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최영란은 최문경 부회장의 면상을 보자 발끈했다.
“전 여자가 그렇게 꼬이는 남자는 딱 싫어요!”
“…….”
최문경 부회장은 장녀의 반응에 화가 너무 나서 오히려 허탈하게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최영란 역시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억지인지 스스로 느껴서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김이경 여사는 분노가 극에 달한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데 집에는 두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외부 출장을 갔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최용욱 회장이 이들이 싸우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큰 충격을 빠져서인지 안색이 바위처럼 굳어 있었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혼사라니?”
“아, 아버님?!”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라.”
안으로 들어선 최용욱 회장 안색은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그는 안 그래도 최문경 부회장을 벼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일이 설마 최영란의 혼사 문제와 엮일 줄을 상상도 못 했다.
그 자신에게 일언반구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최문경 부회장과 김이경 여사는 크게 당황했다. 그들은 최문경 부회장이 출장 가서 오늘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설마 나 몰래 영란이 혼사를 밀어붙인 거냐?”
김이경은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다행히 괜찮은 핑곗거리를 떠올렸다.
“그, 그건 아니에요. 아, 그, 그게 말이죠. 영란이 성격은 아버님도 잘 아시잖아요. 워낙에 성격이 괄괄해서 도저히 만남을 주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저희끼리 만나게 한 후에 어느 정도 결정이 나면 아버님에게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정말이냐?”
“정말입니다. 제가 아버님에게 거짓말할 이유가 있습니까?”
“…….”
실제로 최영란은 입을 열지 못했다. 김이경 여사가 직접 찾아와서 협상한 것은 사실이니까.
김이경 여사가 내용을 많이 생략해서 그렇지 일부는 사실이었다.
최영란 역시 외가 쪽 유산 문제 때문에 김이경과 어느 정도 타협을 봤다.
그녀는 때문에 딱히 김이경 여사가 한 말에 특별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최용욱 회장이 그 모습을 봤다. 다만 크게 당황해서 식은땀을 흘리는 최문경 부회장을 보자 뭔가 더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 세세한 내막까지 알려고 하지는 않았다.
혼사 문제는 또한 큰며느리 김이경 여사가 해야 할 일이기도 했으니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옆집이 떠들썩할 정도로 소리치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 집안 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외부로 알리고 싶으냐?”
“아, 아닙니다.”
“좋아. 그건 그렇다고 하자. 영란이 혼사라면 누구를 만나는 거냐?”
“그, 그게…….”
김이경 여사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최문경 부회장 역시 크게 당황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사실을 알릴 수가 없었다. 더욱이 최영란이 이 혼사를 극구 반대를 하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최영란 이사는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기회에 진실을 다 폭로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최용욱 회장은 도저히 그냥 이 일을 넘길 수가 없었다.
“난 씻고 올 테니, 셋 다 당장 서재로 가서 기다려!!”
“…네.”
* * *
최영란은 잔뜩 긴장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최용욱 회장의 영향력에 눌려서 살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다짐해도 그게 잘 먹히지 않았다.
간단히 씻고 나온 최용욱 회장은 평소와는 다른 눈으로 최영란을 살폈다.
혼사 문제가 나오자 자연스럽게 최영란에 대한 기조실 평가 자료를 떠올렸다.
평가는 S 등급이다.
최문경 부회장보다 오히려 나은 평가였다.
아니, KM 그룹 전 직원을 통틀어서 최고의 평가였다.
그로서는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문경이 막내 정수는 나이가 너무 어리고, 훈열이 녀석 첫째 최민수 그놈은 오기가 없어.’
생각해 보면 KM 가문 재벌 3세는 중에는 인재가 없는 셈이다.
그나마 스스로 한국대에 입학한 최민혁이 나았다.
최용욱 회장이 단순히 사심으로 최민혁을 밀어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도 최민혁이 변이를 거듭해서 그렇게 괴물로 성장할지는 몰랐다.
이젠 그 자신도 최민혁에게 큰소리칠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 퀄컴을 둘러싸고, ETRI와 최민혁 실장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황당 그 자체였다.
그는 장승일 실장에게 보고를 받으면서 몇 차례나 재확인했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드러난 내용이 더 소름 끼쳤다.
최민혁이 자신도 쉽게 손을 대기 어려운 실력자를 상대로 해서 보여준 지도력은 최용욱 회장에게도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심지어 이 일은 주가에도 반영되었다.
무려 40만 원이 넘는 KM 전자의 주가가 여전히 굳건했다.
차익 물량이 나올 때면 늘 ETRI 관련 CDMA 기사가 나왔기 때문이다.
최근 ETRI 내에서 이루어진 시범 실험과 관련된 뉴스가 나올 때면 차익 매물 때문에 37만 원대까지 떨어졌다가도 40만 원을 금방 회복했다.
‘덕분에 KM 전자 공매도 물량이 죄다 사라졌으니까.’
실로 황당한 일이었다.
이 공매도 주도 세력이 세계적인 투자 은행인 샐로먼 브러더스이기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이 아는 바로는 KM 그룹은 이들 세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민혁이 이놈은 내가 평가한 수준을 뛰어넘었어.’
그는 덕분에 이제까지와는 달리 KM 전자의 과거 이력을 철저히 분석했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경영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흑자 계열사 정리도 그 과정에서 나온 일이다.
이번 출장도 아큐텍, KM 인스트루먼트를 포함해서 계열사를 실사할 목적이었다.
최민혁 덕분에 눈이 높아져서 과거에는 그렇게 아끼던 계열사조차 이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정리하는 것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이 최민혁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최영란 이사는 그 최민혁이 직접 거론한 이름이다. 이제 최영란을 여자라고 얕잡아 봐서는 곤란했다.
혼사 문제 이전에 매듭지어야 할 일이 있었다.
“AD 설계가 괜찮더구나.”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았을 뿐입니다.”
최용욱 회장은 평소의 고압적인 태도와는 달리 따스하게 말했다.
그는 대신 한껏 긴장한 최문경 부회장에게 다시 눈총을 줬다.
“내 생각은 달라. 더욱이 그룹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잖아. 네 혼자 힘으로 이룩한 성과이니, 자부심을 느껴도 좋아.”
“…감사합니다.”
생애 첫 칭찬.
그녀에게는 꽤 쇼킹한 일이었다.
최영란은 영문을 몰라서 최용욱 회장의 눈치를 봤다.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최용욱 회장이 저렇게 따뜻한 태도를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거실에서 분노했던 그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최용욱도 그 점을 시인했다.
“솔직히 내가 남녀 차별 한 것은 실수였다는 점을 인정하마. 우리 장녀가 이렇게 의지가 대단한지는 몰랐으니까.”
“…네.”
“사실 너 정도의 능력을 발휘했다면 나도 후계 문제를 다시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네 능력은 최근에 와서야 빛을 발했다. 내가 아무런 결과도 없이 너를 인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최영란은 대답하면서도 최용욱 회장이 미친 게 아닌가 싶어서 눈만 끔뻑거렸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은 그녀의 특이한 행동에 개의치 않았다. 장승일 실장이 최근 다시 검토한 보고서 내용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이 한 말과 행동은 결코 우습게 여길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AD 설계도 무시할 기업은 아니었다.
“좋다. 이제 와서 지난 일을 가지고 뭐라고 해봐야 늙은이의 잔소리지. 그건 그만하마. 원래 너에게 한 가지 제안하려고 했다. 좀 더 시일을 두고, 신중하게 결정하려 했다. 그런데 혼사 문제까지 나왔으니, 지금 이야기하마.”
이미 최민혁에게 어느 정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분명 최민혁이 그냥 한 말이 아닐 것이다. 최소한 최용욱 회장과 이야기가 되었을 테니까.
“설마 AD 설계와 관련된 겁니까?”
“그래. AD 설계가 자리를 잡은 것은 나도 안다. 아마 내년부터 꾸준히 매출이 늘 거야. 하지만 그 이상은 힘들다. 성장에 한계가 있어.”
“그건 제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그래. 지금의 너라면 믿으마. 시간이 답이겠지. 한 걸음 한 걸음 성장하는 게 좋지. 하지만 그룹 차원에서 도움을 받으면 그 기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어. 심지어 네 역량 이상으로 파이를 키울 수 있어!”
최영란은 진짜 깜짝 놀랐다. 그녀 역시 이 부분을 잘 알았다. 그래서 최민혁의 도움을 받은 것이니까. 그런데 그걸 최용욱 회장에게 들을지는 몰랐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 제안을 받기 어렵습니다.”
“…원하는 게 뭐냐?”
최영란은 최용욱 회장이 자신의 제안에 수긍하자 고개를 갸웃하다가 반사적으로 최민혁이 한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AD 설계의 미래 가치에 대응되는 KM 산업 지분이라도 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안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냥 찔러본 말이다.
설마 이 조건을 들어줄까 싶었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는 최문경 부회장의 몸이 움찔했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은 과거의 그 최용욱 회장이 아니었다. 그는 최민혁이 에플과 퀄컴을 인수하는 모습을 보고서 큰 충격을 받아서 심적으로 많이 고민했다. 최민혁이 고평가한 AD 설계를 무시하지 않았다.
“좋다. KM 산업 지분 9%를 주마. 그 정도라면 꽤 괜찮은 거래일 거다.”
옆에서 눈치만 보면서 끼어들 타이밍만 노리던 최문경 부회장은 상상도 못 한 이야기에 경악해서 버럭 소리쳤다.
“아버지!!”
최용욱 회장이 분노한 호랑이처럼 소리 질렀다.
“넌 닥쳐!”
그 위세가 얼마나 살벌한지 최문경 부회장조차 몸을 움찔 떨었다.
“그,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저에게는 인색하게 굴면서 왜 영란에게 이렇게 호구처럼 퍼주려고 하는 겁니까?”
“뭐가 퍼준다는 소리야? AD 설계 기업가치는 알면서 나 하는 소리야?!”
최문경 부회장은 실제로 AD 설계를 강탈하기 위해서 밑바닥부터 끝까지 다 조사했다. 이 기업의 취약점도 잘 알았다.
“네, 저도 압니다. 하지만 9% 지분 정도의 가치는 결코 아닙니다!”
실제로 AD 설계의 지금 가치는 KM 산업의 9%와 비교조차 하기 힘들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은 현실 가치보다 미래가치에 가중치를 뒀다.
“KM 전자 주가를 봐. 무려 40만 원을 넘겼다. 이게 회사의 미래가치란 거다. KM 산업은 뭐지? 이놈의 주가가 오르기는 올랐느냐? 그래, 올랐지. 그게 다 KM 전자 때문 아냐?!!”
“그거야…….”
“도대체 네놈이 부회장으로 이제까지 한 것이 뭐가 있냐? 아니, 어떻게 KM 그룹에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정보를 외부에 정보를 알리냐? 네가 정말 부회장이기는 한 거냐?!!”
퀄컴 인수 때 전경련 입구까지 찾아와서 정보를 흘린 일로 아직 열받아 있는 최용욱 회장.
최문경 부회장은 내심 한숨을 내쉬면서 속으로 최민혁 욕을 했다. 그놈이 없었다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는 아직도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스스로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 그건 제가 화가 나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아무리 감정이 상했다고 해도 어떻게 전경련 실무진이 모인 자리에서 그딴 개소리를 해?!!”
김이경 여사가 보다 못해서 끼어들었다.
“아, 아버님, 우리 그이가 실수한 점은 스스로 인정했습니다. 민혁이와의 갈등 때문에 감정이 계속 상해 있었는데, 마침 기회가 오자 복받쳐서 그런 행동을 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을 증폭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최용욱 회장이었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김이경 여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김이경 여사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지금까지 마음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버님, 너무 소모적인 감정 대립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이와 민혁이 사이가 나쁜 것은 KM 그룹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일단 지난 일도 있으니, 그 점을 참작해 주셨으면 합니다.”
결국 모든 사태의 주범은 최용욱 회장이라는 반론이었다.
“그딴 소리밖에 못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