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
“괜찮을까요? 지금 최민혁 실장과 엮여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CDMA 시스템 공동 연구만 해도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평소 자기답지 않게 오리발을 내밀었다.
“난 모르는 일이야.”
“네?”
“김현우 수석 부장 일은 난 모른다고!”
“그거야 그렇지만…….”
임권수 부장은 순간 당황했다. 그 역시 돌아가는 상황을 봐서 안다. 다만 권태성 기획실장이 이런 태도를 보일지는 몰랐다.
권태성 기획실장 역시 민망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을 상대하면서 자신이 바보같이 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걱정하지 마. 일이 잘되면 잘되는 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손해를 볼 일은 없어. 만약 이 일로 문제가 생기면 김현우 수석 부장이 책임을 진다고 했잖아. 그러면 된 거야.”
“흠.”
임권수 부장은 황당한 눈으로 권태성 기획실장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권태성 기획실장의 따가운 시선을 접하자 슬쩍 눈을 돌리고 말았다.
‘하긴 그 돼지가 신경이 쓰이겠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니까.’
하지만 권태성 기획실장도 할 말은 있었다.
“다만 김현우 수석 부장이 하는 일을 잘 지켜봐. 또 도를 넘어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아마 이번 일을 최대한 이용하려고 할 거야. 회사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만약 스스로 쓸모를 보인다면…….”
‘그때는 거기에 따른 대우를 해줄 수밖에 없어’란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김현우 수석 부장 때문에 오성 전자 내부가 어수선했기 때문이다.
특히 회사에서 버티는 와중에 소송까지 건 그의 행동은 지금도 오성 전자 내부에서 말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지난 일을 떠올리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두통약을 먹고 머리가 좀 맑아지자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젠장맞을, 이게 모두 최민혁 실장 때문이잖아!’
* * *
모든 일이 그렇지만 뜻대로 흘러가는 일은 잘 없다.
김현우 수석 부장 딴에는 나름의 자신이 있었지만, 그의 계획은 지금 이 시점에서는 먹히지 않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김현우 수석의 미팅 요청에 분노했다. 자신과 급이 맞지 않는 인물의 요청에 자존심이 크게 상했던 것이다.
“이 돼지 새끼는 뭐야?!”
권재홍 비서실장은 흥분한 최문경 부회장을 설득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KM 전자에서 STB 사업부를 책임졌던 김현우 상무입니다.”
최문경 부회장도 ‘STB 사업부’란 말에 머릿속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연스럽게 최훈열 전무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를 기억해 냈다.
“아, 훈열이 밑에서 일했던 그 욕심 많은 돼지 새끼였어?”
“최두진 사장님의 서자이기도 합니다.”
‘최두진’ 이름을 떠올린 최문경 부회장은 눈살부터 찌푸렸다. 그 역시 KM 그룹 대주주이자 최용욱 회장의 절친인 최두진 사장을 모를 수가 없었다.
뒤늦게야 최두진 사장의 요청을 받아서 낙하산 한 명을 보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아, 그놈이 이놈이었어?”
“네. 최두진 사장이 부탁한 일이라서 어떻게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훈열 전무와 죽이 맞아서 KM 전자에 있을 때 많은 일에 관여했습니다.”
여기서 많은 일은 곧 비자금 관리를 말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직도 그놈의 KM 전자 비자금과 관련된 인물이 나올지는 몰랐던 것이다.
“…아니, 그놈이 왜 나에게 연락을 한 거야?”
“STB 사업부가 매각된 이후에 오성 전자로 이직했습니다. 아무래도 오성 전자를 대리해서 이번에 나선 것 같습니다.”
“가만, 설마 오성 전자에서 그 돼지 새끼를 앞세워 나에게 지금 수작을 부린 거야?”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래도 KM 전자 출신이니, 협상이 편할 거라 본 것입니다.”
“젠장맞을.”
최문경 부회장은 정작 김현우 상무가 하려고 한 독과점 이야기는 아예 듣지도 못했다. 정확히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에게 보다 중요한 일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바로 장녀 최영란의 연애 활동이다.
“영란이는 어때? 그놈이랑 연락을 자주 하고 있어?”
“하루 최소한 두 번 정도는 전화 통화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전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거네.”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좀 달라진 것 같습니다.”
“아쉽네. 일이 좀 빨리 진척되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남녀 일에 괜히 끼어들었다가 오히려 문제만 만들 겁니다.”
“알아.”
최문경 부회장은 굳이 권재홍 비서실장 조언이 아니라도 잘 알았다. 그가 한창 뜨겁게 달아올랐던 최영란의 러브 스토리를 파토 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이후로 날 미친놈처럼 쳐다보았으니까.’
딱히 후회는 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과 같은 일이 생겼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잘 지켜봐. 굳이 끼어들 일은 아니야. 다만 사태가 나빠지면 곤란하니까. 지금 당장은 한부 그룹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
“…알겠습니다.”
권재홍 비서실장도 한숨을 내쉬었다. 장승일 기획 조정실 실장이 이 문제를 가지고 계속 자신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한부 그룹의 악명이 자자한 것처럼 최문경 부회장의 평판도 좋지 않았다.
KM 그룹이 과거에 저질렀던 많은 일이 실상 최문경 부회장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최민혁 덕분에 KM 그룹 이미지가 좋아졌다고 해서 과거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한부 그룹은 아닌 것 같은데, 마땅한 파트너가 없으니.’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이미 김현우 수석 부장에 관한 이야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 * *
김현우 수석 부장은 KM 전자에서 상무로 근무한 만큼 최문경 부회장을 쉽게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최소한 자신에 대해서 알 거라고 봤다.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은 마치 자신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대우했다.
‘독과점’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천선구 과장을 비롯한 가용 인력을 모두 동원해서 최문경 부회장 주변을 팠다.
다행이라면 천선구 과장은 아직 KM 전자를 비롯한 KM 그룹 쪽에 아는 지인이 제법 있었다. 그가 비록 보안이 필요한 정보는 얻지 못한다고 해도 가벼운 이야기 정도는 파악했다.
바로 KM 그룹 내에 돌고 있는 괴이한 소문이다.
최문경 부회장이 최영란이 설립한 AD 설계를 강제로 인수하려 한다는 이야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떠돈 것이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아직 확실하지 않은 정보만으로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설마 최문경 부회장은 AD 설계를 먹으려고, 자기 장녀를 정략결혼 시키려 하는 거야?”
“…현재 얻은 정보만 놓고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AD 설계를 알아 보니, 최문경 부회장이 충분히 욕심낼 만한 회사였습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천선구 과장이 조사해 온 AD 설계 매출액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불과 올해 설립된 AD 설계는 한전과 전략적인 제휴를 맺어서 탄탄한 성장을 거듭했다.
특히 전력용 비메모리 설계와 관련된 기술은 가볍지가 않았다.
“…대단하네.”
“최영란 이사는 이미 KM 산업에 있을 때부터 탄탄한 실무 경험을 쌓았고, 그를 바탕으로 AD 설계를 설립한 것 같습니다.”
“그건 알겠어. 그런데 정략결혼 대상자가 하필이면 한부 그룹일까. 이해는 가지만 워낙에 말이 많아서 조심하는 것이 맞을 텐데…….”
천선구 과장 역시 이 부분에는 공감했다.
“아무래도 한부 그룹의 최명진 회장이 정권 쪽과 가깝지 않습니까. 그걸 노린 것이 아닐까요? 지금 최문경 부회장의 상황을 보면, 최민혁 실장의 퀄컴 인수 때문에 날이 잔뜩 곤두서 있지 않습니까?”
“하긴.”
김현우 수석 부장은 새삼 최민혁에 당했던 뼈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그 때문인지 최민혁 실장이 하는 수작이 훤히 보였다.
지금 최문경 부회장이 무슨 고통을 받고 있는지도 말이다.
‘아쉽네. 지금이 딱 적기인데…….’
그렇다고 서두를 일은 아니었다.
“최문경 부회장, 최영란 이사 주변을 샅샅이 조사해 봐. 필요하다면 홍신소를 이용해도 좋아. 비용은 내가 낼 테니까.”
“…알겠습니다.”
* * *
최영란 이사 역시 최민혁의 도움을 얻은 덕분에 KM 전자 상황이 어떤지 계속 들었다. 그녀는 특히 CDMA와 관련해서 최민혁이 한 일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성과였다.
‘결국 권태성 기획실장이 직접 나섰다는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KM 전자와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소리잖아. MP3 사업 제안은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나온 것이 분명해.’
특히 오성 전자가 KM 전자에게서 눈독을 들이는 분야가 많았는데, 그중에 하나가 MP3였다.
이 분야에 대해서 그녀가 잘 아는 이유는 MP3 칩 설계 때문이다.
MP3 IP를 활용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부가가치를 키울 수 있는 아이템은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평소처럼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뻑하면 떠오르는 한 남자의 모습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사랑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사람이 아니다. 남녀 사랑 문제는 이미 졸업한 지가 오래였다.
그런 그녀도 187㎝의 훤칠한 키, 조각 같은 외모, 심지어 하버드 대학 출신의 최해진을 그냥 쉽게 저버리지 못했다.
최해진은 바로 그녀의 이상형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해진은 최명진 회장이나 그의 아버지 최상현 비서실장과는 성향이 전혀 달랐다.
하버드 대학 경영학과를 다니면서 더 넓은 시야를 경험했고, 자신도 있었다.
단순한 자신이 아니라 앞으로 미래 기술에 대한 안목도 있었다.
최영란 이사가 반한 점이 바로 이런 부분이다.
그녀가 단순히 남자 외모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최해진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늪처럼 깊어만 갔다.
갈등을 거듭하면서 시간을 끌던 최영란은 이대로 있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자신의 연락을 받고 데이트 기대에 부풀어 있는 최해진을 보았다.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녀는 내심 따스한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최민혁 실장의 냉랭한 모습이었다.
‘독한 놈.’
내심 욕설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소위 말하는 재벌 3세다. 결코,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미안해요. 전 최해진 씨와는 맞지 않을 것 같아요.”
“……?”
황당한 최해진은 뜬금없는 이야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 잘못 들었나 싶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의 전화 목소리에 따뜻한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더욱이 여자에게 이렇게 대차게 차인 경험은 처음이었다.
입을 살짝 벌린 채 고장이 난 녹음기처럼 버벅거렸다.
최영란 이사는 그제야 자신이 최해진을 이미 마음에 뒀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전화로 할까 하다가 만나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어요.”
“영, 영란 씨.”
“미안해요.”
최영란 이사 처지에서도 나름 독하게 마음을 먹어서 한 일이다.
하지만 최해진 역시 어지간한 남자와는 좀 달랐다. 그는 딱히 정략결혼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최영란이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털털한 성격이 자신의 차분한 성격과는 궁합이 잘 맞기 때문이다.
서로 코드가 맞았기에 감정이 빠르게 불타올랐던 것이다.
더욱이 집안에서도 밀어주는 혼사다. 만약 그녀와 깨진다면 다시는 이렇게 마음에 든 혼인 상대를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슨 일 때문인지 알 수 없을까요?”
“네?”
“영란 씨, 제 눈을 똑바로 봐요. 그리고 다시 한번 이야기해 봐요. 진심을 담아서 똑똑히 말해 봐요. 전 영란 씨가 진심으로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최영란은 도저히 최해진 본부장의 두 눈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결국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말았다.
그녀도 뒤늦게야 짧은 시간에 최해진에게 깊이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최민혁 실장과 장승일 실장이 했던 한부 그룹에 관한 이야기가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최해진은 그제야 안도했다. 그는 일어나서 의자를 최영란 옆자리에 바짝 붙였다. 그녀 손을 양손으로 꼭 잡았다.
움찔 놀란 최영란은 뜻밖에도 그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영란 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