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534화 (534/1,021)

#534.

장승일 실장은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알기로는 최민혁 실장이 CT-2 사업에 뛰어들 이유가 전혀 없었다.

‘CDMA 서비스 컨설팅만 해도 일이 넘쳐나잖아. 심지어 퀄컴과의 중재도 간단한 일이 아니야.’

구길모 차장도 영문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지금 최민혁 실장님은 국세청 내사 문제 때문에 정신이 없을 텐데, 이런 시국에 새로이 통신 사업을 검토하겠다는 말입니까?!”

장승일 실장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현재 국세청을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잘 안다. 이번 최민혁 실장의 보복은 실로 놀라운 한 수였다.

물론 겉으로야 최민혁 실장이 발뺌하겠지만 아는 이들은 모를 수가 없다.

그건 KM 그룹 역시 마찬가지다. 뒤늦게 국세청에 알아본 바로는 최민혁 실장에 대한 내사가 진행된 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구 차장, 자네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냐. 이건 어디까지나 검토 수준이잖아. 너무 까칠하게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어.”

“장 실장님도 참 답답합니다. 아니, 이런 기획안이 고작 단순한 검토 수준이겠습니까. 더욱이 그룹 기조실에 올린 기획안입니다. 적극 검토하겠다는 뜻 아닙니까. 그러면 당장 최문경 부회장님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 일로 최용욱 회장님과 얼마나 대립했는지 잘 알면서 그러십니까?”

“…….”

장승일 실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확실히 최문경 부회장을 간과했다. 그가 이 소식을 듣는다면 보일 반응은 불을 보듯 명확했다.

비메모리와 통신사업은 최용욱 회장이 입만 열면 내놓았던 화두였다. 다만 워낙에 경쟁사가 빡빡해서 들이대지 못했다.

그 대안으로 선택한 사업이 바로 지금은 HY 전자에 매각한 TRS지오텍 사업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주목을 받는 시티폰은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장승일 실장은 최근 국세청 내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아는 지인을 통해서 들었다. 강상혁 조사국장 구속에 최민혁이 손을 썼다는 이야기가 파다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강상혁 조사국장이 한 일이 최민혁 실장에 대한 내사였으니까.

그런 차에 강상혁 조사국장이 구속되기가 무섭게 CT-2 서비스라니.

안 그래도 CDMA와 TDMA 표준을 둘러싸고 정보 통신부도 두 쪽으로 쪼개진 상황에서 말이다.

이 일도 따지고 보면 최민혁 실장이 원인이었다.

“이건 분명히 뭔가 다른 의도가 있습니다. 국세청 보복에 대한 연장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승일 실장이 혀를 내둘렀다.

“한국 통신이 미는 CT-2 사업이 미끼라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한국 통신이 그렇게 우스운 기업이었어?”

“그거야…….”

구길모 차장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흥분해서 깜빡하고 있었지만 공기업인 한국 통신은 자신이 씹을 만한 기업은 아니었다.

여기 모인 기획 조정실 팀장급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다들 입을 쿡 다문 채 기획안을 살피기만 했다.

사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대다수가 CT-2는 괜찮은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몇 번에 걸쳐서 줄기차게 CT-2 사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과정에서 논쟁은 계속되었다.

목이 찢어져라 외쳤지만 돌아온 대답은 지켜보자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CT-2라니.

다들 지쳐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뜬금없이 CT-2를 주장하고 나온 사람이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이란 점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장승일 실장도 KM 그룹 전략 기획실 임직원들이 다들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그들의 의도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간혹 의견을 내놓는 이들은 다들 최민혁 실장의 의도가 과연 무엇일지에 고개를 갸웃했다.

“전 다른 것을 떠나서 왜 최민혁 실장님이 이 CT-2 사업에 관심을 가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공감입니다.”

“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와서 CT-2를 살피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과연 최민혁 실장님이 관심을 둘 만한 아이템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론은 아주 간단했다.

‘역시 함정일까?’

다만 왜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최민혁이 도대체 무슨 의도로 기조실을 흔들어서 KM 그룹 전체를 혼란으로 몰고 가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장승일 실장은 이 기획안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다 좋아. 하면 최민혁 실장님이 정말로 CT-2 사업에 뛰어들면 어떻게 할 건가? 설마 그것도 음모론으로 몰고 갈 거야?”

구길모 차장 역시 그 부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최종 결론이 나온 셈이다.

모르겠다.

기조실 의견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들 논쟁을 추가로 할수록 색깔론만 더 나왔다.

장승일 실장 역시 CT-2 얘기가 지겨워서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네. 그러면 일단 회장님에게는 기조실 검토 결과는 이 사업에 대해 보류한다는 결정이 났다고 보고할 수밖에 없지. 어차피 최종적으로는 회장님이 결정할 사안이니까.”

구길모 차장이 발끈하기는 했지만, 논쟁 속에서 뒤늦게 한 가지를 깨달았다.

“회장님이 이전과 같은 판단을 하실까요?”

“…이전과는 상황이 좀 달라. 계열사를 매각하고 나면 자금의 여유가 생기니까.”

“돈이야 넘쳐나겠지만, 굳이 CT-2에 끼어드는 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칫 엉뚱한 곳에 자금을 낭비할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거잖아. 그러니 이번 CT-2에 대한 것을 추가로 다시 재검토를 해봐. 혹시 놓친 것이 있을 수가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기조실 임직원들의 분위기는 좋지가 않았다. 그들은 이제 CT-2 사업은 지겹기만 했던 것이다.

구길모 차장은 한마디 하고 난 후에 회의가 끝나자 넌지시 한 가지를 질문했다.

“부회장에게도 보고하실 겁니까?”

“글쎄.”

그는 명확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조실 내에 주의할 인물인 천경구 과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천경구 과장은 마치 쥐새끼처럼 주변을 이리저리 쳐다보다가 장승일 실장의 눈빛과 마주하고는 화들짝 놀란 채로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이미 알고 있겠지.’

* * *

장승일 실장도 기획 조정실 내부에 스파이가 있다는 것을 눈치를 챘다. 다만 알면서도 내버려 둔 것이다. 제법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그건 최민혁 실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기획 조정실이 움직이는 것을 보자 쾌재를 불렀다. 아니, 조성돈 팀장을 치하해 주었다.

“고생했습니다.”

“제가 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아뇨, 이번 기획안은 제법 그럴듯했습니다. 제가 살을 조금만 더 붙이니, 완벽한 기획안이 되었으니까요.”

최민혁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의견만을 더해서 수정한 것이 아니다. CT-2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대안을 함께 집어넣었다.

이 수정 기획안을 살핀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의 눈치를 봤다.

“단순히 그럴듯한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구현이 가능한 정도가 아닐까요?”

“가능할 겁니다.”

“네?”

조성돈 팀장은 깜짝 놀랐다.

그런데 실상 최민혁 실장이 수정한 기획안은 단순히 그럴듯한 기획안 수준은 아니었다.

단적인 예로 4MHz 대역 내에서 생기는 채널 부족 현상을 막는 대안이 대표적이다.

트래픽 밀도를 개선하는 송신 출력 설계안을 추가한 것이다.

이 방식은 실제로 CT-2에서 적용된 방식이다.

하지만 나름 그럴듯하기는 했지만 늘어나는 사용자를 감당할 수준은 아니다.

다만 구현 전에는 그런 부분까지 알기는 아주 어려웠다.

“…솔직히 말해서 KM 그룹 비서실도 바보가 아닙니다. 그냥 단순한 기획안만을 들이밀어서는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하, 하지만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CT-2 서비스를 가볍게 생각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CT-2 사업은 무조건 망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조성돈 팀장은 애처로운 강아지처럼 낑낑거렸다. CT-2는 KM 그룹이 달려들기에 딱 좋은 맞춤형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그는 최민혁의 배포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적군을 속이기 위해서 아군부터 속이란 말이 있지만 전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CT-2 사업은 무조건 박살이 납니다. 그러니 미련을 버리세요!”

“저, 정말입니까?”

“아, 정말이라니까요!”

최민혁은 버럭 화를 내고서야 스스로 탄식하고 말았다.

조성돈 팀장은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번 CT-2 수정안은 너무 아까워서 말입니다.”

“…뭐, 조 팀장님 처지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미끼란 사실을 잊지 마세요. 아, 이왕이면 그 표정을 유지하는 것도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놀리는 듯한 최민혁의 말에 조성돈 팀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정말 CT-2 사업이 가망이 없는 것일까? 그래도 다행은 다행이야. 제아무리 장승일 실장, 최문경 부회장이라고 해도 이 기획안을 보면 쉽게 뿌리치지는 못할 테니까.’

* * *

최용욱 회장은 내부적으로 계열사 매각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KM 하이텍, KM 정밀과 같은 계열사가 그 경우였다.

다만 이들 사장은 최용욱 회장에게 크게 반발하지는 않았다. 그들 자신이 해놓은 기업 성과 때문이다. 적자만 누적되다가 이번 구조조정을 통해서 어느 정도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지금 당장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용 꼬리보다는 닭 머리가 나을 수도 있으니까.

더욱이 돌아가는 상황이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이 대신 내세운 것은 대리인이다.

바로 KM 인스트루먼트의 김환진 사장이다. 그는 최용욱 회장이 아니라 최문경 부회장을 다시 쪼르르 찾아가서 항의했다.

“부회장님, 정말 이대로 두고만 보실 겁니까. 저 김환진 말입니다. 그룹의 지시에 충실히 따랐습니다. 구조조정을 하라면 했고, 임직원들도 잘라냈습니다. 불필요한 사업도 정리해서 이제 멀쩡한 회사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계열사 매각이라뇨?!!”

최민혁 실장의 보복 때문에 정신이 없는 최문경 부회장은 약삭빠른 김환진 사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쪽에 붙었다가 저쪽에 붙었다가 종잡을 수가 없는 인물이 바로 김환진 사장이기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에게 말이 통하지 않자 자신에게 달려온 김환진 사장이 짜증스럽기만 했다.

그렇다고 내심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김 사장도 이미 알고 있었잖아.”

“전 최소한 부회장님이 손을 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기업 매각에 대해 권재홍 비서실장을 통해서 이미 자세한 보고를 받았다. 그는 최용욱 회장에게 항의를 해보기도 전에 욕만 들었다.

“…손을 썼어.”

“네? 정말입니까?”

최문경 부회장은 툴툴거렸다.

“덕분에 우리 회장님에게 완전히 찍혔어.”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번 일은 다들 반발하는 일이란 말입니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나름 계열사 사장을 만나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른 반응을 보인 이도 있었다.

“글쎄, 저마다 생각이 좀 다를 거야. KM 정밀 쪽은 오히려 환영하는 눈치니까.”

“절대 아닙니다. KM 그룹 계열사가 아니라 독자적인 회사가 될 경우에는 생존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놈의 구조조정이 문제였어.’

1차 구조조정을 통해서 KM 그룹 계열사들의 체질 개선이 대폭 진행되었다. 대다수가 흑자 전환에 성공했고, 아닌 기업도 올해 말까지는 어느 정도 적자폭을 줄일 예정이었다.

더욱이 최용욱 회장이 나서서 이들 기업의 체질 개선을 도왔다.

즉, 그룹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인 셈이다.

그러니 지금 계열사 사장들 생각은 1차 구조조정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지금 당장은 아니잖아.”

“그거야…….”

최문경 부회장은 뻔히 보이는 수작을 부리는 김환진 사장의 태도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금은 그때와는 또 상황이 달랐다. 최영란에게 지분 9%가 넘어갔기 때문이다.

‘민혁이 이 새끼가 들고 있는 지분이 11%야. 더 될지도 몰라.’

두 사람의 지분을 합치면 모두 20%다.

여기에 박두진 사장이 만약 이들 편에 선다면 부회장 자리도 지키기 쉽지 않다. 거기에 최용욱 회장마저 최민혁 편을 든다면 말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자신의 차명 지분을 떠올렸다. 지금 당장은 최용욱 회장의 눈 밖에 나면 곤란하기에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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