진화 방향이다.

CT-2가 가진 제약을 뛰어넘는 다양한 의견이 수록되어 있었다.

‘로밍이라.’

타 서비스와의 로밍을 통해서 CT-2의 한계를 극복한 부분은 현실성이 매우 높았다.

여기에 CT-2 전용 교환기에 이동 가능한 서비스를 추가해서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타결안을 집어넣었다.

만약 기획안이 허황한 이야기였다면 보고서를 찢어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보기는 힘들었다.

KM 전자 기획실이 힘을 합쳐서 제대로 만든 보고서였기 때문이다.

기획안의 완성도만 본다면 미래가치가 없는 계열사를 정리한 후에 돈이 되는 신사업에 투자하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동통신 사업 투자안이라니.”

이 사업은 이미 KM 그룹 기획 조정실에서도 검토 단계를 거쳐서 포기한 사업이다.

최문경 부회장으로서는 먹음직한 요리이기도 했다. 그는 이 기획안을 올린 당사자가 최민혁 실장이라는 것을 알자 심각해졌다.

그는 묵묵히 보고서를 처음부터 자구를 하나하나 반복해서 조용히 읽기만 했다.

시티폰은 인터넷 서비스 사업과 맞물린 터라 미래 가능성이 높은 사업이다.

유선, 무선, 음성, 데이터가 서로 융합이 이루어질 때의 수익성은 상상을 초월하리라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다.

2년 후에는 이 서비스가 화려하게 꽃을 피울 것으로 생각했다.

오성 전자를 비롯한 한국 대기업도 이미 이 사업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이들은 기존 CDMA, TDMA에 연이어서 이 사업도 포기하지 않았다.

때문에 KM 그룹이 살인적인 경쟁력에 겁을 집어먹고 포기한 사업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했느냐?

그건 아니다.

당장 비서실에서는 여전히 몇몇 인력은 CT-2 서비스에 관한 조사를 이어갔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렇게 했음에도 그들의 성과는 이 보고서에 댈 바가 아니었다.

최민혁이 슬쩍 기획실에서 올린 가짜 보고서에 덧칠해서 그럴듯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실제로 최민혁 인생 1회 차에서 적용된 CT-2 서비스보다 부분적으로 한 단계 완성도가 높았다.

권재홍 비서실장의 안색이 복잡한 것은 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아무래도 다시 내부적인 검토를 거쳐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심호흡까지 한 최문경 부회장은 양손으로 깍지를 낀 채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권 실장, 자네 생각은 어때? 민혁이 이 새끼가 왜 갑자기 이 CT-2 사업을 관심을 두는 것 같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뭔가 있겠지?”

“이 사업이 중요했다면 장승일 실장에게 알리지 않았을 겁니다.”

“맞아. 이 자식이 사람을 아주 우습게 안다니까.”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은 최민혁 실장 욕을 하면서도 기획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CT-2에 대한 탐욕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최용욱 회장도 CT-2에 비관적이었는데, 만약 최민혁 실장이 제안서를 냈다면 태도를 달리할 수도 있었다.

즉, 지금은 최민혁 실장의 제안서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최용욱 회장을 설득할 수도 있었다.

돈?

KM 그룹의 자금 사정은 처음 이 CT-2 사업을 검토할 때와는 또 달랐다. 계열사 매각 대금이면 차고도 넘쳤다. 아니, 그저 그 일부로도 충분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최민혁에게 당한 앙금을 이미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 CT-2 사업은 그만큼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보고서를 꼼꼼하게 읽고 나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이상한데…….”

“어떤 점이 말입니까?”

“민혁이 그놈이 항상 뭔가를 할 때는 원천기술을 쥐고 들어갔어. 그런데 이 CT-2에 대해서만큼은 아주 달라. 아예 없어.”

“잠깐만요.”

권재홍 비서실장은 몇 번 확인하다가 곧바로 포기했다. 아니, 다른 대안을 선택했다. 바로 민상수 부장을 이 자리에 호출했다.

[나야. CT-2와 CDMA 서비스 관련 보고서를 가지고 부회장실로 와.]

* * *

민상수 부장은 CT-2에 대해서 제법 많은 것을 알았다. 그는 심지어 CDMA 관련 사업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CDMA가 셀 단위 중심 서비스라는 것은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최근 CDMA 서비스 과정에서 이를 활용할 수 있는 PSTN 통신망 연결에 성공했습니다.”

이 일을 성공시킨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라는 것을 쑥 뺐다.

여기에 최민혁 실장의 이야기가 나오면 최문경 부회장이 폭발한다.

분노한 최문경 부회장은 아예 보고 자체를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두 사람은 바로 알아듣고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둘 다 설마 했는데, 역시 최민혁 실장이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 다른 기술과는 많이 다르잖아. 당장 CDMA만 해도 퀄컴 지분을 확보해서 간접적으로 원천기술을 확보했어.”

민상수 부장이 최문경 부회장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있습니다. 원천기술이 말입니다.”

“…그래.”

최문경 부회장은 이를 갈았다. 그는 이 일에도 조카 최민혁 실장이 아주 복잡하게 엮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이전 MP3, ARN, 퀄컴 때와는 또 상황이 많이 달랐다.

민상수 부장은 불호령이 떨어질까 눈동자를 이리저리 열심히 굴렸다.

“서, 설명을 계속할까요?”

“그래. 해봐.”

“잘 아시겠지만 CT-2는 셀룰러 서비스라기보다는 보행자 중심 망입니다. 특히 910MHz 대역을 공유하기 때문에 셀룰러보다는 가격이 저렴합니다. 따라서 단말기나 기지국 공급이 더 원활해집니다.”

다만 문제가 전혀 없지는 않다.

출력이 낮아서 200m 이내라는 한계가 존재했다.

그래도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안이 있다.

“다만 MP3나 CDMA 경우와는 조금 다릅니다. ETSI 유럽 표준에 따르면 원천기술을 보유한 기업은 유럽과 미국 기업이 대다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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