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
최민혁은 최문경 부회장의 반응을 꽤 즐겼다. 시작으로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그도 위기감을 느껴서 적극 움직일 것이라 반응했다.
‘뭐, 내가 원한 방향으로 가도록 손을 쓰는 것이 핵심이지.’
그래서 지금 당장은 최문경 부회장이 뭘 하는지 궁금해서 김명준 과장에게 질문했다.
“우리 부회장님은 지금은 뭘 하고 다녀요?”
“지난달부터 최명진 회장 도움을 얻어서 만난 법무부 관료를 계속 만나고 있습니다.”
최민혁은 ‘법무부 관료’를 만나서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르나 싶었다.
다만 그는 인생 1회 차에서부터 이런 일이 생기면 꼭 따라오는 사건이 있었다는 걸 상기했다.
“혹시 우리 둘째 큰아버지 특별사면 때문은 아니겠죠?”
“…맞습니다. 최 부회장님은 최명진 회장의 도움을 얻어서 법무부 고위직에 손을 써서 최훈열 전무님을 특별사면 대상자에 올랐습니다. 적어도 이달 안에는 곧 풀려날 예정입니다.”
“…우리나라 특별사면은 왜 그렇게 쉽게 되나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최명진 회장의 로비 능력을 알아줘야 합니다. 정부 쪽에 직접 손을 쓴 것으로 압니다.”
김명준 과장이 실제로 그 근거로 내놓은 것은 최명진 회장이 여러 사람을 최문경 부회장과 함께 만나는 사진이었다.
이들은 여러 장소를 돌면서 만났는데, 주변 시선을 꽤 의식했다.
다만 설마 누군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는 것은 몰랐다.
최민혁은 혀를 찼다. 그도 최문경 부회장이 최명진 회장과 손을 잡은 후에 그 권력을 최대한 이용할 것으로 추측했다.
다만 그 일이 최훈열 전무의 특별사면으로 이어질지는 몰랐다.
‘하긴 나 때문에 위기감을 느꼈으니, 아군이 필요하겠지. 다만 둘째 큰아버지가 도움이 될까? 아니, 꼭 그래서는 아닐 거야. 적의 적은 아군이니까. 특히 할아버지를 압박하려면 나쁜 수단은 아니지.’
“혹시 할아버지는 알고 계세요?”
“네, 이미 아는 것으로 압니다.”
“할아버지가 손을 쓰지는 않았겠죠?”
“그건 아닙니다. 다만 얼마 전부터 고민한 것 같습니다.”
“그렇겠죠. 미우나 고우나 자식이니까.”
김명준 과장은 ‘최용욱 회장님이 암묵적으로 특별사면을 도와준 것으로 압니다만’란 말까지 굳이 하지는 않았다. 그는 KM 그룹 내에 돌아가는 일을 이해하면서도 공감하지 않았다.
특히 최용욱 회장의 우유부단한 행동이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해는 했다. 자기 재산을 아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그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이는 최민혁에게는 차별이다.
“…괜찮겠습니까?”
최민혁은 쓰게 웃고 말았다.
“할아버지 성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이제 와서 새삼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비난받을 행동도 아닙니다. 차라리 자식에게 냉혹한 다른 재벌 그룹 회장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하지만 최훈열 전무가 한 행동은…….”
최훈열 전무는 이미 KM 전자에서 축출되고 난 후다.
이제 최훈열 전무는 최민혁에게 그 어떤 의미도 없었다.
“과거사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네.”
최민혁은 최문경 부회장의 행보에 딱히 어떤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솔직히 최문경 부회장이 지금보다 더 설쳤으면 했다.
그래야 한부 그룹 최명진 회장과 깊이 엮여서 늪에서 빠져나오기 힘들 테니까.
그는 복잡한 생각에 잠긴 김명준 과장을 쳐다보았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잘 아시죠?”
“최훈열 전무와 최문경 부회장의 동선을 좀 더 철저히 살피겠습니다.”
최민혁이 곧 호출받고 나타난 조성돈 팀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다행히 조성돈 팀장은 이미 김명준 과장에게 사전 정보를 들었다.
“기획실에 인원 배정을 더 늘리겠습니다.”
“좋네요.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첫째 큰아버지 일을 방해해서는 곤란해요. 오히려 지금 일이 더 잘 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김명준 과장이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최명진 회장은 얕잡아 볼 수 없는 인물입니다. 추후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쪽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을 테니까. 아, 정확히는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그러니 우리 첫째 부회장님과 둘째 전무님 동선을 지금은 지켜만 보세요.”
최민혁의 표정이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다양한 음모를 꾸미는 악당 두목 같았다. 실제로는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 즐거운 고민에 빠진 게 아니라 이미 해야 할 일들의 우선순위를 정해놓았다.
‘후후후, 통신사업에 그렇게 관심이 많다고 했지?’
실상 최민혁은 KMP-02나 아이컴이 출시될 때까지는 크게 바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심심하던 차에 너무 재미있는 사건이 터진 셈이다.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어느 정도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자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아, 조 팀장님은 CT-2 사업에 대해서 검토하고, 그 정보가 우리 첫째 부회장님 귀에 들어가도록 작업해 보세요. 뭐, 장 실장에게 정식으로 보고해도 좋고요. 아, 그게 합리적이겠어요.”
“CT-2라면, 발신 전용 이동통신 서비스 말입니까?”
“네, 이왕이면 CT-2 사업부를 만들어도 됩니다. 인사 팀에도 적당히 알아듣도록 해야 합니다.”
요지는 KM 전자가 CT-2 사업을 정식으로 밀어붙일 것이라는 내부 분위기 조성이다. 이제까지 최민혁 실장 밑에서 손발을 맞추어 온 조성돈 팀장이 그걸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네.”
조성돈 팀장은 조금 뜬금없는 지시에 최민혁 실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제가 제 입으로 이동통신 서비스 사업 쪽은 안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조 팀장님은 독자적으로 CT-2를 조사하는 척하란 말입니다.”
조성돈 팀장도 CT-2 사업이란 말에 귀를 쫑긋했다. CDMA, TDMA 못지않게 이 사업 역시 나빠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최민혁의 태도가 너무 이상했다.
“하면 CT-2 사업은 아예 하지 않는 겁니까?”
“어차피 못 합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제 입으로 통신 사업을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막상 끼어들면 이권 세력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가만히 정도가 아닐 것이다. 안 그래도 최민혁 실장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모든 세력이 들고일어나서 최민혁 실장을 씹어댈 것이다.
실제로 최민혁 실장에게 반감을 품은 이들이 적지 않은데, 바로 시기심에 사로잡힌 이들이다. 그들 역시 이 흐름에 합류할 것이다.
“하긴…….”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이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자 혀를 찼다. 다만 기획 팀이 이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므로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밝히지는 않았다.
“일단 CT-2를 한 번 파보세요. 필요하다면 정보 통신부를 비롯한 관련 당사자를 만나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가능한 요란하게 만나는 게 중요합니다. 언론사에 정보를 흘려서 그 정보가 새도록 해도 좋습니다. 핵심은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의문이 많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일의 성격 자체가 복잡해서 머릿속이 복잡할 뿐이었다.
김명준 과장 역시 의문이 많았지만 차마 질문하지 않았다. 질문해도 자신이 알아들은 것 같지가 않았다. 다만 그도 대충 이게 최문경 부회장을 위한 함정이라는 것 정도는 깨달았다.
“…혹시 CT-2 사업은 미래가치가 없는 겁니까?”
최민혁 실장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는 조성돈 팀장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면서 순순히 말해주었다.
“물론이죠. 아마 거기에 돈을 퍼부었다가는 쫄딱 말아먹을 겁니다.”
“하, 하지만 한국 통신이 주도하는 사업인데, 그렇게까지 되겠습니까?”
공기업인 한국 통신이 주도하는 사업이 망할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한 말.
최민혁은 힐끗 심각한 고민에 빠진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조 팀장님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이번에 한번 기획 팀의 실력을 지켜보겠습니다. 다만 핵심은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CT-2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후유, 잘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이번 일이 영양가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특히 기획실 직원들의 분위기가 안 좋다는 것을 고려했다.
“아, 그리고 이번에 요트를 하나 장만했으니, 한 번 확인해 보기 바랍니다. 이왕이면 기획 팀도 이번 기회에 워크숍을 가보는 것도 좋겠죠.”
“…네.”
조성돈 팀장 역시 이미 인사 팀장에게 들은 이야기라서 더 질문하지 않았다. 뜬금없는 요트 대여 이야기는 이미 KM 전자 내에서도 돌았기 때문이다.
* * *
CT-2(Cordless Tlephone)은 가정용 무선전화인데, 집 전화 CT-1의 확장된 개념이다. 공기업인 한국 통신이 이 사업을 밀어붙이는 중이니, 아무래도 많은 대기업과 중견기업이 이 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다만 전화를 걸 수는 없고, 받을 수만 있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무선호출기가 반드시 필요했다.
흔히 시티폰으로 잘 알려진 이 방식은 때문에 말이 많았다.
KM 전자 기획 팀 역시 신규 사업 검토 과정에서 이 사업을 살펴본 적이 있다.
다만 지금 산적한 일이 너무 많았다.
배종대 과장은 갑자기 조성돈 팀장이 시티폰 이야기를 하자 한숨을 내쉬었다.
“팀장님, 요즘 국세청 강상혁 조사국장 구속에 최민혁 실장님이 손을 썼다는 소리가 있던데, 이번엔 뜬금없는 시티폰입니까?”
“…두 가지 사건은 관련이 있는 것 같아.”
“네? 그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입니까?”
푸념하는 배종대 과장은 실상 최근의 혹사 때문에 안색이 좋지가 않았다.
스티븐이 디자인을 바꾸면서 내부적으로 KMP-01 차기 모델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추가 검토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일 때문에 기획 팀 내부 분위기는 좋지가 않았다.
물론 에플의 대주주가 최민혁 실장인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 일거리를 에플에서 가로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서 실적을 에플에 도둑맞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덕분에 기획 팀은 에플의 시다바리 노릇만 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조성돈 팀장이 그걸 모르지 않았다.
“배 과장, 자네 마음을 모르지 않아. 하지만 최 실장님은 이미 아는 사실이니, 너무 부정적일 필요는 없어.”
“하지만 KMP-02 에플 버전을 보셔서 알 것 아닙니까. KMP-01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런데 그 기반 기술은 전부 우리 기획 팀에서 시작한 것 아닙니까?”
배종대 과장의 불만에 뜻밖에 이정원 과장, 이영란 대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난리가 난 국세청 뉴스를 접했지만, 그쪽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조성돈 팀장은 혀를 찼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왜 뜬금없는 워크숍을 제안했는지 그제야 알았다. 새삼 최민혁 실장의 안목에 혀를 찼다.
“그 이야기도 해봐야지. 최근에 MP3 플레이어를 둘러싸고 독과점 이야기도 나오잖아. 둘을 합쳐서 새로운 기획안을 만들어 봐야지.”
“하지만 그건 좀…….”
배종대 과장은 여전히 불만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조성돈 팀장이 피식 웃었다.
“실장님이 워크숍을 갔다 오라고 했으니, 이번 주말을 껴서 같이 가지. 이번 기회가 휴가라고 생각하면 좋을 거야. 머리 좀 식히고 나면, 좀 나아질 거야. 아, 이왕이면 CT-2에 대해서 한번 사전 조사를 해봐. 해야 할 일은 내가 나눠서 자료를 줄 테니까.”
“네?”
배종대 과장뿐만 아니라 다른 기획 팀 직원들까지 전부 고개를 갸웃했다.
뜬금없는 워크숍 이야기가 황당했다. 그런데 그 일이 최민혁 실장이 지시한 것이라니. 결국, 실적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들의 안색이 좋을 리가 없었다.
* * *
박광민 사원 역시 최근 죽어라고 일을 하면서도 자기 일에 만족하지 못했다. KMP-02가 에플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더 황당한 것은 콜린스의 차세대 모델이 아이컴인 것 같았다.
아이컴의 최근 업데이트 버전은 그에게도 꽤 충격적이었다.
아이컴이란 제품 수준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콜린스 기반으로 태어난 아이컴은 오히려 콜린스보다 더 발전된 모델이었다.
심지어 PC 일체형 모델이었다.
박광민 사원은 아이컴의 최근 사진을 보면서 솔직히 좀 불안했다.
다른 기업의 기획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언제는 콜린스 사업부를 매각한다고 하더니, 정말 매각하는 것은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