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523화 (523/1,021)

#523.

“후유, 내가 늙었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아닙니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현역에서 뛰어다니고도 남습니다.”

“그런 말을 할 것 없다. 널 부른 것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다.”

“영란 누나 정략결혼 문제 말입니까?”

최용욱 회장도 골치 아픈 가정사 문제는 우선 뒤로 미루었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꾸나.”

“하면 무슨 일 때문입니까?”

“계열사 매각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은 그제야 장승일 실장이 내미는 보고서를 받아 최민혁에게 건넸다. 옆에서 듣고 있던 권재홍 비서실장은 올 것이 왔다는 얼굴이었다.

KM 그룹 계열사 매각 문제는 올 한 해 끊이지 않고 나왔다.

1차 구조조정 과정이 끝난 후에도 이 일은 계속 말이 나왔다.

그만큼 설마 최용욱 회장이 구조조정을 이미 끝낸 기업뿐만 아니라 탄탄한 매출액이 있는 멀쩡한 계열사까지 매각할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대표적인 곳이 KM 옵틱스다. 이 회사는 이미 적자 사업부를 다 정리했다. 불필요한 직원도 전부 다 잘라내 버렸다.

그런데 이제는 그 KM 옵틱스마저 정리 대상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인생 1회 차에서 KM 옵틱스의 미래를 잘 아는 최민혁은 합리적인 결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다른 계열사 목차들도 쭉 살폈다.

‘대부분이 IMF 기간 정리되는 계열사네. 확실히 안목은 좋으셔. 그래도 괜찮을까. 숫자가 너무 많은 것 같은데…….’

당장 목차에 있는 회사 숫자는 무려 15개를 넘었다.

KM 그룹 전체 계열사 숫자를 고려하면 40%에 가까운 수치다.

최민혁은 기대 어린 시선을 한 최용욱 회장을 쳐다보았다.

“진심으로 이렇게 진행하실 생각입니까?”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

“아니, 그러면 제 조언에 따라서 정하겠다는 말입니까?”

최용욱 회장은 기묘하게 웃었다. 그는 이제까지 최민혁에게 놀라기만 하다가 오히려 한 방 먹였다는 생각마저 했다.

“겁나느냐?”

“아니, 할아버지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계열사 3~4개 정도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10개가 넘는 계열사라면 상황이 다르죠. 그리고 아직 이 숫자가 확정된 것도 아닌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이건 네 의견이었다.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뽑아놓은 것이니까.”

최민혁은 갑작스러운 최용욱 회장의 태도 변화에 혀를 찼다.

“아무리 그래도 순서를 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아마 이 정보가 외부에 새어 나간다면 노조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도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 일을 진행하려 한 건 아니었다.

“내 생각은 달라. 이미 1차 구조조정 과정에서 대다수 계열사는 흑자 전환을 하거나, 이른 시일 안으로 수익성이 대폭 개선되었다. 그렇다면 계열사 임직원들도 차라리 간섭받는 계열사 사장보다는 독립 회사의 보스가 되고 싶어 할 거다. 그게 아니면 자본이 두둑한 다른 대기업 계열사가 낫지. 김 회장이 이들에게 충분히 투자를 할 생각이니까. 그 정도는 해줘야지. 그게 신뢰를 잃지 않는 방법이니까.”

“흠.”

최민혁도 최용욱 회장의 의견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다른 직원들이 정말 그럴까에 대해서는 의문이었다. 그는 힐끗,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장승일 실장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보면 계열사 생사부를 기록한 사람이 그였기 때문이다.

장승일 실장은 입을 쿡 다문 채 아무런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다.

최민혁은 여전히 따가운 최용욱 회장의 시선에 보고 있던 보고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건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네가 결정하라고 하지 않았다. 자문하는 것이니까.”

그는 피식 웃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원한다면 KM 산업 지분이라도 주마.”

“…전 솔직히 KM 산업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도 만만하지 않았다.

“원래 있던 2%에, 저번 TRS 신입 사원 문제를 해결해 주고 6%를 챙겼지. 거기에 장내 매입까지 해서 모두 11%나 들고 있는 녀석이 할 말은 아니구나.”

“아, 그거야 거래에 관한 결과일 뿐입니다.”

“쯧,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마.”

최민혁은 최용욱 회장이 넌지시 분위기를 만들자 고민에 빠졌다. 실상 이제 장내 주식으로 얻을 수 있는 KM 산업 지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가 굳이 최문경 부회장을 정리하는 일을 복잡하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KM 산업은 특히 최용욱 회장을 비롯한 최용욱 회장의 우호 세력이 지분을 다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벽이 생각보다는 공고해서 지분을 얻을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파고들 틈이 없어. 할아버지가 사람 보는 눈은 최고라니까.’

더욱이 IMF가 지나면 똥값이 되는 주식인데, 무리할 이유는 더 없다.

“좋습니다. 한번 검토는 해보겠습니다.”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어이가 없었다.

“벌써 가려고?”

“이 일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제대로 자문을 해볼 생각입니다. 다만 정말 멀쩡한 계열사도 매각할 생각입니까?”

“그래. 사실 DL 그룹의 김상구 회장이 넌지시 제안을 해왔다. 계열사를 정말 매각할 생각이 있다면 자신에게 팔라고 했어. 그런데 민혁이 네 녀석의 의견대로라면 그 기업의 미래가 썩 좋은 편은 아니니까.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했다.”

최민혁은 내심 환호했다. 설마 최용욱 회장이 저런 수법을 사용할 줄은 몰랐다. 자신이 해도 저렇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건 정말 놀랍군요.”

“아무래도 KD LCD 이후에 서로 주고받은 것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대로 한번 들여다보고 나서 바로 대답하겠습니다.”

“언제까지 되겠느냐?”

“다음 주면 충분합니다.”

“그래. 부탁 좀 하마.”

* * *

최민혁이 말한 일주일은 단순히 그냥 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X 리포트에 한해서 조성돈 팀장은 이제 전문가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해박했다. 그는 때문에 X 리포트 사태 이후에도 계속 부족한 부분을 메꾸었다.

그 내용 중에는 KM 그룹 계열사 정리에 대한 것도 있었다.

대부분은 최민혁 자신이 인생 1회 차 기억을 토대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IMF 이후에 이들 KM 계열사가 어떤 식으로 무너지는지 그 취약점을 잘 알기에 가능한 일이다.

조성돈 팀장은 다만 이 안건과 관련해서 걱정을 드러냈다.

“정말 실장님 말씀대로 되겠습니까?”

“이제까지 이 X 리포트를 계속 연구한 분이 할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성돈 팀장은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솔직히 전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지 않습니까. 이미 X 리포트에서 한 가정 몇 가지는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대세에는 영향을 주기 어려울 겁니다.”

“그렇다고 확실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평소와는 다른 조성돈 팀장 태도에 최민혁은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솔직히 좀…….”

“부담스럽다? 정리해야 할 기업 임직원 숫자가 걱정되어서 하는 이야기입니까?”

“네.”

“쯧, 걱정하지 마세요. DL 그룹에서 대부분 계열사를 인수할 테니, 당장 상황은 지금보다 더 좋아질 겁니다.”

“…구조조정을 하지 않을까요?”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이미 1차 구조조정이 끝난 상황인 데다 먹기 좋도록 차려놓은 밥상입니다. 아마 김상구 회장이라면 웬 떡이냐고 난리를 칠 겁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다는 말입니까?”

“지금은 그렇죠. 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장담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그건 우리 KM 계열사로 있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실장님이라면 그들을 구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란 질문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최민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가 모든 기업을 다 구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각자 살아남아야 하는 겁니다. 사실 1차 구조조정에서 이미 많은 부분을 고려해 줬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생존을 연구해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의 태도에 혀를 찼다. 그도 물론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구조조정 대상인 계열사가 당장 망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 2년은 버티겠지?’

* * *

최민혁은 일단 조성돈 팀장을 통해서 검토된 추가 보고서를 받았다.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몇 가지가 더 추가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기획 팀도 최근 실력이 일취월장한 덕분인 듯했다.

보고서 내용은 꽤 완성도가 높았다.

최용욱 회장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계열사 매각 관련 보고서를 보면서 만족했다. 그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 잘 체크되었기 때문이다.

“수고했다.”

“천만에요.”

“아니, 나도 결정 내리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어. KM 인스트루먼트까지 정리해야 하나 싶었으니까.”

“하지만 반도체 장비는 역시 전문 장비 업체에 맡기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시스템 업그레이드 때문에 그래야겠지.”

반도체 장비도 꾸준하게 업그레이드된다. 그런데 이 비용이 절대 만만치 않다. 중소기업이 하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다.

KM 인스트루먼트 역시 엄연히 한계가 존재했다. 지금은 그럭저럭 잘 꾸려가고 있지만 이게 언제까지 통할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이 보고서는 어디까지나 조언에 불과합니다.”

“그래, 잘 알겠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솔직히 지금은 최용욱 회장이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렇다고 최용욱 회장이 자신에게 베푼 것까지 잊지는 않았다.

“앞으로 호출은 자제를 좀 해주십시오. 저도 상당히 바쁩니다. 만날 사람이 많습니다. 제가 만날 사람들도 바쁜 사람들이고요.”

“ETRI 오현종 박사를 말하는 거냐?”

“그분도 있고요.”

최용욱 회장도 잠깐 고민하다가 불쑥 한 가지를 질문했다.

“그 CDMA 사업 말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유럽 쪽은 이미 TDMA가 다 장악했어. 리스크가 크지 않겠느냐?”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미국 정부는 결코 TDMA에 시장을 내줄 생각이 없습니다.”

“하긴.”

최용욱 회장도 최민혁의 주장을 순순히 인정했다. 미국 정부 때문에 한국 정부 역시 CDMA를 적극 고민하는 중이다.

만약 CDMA에 문제가 많다면 TDMA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정부 기관 내에서 말이 많았다.

그런데 그런 일도 최민혁이 나서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ETRI에서 진행하는 CDMA 관련 연구 내역은 정보 통신부에서도 지켜보고 있으니까. 정확히는 정보통신정책실 이원한 실장이 이 일을 긴밀하게 지켜봤다. 다만 이들이 굳이 끼어들지 않은 것은 한 사람에게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이었다.

‘그것참.’

최용욱 회장은 최근 이원한 실장을 만나서 정보 통신부 분위기를 들었다. 그는 때문에 신기한 눈으로 손자 최민혁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도 정부 고위 관료가 대기업 기획실장의 눈치를 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내가 CDMA는 잘 모르지만, 민혁이 네 녀석은 어떻게 그 분야도 그렇게 잘 아는지 모르겠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이라…….”

진실을 밝히기 싫어하는 손자를 보자 최용욱 회장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일은 그렇다고 하자. 하지만 앞으로는 매사에 처신을 똑바로 하는 것이 좋아. 국세청, 공정위를 비롯한 정부 기관에서 널 지켜보고 있다.”

“협박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것과는 달라. 정부에서는 너에게 얻고 싶은 것이 많아. 그렇다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 배를 가를 수는 없지. 네가 거위라는 말은 아니다만.”

최민혁은 최용욱 회장의 태도가 확실히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용건이 끝났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한 가지만 더 묻자. 넌 한부 그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미 들어서 알겠지만, 최영란 혼처와도 관련이 있다.”

최민혁은 굳이 고민하지 않았다.

“한부 그룹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할아버지가 더 조사를 해보면 알게 될 겁니다. 누나 혼사 문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 일은 모르니까요. 다만 제가 조사한 바로 최해진 본부장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최해진 본부장도 결국 재벌 3세로, 한부 그룹의 이권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거라는 사실입니다. 과연 그가 한 여자를 위해서 모든 것을 쉽게 포기할까요?”

“경영 승계 구도를 말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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