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
이원한 실장이 황당해서 소리쳤다.
“이, 이 배를 직원 복지로 내놓겠다는 말입니까?”
최민혁 실장은 피식 웃었다.
“맞습니다. 뭐 어떻습니까. 고생한 임직원들에 대한 혜택입니다.”
하지만 최민혁은 말을 하면서도 과연 KM 전자 임직원 중에 이 혜택을 누릴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고민해 보았다.
다들 지금은 물론, 앞으로 쌓일 엄청난 일거리에 휴가를 쓸 기회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없겠군. 뭐 알아서 하겠지.’
이보다는 오히려 두 사람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를 더 늘어놓았다.
“지금은 두 분 때문에 임시로 대여한 것이고, 곧 사들일 생각입니다. 그런데 전 이런 배 별로 안 좋아합니다. 하지만 임직원들 생각은 다릅니다. 특히 직장인의 로망이 이 초호화 요트 타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니까요.”
“…….”
두 사람 다 최민혁의 배포에 너무 놀라서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임시로 대여한 요트도 결국 자신들 때문이라는 뜻이니까.
최민혁은 씩 웃었다. 자신의 자산 과시를 한 이후에 두 사람의 태도가 바뀐 것을 보고는 슬쩍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솔직히 이번 내사 때문에 국세청을 상대로 한 번 회초리를 들까 생각도 했습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내사라니? 그게 말이 됩니까. 그래도 조용히 넘어간 것 같으니, 이 정도까지만 하겠습니다. 다만 이번 일은 배후가 있겠죠?”
“…….”
두 사람은 입을 쿡 다물었다.
이원한 실장은 대충 짐작하는 사람이 있어서 힐끗, 이동빈 국장을 쳐다보았다.
이동빈 자산과세 국장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가 최명진 회장에게 받은 은혜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평가야 어쨌든 최명진 회장은 어려울 때 자신을 도와준 은인이었다.
최민혁은 포도주로 입가를 축인 후에 툴툴거렸다. 그는 고지식한 이동빈 국장의 태도에 뜻밖에 만족했다. 오히려 쉽게 입을 놀렸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최명진 회장이란 거 압니다.”
“네? 그, 그게…….”
두 사람은 경악했다.
하지만 최민혁은 오히려 부드럽게 말했다.
“국세청 내부 사정은 아니까. 돈은 귀신도 부린다고 하는데, 다 맞는 이야기죠. 딱히 두 분을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기 이원한 실장님이 사전에 말해서 적당히 끝난 것을 고려해서 이번 일은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원한 실장과 이동빈 자산과세국장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최민혁 실장이 보복할까 초조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의외로 깔끔하게 이 일이 끝났다고 확신했다. 때문에 그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두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제안 말이다.
“이 국장님에게 고3인 아들이 있죠?”
“네? 그, 그건 맞습니다만…….”
“아, 미안합니다. 국세청이 절 내사한 것처럼 저도 이 국장님 가족 내역을 어쩔 수 없이 조사했습니다. 국세청에서 공격하면 저도 대응해야 하니까.”
“…네.”
대응이란 말이 곧 가족에 대한 공격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동빈 국장은 가슴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는 새삼 옆에 있는 이원한 실장에게 고맙다는 시선을 보냈다.
최민혁도 그 모습을 보면서 타이밍 맞추어서 나타난 김명준 과장에게서 서류를 받아서 이동빈 국장에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솔직히 금이나 현금을 생각했는데, 어떤 형태로든지 문제가 될 겁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그보다는 이게 나을 것 같아서요. 추천장입니다.”
“네?”
이동빈 국장은 영문을 몰랐다. 그는 서류 안에 든 추천장을 확인했다.
“퀄컴의 어원 제이콥 사장을 비롯한 퀄컴 창립 멤버의 추천장입니다. 모두 다섯 장으로, 아마 MIT에서도 어지간해서는 입학 허가를 받아줄 겁니다.”
‘뭐, 안 되면 MIT에 기부할 생각이니까.’
“……!”
이동빈 국장은 눈을 크게 치켜뜬 채로 추천장의 마지막에 적혀 있는 서명을 확인했다. 심지어 뒤에는 추천장 확인증도 있었다.
대한민국 부모라면 아들 교육열은 빼놓기 힘든 일이다.
그건 이동빈 국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최민혁은 어지간해서는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을 것 같은 이동빈 국장의 입이 딱 벌어진 것을 보자 그제야 만족했다.
“어때요?”
이동빈 국장은 추천장의 가치를 모르지 않았다. 10억이란 돈이 있어도 이런 추천장을 구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저, 정말 이걸 절 주시는 겁니까?”
“물론이죠. 다만 아들에게 유학을 위한 몇 가지 조치는 해야 할 겁니다. 내신 1등급이니 크게 걱정할 바는 아니지만 말이죠. 아, 학자금이나 유학 비용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겁니다. 퀄컴 장학금을 받을 테니까.”
“…….”
그는 충격을 너무 크게 받아서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옆에서 입을 벌린 채 흥분해 있는 이원한 실장에게도 한 가지 서류를 내밀었다.
이원한 실장은 이미 아들이 대학에 갔기에 도대체 뭔가 싶었는데, 서류는 뜻밖에도 게임 개발 투자 제안서였다.
“동생이 게임 벤처를 하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30억 정도면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 게임은 후일 우리 회사에서 요긴하게 쓸 겁니다. 투자 제안서입니다.”
“으음.”
이원한 실장은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지난 달부터 자금을 빌려달라고 계속 자신을 괴롭히는 동생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가 정보통신부 고위직에 있어도 도와주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그 문제가 딱 이거 하나로 해결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자신의 가족을 조사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딱히 내색하지 않았다.
국세청이 한 짓이랑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만약 최민혁 실장 내사를 그대로 계속 진행했다면 저 서류가 자신의 약점을 공격하려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최민혁은 두 사람을 교대로 쳐다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따지고 보면 뇌물은 아닙니다. 두 분의 가능성을 믿고 투자하는 것이니까요.”
“…저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설마 두 분에게 압력을 넣거나 하겠습니까. 다만 지금과 같은 일이 생기면 될 수 있으면 우리 회사를 위해서 노력해 달라는 겁니다. 필요하다면 우리 쪽에 정보를 흘려도 좋습니다. 나머지는 우리 쪽에서 알아서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도저히 최민혁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최민혁은 이번 일이 마무리되자 슬그머니 한 가지를 질문했다.
“좋습니다. 대충 마무리도 된 것 같으니, 한 가지를 더 알고 싶네요. 이번에 저에 대한 내사를 지시한 국세청 고위직은 누구입니까?”
시간이 있었다면 최민혁이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다만 아직 국세청 내부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다.
김명준 과장이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맨땅에 헤딩해서 국세청 내부 정보를 다 알 수는 없었다.
이동빈 국장은 잠깐 머뭇거렸지만, 굳이 숨길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자신 역시 이번에 아차 했으면 내사를 잘하든 못하든 최민혁 실장에게 목이 날아갔을 테니까.
“국세청 본청 강상혁 조사국장입니다.”
“강상혁 조사국장이라…….”
대충 배후를 들은 최민혁은 나이가 든 두 사람을 상대로 더 대접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을 조용히 돌려보냈다.
최민혁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동빈 국장은 그나마 괜찮은 인물이다. 그런데 강상혁 조사국장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국세청 본청 인물이라, 예상 밖이군. 하긴 국세청에서 날 벼르고 있다는 소리는 계속 나왔으니까. 할아버지가 경고도 했지. 그들 중의 한 명이란 이야기군.’
“김 과장님, 강상혁 조사국장에 대해서 한번 조사를 해보세요.”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김명준 과장이 떠나는 모습을 보다가 ‘강상혁’이란 이름과 관련해서 인생 1회 차에서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을 떠올렸다.
“아, 서안 유통 쪽을 조사해 보세요.”
“…네.”
김명준 과장은 의문이 많았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서안 유통을 조사해 보면 답이 나올 테니 말이다.
* * *
서안 유통은 주로 가전기기 중고를 필리핀이나 말레이시아 등지에 유통하는 업체이다. 무리수를 두지 않은 채 바닥부터 탄탄한 신뢰를 얻은 덕분에 가파른 성장을 거듭했다.
올해만 해도 무려 1,400억이 넘는 매출을 기록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호사다마라.
올해는 운이 좋지가 못했다.
갑작스러운 세무조사가 문제였다.
세무조사 과정에서 500억대의 탈세 의혹이 불거진 것이었다.
서안 유통은 마치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내부가 시끄러웠다.
국세청의 고발에 따라서 검찰 조직이 역외 탈세로 본격적인 수사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안 유통이 역외 탈세를 할 것은 사실인데, 그 규모가 제법 컸다.
이게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서안 유통 측에서 절대로 국세청이 세무조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최민혁이 김명준 과자의 조사 결과에 따라서 서안 유통 사장 조중국을 만난 것도 이런 이유였다.
“최민혁 실장님을 이렇게 뵈게 되다니, 기분이 묘합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방문인가요?”
“아, 아닙니다.”
조중국 사장 안색은 초췌했다. 국세청에 이어서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았기 때문이다. 실상 사무실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검찰이 와서 닥치는 대로 자료를 다 긁어 갔기 때문이었다.
물론 서안 유통이 잘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업무를 마비시킬 정도로 움직인 검찰의 행동은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때문에 최민혁 실장의 방문 연락을 받고는 제대로 대접하지도 못했다. 솔직히 최민혁 실장이 이곳에 올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조중국 사장은 탄식했다.
“솔직히 누구를 탓할 문제는 아닙니다. 제가 다 잘못한 거죠.”
하지만 최민혁은 좀 다르게 생각했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무, 무슨 말씀이신지.”
실상 그가 최민혁을 만난 것은 혹시라도 KM 전자 중고 물량이나 공장 내의 불량품을 헐값에 공급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중고 콜린스 물량은 꽤 매력적인 제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줄은 몰랐다.
최민혁은 씩 웃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국세청에 제법 뇌물을 준 것으로 압니다. 세무조사 무마 핑계죠. 이미 이 거래는 10년이 넘은 것으로 압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조중국 사장은 흔들리는 눈으로 최민혁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설사 최민혁 말이 사실이라도 시인해 버리면 뇌물죄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뇌물 금액이 적지 않아서 자칫하면 최고 형량을 받을 수도 있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제가 알기로 그 뇌물은 작년에 그만둔 강은택 이사 때문으로 압니다. 조중국 사장님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셈이죠.”
그는 눈을 감았다. 설마 강은택 이사 이야기가 나올지는 몰랐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잘 생각을 해보세요. 이대로 가면 검찰에서 일방적으로 서안 유통을 공격할 겁니다. 이럴 때는 차라리 논점을 다른 방향으로 트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뇌물을 받은 국세청 직원 말입니다. 제가 알기로 제법 고위직인 것으로 압니다. 그자를 이용해서 물타기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은 방법입니다. 사건을 키우면 국세청에서 차선책을 찾을 겁니다. 그때 그쪽하고 협상을 치면 이번 세무조사도 어렵지 않게 넘길 수 있어요.”
“…그, 그게 가능할까요?”
“돈만 많으면 못 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필요한 소송비용은 제가 다 대겠습니다.”
조중국 사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최민혁 실장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사태를 키워서 불을 붙이면, 국세청이 지금처럼 날뛰지 못할 것이다. 국세청이 나서준다면 검찰 수사도 제동이 걸릴 것이다.
다만 그가 이해가 안 되는 점은 최민혁 실장이 왜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느냐 하는 거다.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전 최민혁 실장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릅니다. 솔직히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 국세청 실무자가 저를 노렸습니다. 그 정도면 답이 되겠습니까?”
조중국 사장은 한국에서 돈이 많은 인간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 그의 관점에서 본다면 최민혁 실장을 건드린 놈은 미친놈이었다.
“네? 진짜 최민혁 실장님을 노렸다고요?”
최민혁은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