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
안산 공장 내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특히 임직원들을 위한 공간이 추가로 늘어났다.
마치 사내 공원처럼 바뀐 곳을 오가는 안산 공장 임직원도 꽤 있었다.
다만 그들도 최민혁 실장 일행을 보자 알아서 거리를 뒀다.
최민혁도 굳이 그런 이들을 말리지 않았다. 그는 사내 휴게실 한쪽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쭈삣거리면서 눈치를 보는 권우영에게 자리를 권한 후에 질문했다.
“요즘 공장 분위기는 어때요?”
“아, 뭐 늘 똑같습니다.”
“그럴 리가요. 벌써 몇 개월 동안 공장에서 생산만 했는데, 불만이 없을 리가 없죠.”
“아닙니다.”
“아, 그렇게 눈치 볼 필요는 없어요. 제가 바보도 아닌데,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사실 권우영 씨는 강준석 팀장의 팀원이었기에 이렇게 찾은 겁니다. 아무래도 말하기 좋은 상대이니까.”
권우영은 그제야 긴장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갑자기 자신을 찾았다고 믿지 않았다. 뭔가 변화를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하면 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으시군요.”
“맞아요. 사실 신입 사원들 사이의 내부 분위기를 알고 싶은 거니까.”
“……?”
권우영도 처음에는 최민혁 실장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굳이 장난 삼아서 신입 사원을 마구잡이로 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노할 테니까.
화가 난 신입 사원이 보일 반응은 뻔했다. 자신의 속내를 다 털어놓을 테니까.
‘설마 가지치기일까?’
권우영은 더 긴장했다. 자칫 괜한 말실수를 했다가 피를 볼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민혁은 김명준 과장이 가져온 청량음료 하나를 권우영에게 주고, 자신도 캔을 따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김정현 그 친구를 걱정하는 것 같은데, 저도 다 보는 눈이 있어요. 듣는 귀도 있고. 날 얕잡아 보면 곤란합니다.”
권우영은 그제야 화들짝 놀랐다.
“그,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김정현 그 친구와 관련된 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한번 말을 해보세요.”
권우영은 이미 최민혁이 다 알고 왔다는 것을 깨닫자 결국 김정현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다만 과장하지는 않았다.
감정이 상한 것도 있었지만 그런 개인적인 부분은 뺐다.
최소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야기했다.
최민혁은 말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로서는 결코 원한 바가 아니었다. 김정현이 중심이 되어서 안산 공장 내에 세력을 만들기를 바랐다.
‘그랬다면 쳐내기 좋을 텐데…….’
이제는 곤란했다.
권우영이 바로 그 점을 지적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한 번쯤은 실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정현과 같이 어울려 다닌 친구들은 다들 회사 사정을 잘 몰랐습니다. 그저 김정현이 한 거짓말에 속은 것뿐입니다.”
최민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강도에게 속아서 칼침을 놓고, 난 거짓말에 속았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소름이 돋는 말에 권우영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설마 최민혁이 이런 이야기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냥 굴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진짜로 썩은 가지 치기를 하려 한 것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잔뜩 긴장한 권우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준 후에 몸을 돌렸다.
“조만간 변화가 있을 겁니다. 회사 조직도 많이 바뀔 테니까. 이곳 안산 공장은 휴가 왔다고 생각하고, 잘 지내세요.”
“아, 알겠습니다.”
권우영은 최민혁이 수행원의 경호를 받으며 떠나는 모습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최민혁의 말이 그냥 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도 일방적으로 사원들을 안산 공장에 밀어 넣고 마구잡이로 굴린 최민혁 실장을 의심할 때가 있었다. 사람인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의 주목을 받을지는 몰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최민혁이 한 지시는 시련에 가까웠다.
물론 의미 없는 노동은 결코 아니었다.
KMP-01, 콜린스의 생산을 하다 보면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내릴 최민혁의 지시는 이런 일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강 팀장이 그런 경우이니까.’
권우영은 드디어 자신도 뭔가 해야 한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이 과연 그 일을 잘할 수 있을지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다.
이 모습을 본 권우영과 알고 지내는 신입 사원이 우르르 몰려와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권우영의 머릿속에는 그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 마지막으로 한 말만 머릿속에 가득할 뿐이다.
‘도대체 무슨 조직개편이 있는 걸까? 하긴 지금 우리 회사가 인수한 계열사를 보면, 이전 회사 조직과는 판이하니.’
“야, 권우영, 뭐야? 왜 대답을 안 하는 거야?!!!”
“아, 미안.”
그는 뒤늦게 신입 사원 동기의 시선을 받았다. 하지만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덕분에 혼자 정보를 독점한다는 괜한 오해만 받았다.
‘젠장.’
* * *
최민혁은 안산 공장을 둘러보면서 직접 신입 사원 분위기를 살핀 것만으로 자신이 계획한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퀄컴 인수는 계획한 일정과 달랐으니.’
퀄컴 인수는 사실 계획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시기가 맞지 않았다.
다만 퀄컴 인수 덕분에 KM 전자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그러니 신입 사원 중에 불만이 있는 사람이 있어도 도저히 KM 전자에서 수작을 부리지 못하는 것이다.
최민혁으로서는 꽤 번거로운 일이다. 감시 대상 명단에 오른 이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쉽게 판단하기 어려웠다.
‘다시 한번 손을 써보면 답이 나오겠지. 정 아니면 이중 첩자로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신입 사원에게도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은 모를 테니까.’
그는 골치 아픈 일을 잠시 덮었다.
대신 이제는 최용욱 회장의 계속되는 전화를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사실 최용욱 회장이 자신을 밀어준다면 가장 즐겁겠지만 그렇게 되기는 힘들다는 것을 잘 안다.
‘물보다 진한 것이 혈연이니까.’
더욱이 자신은 서자다.
이런 점도 은근히 무시하기 힘들다.
결국 자신이 KM 그룹 지분을 얻는 수 있는 데는 한계가 명확했다.
아니, 그렇다고 자신의 역량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무리수를 둔다면 얼마든지 공격적인 대응이 가능했다.
다만 굳이 그렇게 무리수를 둘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이제야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된 셈이다.
이전까지는 일방적으로 자신이 밀렸지만, 지금은 자신이 갑이니까.
‘너무 고민하지 말고, 그냥 닥친 상황에 따라서 대응하자.’
* * *
최민혁은 그렇게 대단하게만 느졌던 KM 그룹 본사 빌딩이 오늘따라 그다지 높지 않다고 생각했다.
“꼬마 빌딩 같네요.”
“사람들이 20층이 넘는 빌딩을 꼬마 빌딩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내 눈에는 너무 낮게만 보여요.”
“그건 실장님 눈이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합니까?”
김명준 과장의 표정은 이전에 늘 긴장하던 모습과는 달리 부드러웠다.
“이제는 남의 눈치를 볼 이유가 있습니까. 설사 상대가 최용욱 회장님이라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듣기 좋은 칭찬입니다.”
늘 최민혁 옆에서 온갖 일을 다 하는 김명준 과장은 부드럽게 말했다.
“기분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
“솔직히… 좋네요.”
당당한 자신의 모습이 좋았다.
자신을 보자 KM 그룹 본사 1층 로비를 오가는 백 명의 임직원들이 모세가 바다를 가른 것처럼 일제히 갈라지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존경과 두려움이 가득한 KM 그룹 임직원들의 모습은 최고였다.
그들이 보이는 모습은 과거와는 격이 달라졌다.
최민혁이 자신의 인사권까지 쥐고 흔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최민혁 자신이 KM 전자에서 보여준 리더십 때문인지 심각하게 반감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기대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차라리 최민혁 실장이 KM 그룹 본사 경영에 손을 쓴다면 KM 그룹이 달라질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딱 좋아. 이제는 첫째 큰아버지도 KM 그룹 내에서 마음대로 전권을 휘두르지 못할 테니까.’
본사 건물 입구에는 놀랍게도 장승일 실장이 기조실 직원과 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자꾸 번거롭게 해서 말입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는 이제야 공식적으로 장승일 실장의 환대를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이전과는 다른 행보다.
즉, 이제 KM 그룹 후계 승계자 중에 한 사람으로 제대로 인정받은 셈이다.
“회장님은 어디 계세요?”
“기조실에서 기다리십니다.”
최민혁은 장승일 실장의 안내를 받아서 엘리베이터를 타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회장실이 아니라 기조실 말입니까?”
“최영란 이사의 일 때문입니다.”
“아, 정략결혼.”
“그런 셈입니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안 하세요?”
“최문경 부회장 때문에 쉽게 반대할 일은 아니니까요. 더욱이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한부 그룹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과연.”
최민혁은 혀를 찼다. 아무래도 혼사 문제로 얽힌다면, 상대를 살피기에는 서로 좋다. 딱히 상대가 거부감을 가질 일은 아니니까.
더욱이 최문경 부회장을 이용하면 한부 그룹 깊숙한 곳까지 살필 수도 있었다.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X 리포트의 허실을 좀 더 파악하려는 거네.’
* * *
다시 만난 최용욱 회장은 기조실 소파에 앉아서 최민혁을 환대하지 않았다. 최용욱 회장이 단단히 토라진 것이다.
최민혁 역시 가볍게 인사만 한 후에 맞은편에 앉아서 묵묵히 최용욱 회장의 말을 기다렸다.
기조실 직원은 다들 전전긍긍했다. 그들은 자료를 내주면서 혹시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염려하는 얼굴이었다.
다행히 장승일 실장이 교통정리를 했다.
그런데 뜻밖에 권재홍 비서실장이 슬그머니 나타난 것이다.
최민혁은 비서가 내온 차를 즐기면서 입을 쿡 다문 채 눈치만 보는 두 사람을 힐끗 살폈다. 그는 이 모습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좋네. 다들 이래서 회장을 하려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정확히는 다들 최민혁 눈치를 볼 틈이 없었다.
KM 전자 기획실의 임직원들은 다들 일에 치여서 억 소리를 내고 있었다.
퀄컴 인수 후에는 상황이 더 끔찍하게 변했다.
CDMA와 관련된 일이 쏟아지자 다들 공부하랴, 일하랴 피똥을 싼 것이다.
그런데 이건 그들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홍보 팀, 마케팅 팀, 영업 팀 역시 다들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일했다.
그들은 이제까지 내수 시장을 다루는 기업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세계시장을 고민해야 했기에 단 한순간도 쉴 틈이 없었다.
그렇게 죽어라고 일을 해야 가까스로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퇴근이 자정을 넘기는 것은 늘 있는 일이다.
새벽 2, 3시는 일상이었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일이 줄지를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난 일은 국내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미국 내의 일이 너무 많았다.
특히 강준석 팀장은 뭔가 그리 좋은 건지 미국 전역을 뛰어다니면서 일감을 챙겼다.
기획 팀은 이미 강준석 팀장에게 뒤처진다는 위기감을 느껴서인지 철저하게 강준석 팀장이 내건 제안을 분석하기 바빴다.
그러니 최민혁의 회장 놀이에 어울려 줄 정신적인 여력이 없었다.
‘확실히 좀 미안할 정도로 일을 많이 시켰어. 으음, 그러면 이쪽은 한가해서 그런가?’
최민혁은 슬쩍 장승일 실장과 그의 앙숙인 권재홍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차가운 한기에 몸을 움찔 떨고 말았다.
다행히 최용욱 회장이 두 사람을 살려줬다.
“뭐 하는 거냐? 왜 애먼 임직원을 괴롭히는 거냐?”
“아, 아닙니다.”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사실 KM 그룹 본사가 너무 한가하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니까.
“할 말이라도 있는 거냐?”
잠깐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굳이 이런 일까지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룹 본사 분위기가 너무 한가한 것 같습니다.”
“한가?”
“네, 최소한 우리 KM 전자 본사는 이와 같지는 않습니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조용히 복도를 걸어 다니는 직원은 없으니까요.”
“허허허.”
최용욱 회장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한 방 맞았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확실히 최민혁의 모습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아직 이 녀석이 KM 전자의 기획실장이 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체감상 한 5년은 지난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