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514화 (514/1,021)

#514.

“전 남의 연구 성과물을 도둑질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 걸음 물러나려는 최민혁의 행동을 멍하니 쳐다보는 두 사람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오큘러스 프로젝트는 그렇다고 하죠. 하지만 이번 연구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너무 많은 연구 팀이 이 일을 같이한 것이라서 돌아가는 상황을 뻔히 압니다. 제가 책임자였다고 말하면 제보하는 친구도 나올 겁니다. 당장 여기 두 분이 반대할 겁니다.”

“그건 한번 생각해 보죠.”

원명섭 실장 역시 안현종 박사의 말에 수긍했다. 그는 뜻밖에 최민혁을 존경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과는 틀린 태도였다.

최민혁은 원명섭 실장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아는 오성 전자 임직원들과는 많이 달랐다. 물론 자신의 선입견일 수도 있다. 오성 전자 임직원이 모두 다 같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렇게 호의를 보이는 이는 처음이다.

다만 일이 원명섭 실장의 좋은 태도로 끝나지는 않았다.

뒤늦게 나타난 권태성 실장 일행 때문이다. 그는 회의에 늦었다고 사과하면서 최민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입니다.”

최민혁도 뒤늦게 온다는 일행이 권태성 실장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러게요. 설마 권 실장이 이 자리에 올지는 몰랐습니다. 사전에 알았다면 좀 더 준비했을 텐데, 아쉽습니다.”

“이번 CDMA 관련 연구는 오성 전자의 핵심 사업입니다. 어수룩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이 자리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권태성 기획실장이 오영근 사장과 친근하게 인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어차피 권태성 기획실장과는 만나서 할 이야기가 많았다.

‘한부 그룹 일을 대비해서 사전에 관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우리 부회장님이 한부 그룹을 이용해서 수작을 부릴 수가 있으니까.’

그런데 그도 뒤늦게 권태성 기획실장 일행 중에 익숙한 사람을 뒤늦게 발견했다.

“어? 설마 김현우 상무?”

“최 실장님, 오랜만입니다.”

최민혁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제일 뒤쪽에 몸을 숙이고 있다가 머쓱하게 웃고 말았다. 그의 큰 덩치를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더욱이 그는 최민혁 실장을 보자 만감이 교차해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심지어 최민혁 실장이 꾸민 음모를 하나둘씩 떠올리면서 최민혁 실장의 면모를 살피다가 탄식하고 말았다.

겉으로 봐서는 순진한 청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저 머리에 든 것은 상상을 초월한 흉계와 모략이었다.

“…네.”

최민혁은 살짝 당황해서 뒤늦게 대답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김현우 상무를 보게 될지는 상상도 못 했다. 새삼 그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혹시 아직 오성 전자에 재직 중입니까?”

“최 실장님 덕분에 지금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실 그런 점은 최 실장님에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최 실장님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있기 어려웠을 겁니다.”

가시가 듬뿍 담긴 말에 최민혁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리고 권태성 기획실장의 묘한 눈빛을 그제야 발견했다.

‘그렇다는 말이지.’

최민혁은 힐끗 오영근 사장이나 문형섭 부사장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김현우 수석 부장을 보자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세 사람 다 김현우 수석 부장을 이 자리에서 보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특히 최민혁은 김현우 수석 부장의 처지를 어느 정도 알았다. 그는 넌지시 이 부분에 대해서 한 번 짚고 넘어갔다.

“…하면 오성 전자에서 그만뒀다는 이야기는 결국 소문이라는 말이군요.”

“회사를 잘 다니고 있는 사람 처지에서는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전 오성 전자가 제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엔 권태성 기획실장이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최민혁 실장이 당황하는 모습을 본 터라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람도 잠시.

최민혁 실장은 난감한 얼굴을 한 채 김현우 수석 부장을 쳐다보았다.

그가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해도 자신이 수작을 부려서 쫓아낸 사람을 앞에 두고 당당하게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김현우 수석 부장은 자신이 마치 귀환자인 것처럼 당당했다.

“최 실장님이 CDMA 사업과 관련해서 ETRI 쪽에 컨설팅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과연 최민혁 실장님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MP3, STB, 위성 사업, 거기에 CDMA까지 모르는 것이 없으니까요.”

약간은 비꼬는 말투였다.

권태성 실장이나 원명섭 실장은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놀람도 잠시.

최민혁은 하룻강아지 공룡 무서운 줄 모르는 김현우 수석 부장을 보면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차가운 최민혁의 시선에 김현우 수석 부장은 움찔하기는 했다.

권태성 기획실장이 바로 그때 끼어들었다.

“CDMA 사업도 사업이지만 MP3 특허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설마 KM 전자가 계속 MP3 기술을 독점할 생각입니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하면 MP3 특허 기술은 언제 팔 생각입니까?”

최민혁은 다른 따가운 시선을 느꼈지만, 권태성 실장 눈에 집중했다.

“MP3 관심이 있습니까?”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 아는 지인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로는 MP3 기술에 관심을 둔 기업이 한둘이 아닙니다.”

단순한 관심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미 개발을 시작한 중견기업도 꽤 있었다. 심지어 그중에는 벤처 기업도 빼놓기 힘들다.

아직 이들이 별다른 의견을 내색하지 않는 이유는 KM 전자의 무덤덤한 대응 때문이다.

KM 전자는 MP3 로열티에 관해서는 그 어떤 가이드라인도 내놓지 않았다.

실상 최민혁이 소극적으로 MP3 로열티를 관리한 것은 이것을 이용해서 다른 기업을 압박하기 위함이다.

‘일테면 오성 전자가 그런 경우지.’

오성 전자는 솔직히 최민혁이 믿을 수가 없는 기업이었다.

틈을 보이면 얼마든지 자신의 목을 조일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내부적으로 이야기를 좀 해봐야 합니다.”

“…빠른 결정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끌고 가면, 다른 기업도 KM 전자를 좋은 눈으로 보지 않을 겁니다.”

“협박하는 겁니까?”

“아뇨. 제가 알기로 공정위에서 MP3 독과점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요?”

최민혁은 살짝 놀랐다. 설마 공정위가 따로 지켜보는 줄은 몰랐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아직까지 MP3라는 신사업이 나온 지가 1년이 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최민혁이 오성 전자가 아니라 중소기업을 상대로 독점 갑질을 한다면 충분히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아니, 그렇게 그림을 만들려나?’

좀 앞서 나간 생각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그는 자신이 고민에 빠진 동안에 이 이야기를 듣고 김현우 수석 부장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보자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번 독과점을 가지고 다른 꼼수를 부리려나 보네.’

“그렇다고 저 혼자 독단으로 결정할 일은 아닙니다. 회사 내부적으로 검토가 필요해서요.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갑작스러운 권태성 실장의 방문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알린 정보로 자기 능력이 드러나겠지만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이번 일을 통해서 자기 실력을 조금은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게 앞으로 일을 풀어가기에 더 좋으니까. 그나저나 김현우 이 치가 문제네. 참 집요한 인간이야. 바퀴벌레가 울고 갈 정도이니까.’

* * *

김현우 수석 부장은 권태성 실장에게도 지긋지긋한 인간이었다.

그 역시 김현우 수석 부장의 수법을 잘 알기에 거리를 두면서도 완전히 쳐 내지는 못했다.

이번 방문을 끝낸 김현우 수석 부장은 뜻밖의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CDMA는 어쩔 수가 없다고 해도 차라리 이번 기회에 MP3 독과점 문제를 크게 부각하게 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지금 CDMA에 손을 댄 최민혁 실장은 뭔가 다른 노림수가 있을 겁니다. 그걸 그냥 지켜만 보다가는 뒤통수만 맞은 채 계속 수동적으로 끌려갈 겁니다. 차라리 이럴 때는 먼저 공격하는 것이 최상의 수입니다.”

“…최민혁 실장이 그냥 당하기만 할까?”

“물론 그렇게 안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직접 움직이면 최민혁 실장도 바로 반격을 할 테니, 차라리 다른 이를 동원하는 것이 한 방법입니다.”

권태성 기획실장도 움찔했다. 그는 힐끗 기획 3팀 부장인 임권수 부장을 쳐다보았다. 옆에 자리한 황광수 차장은 복잡한 눈으로 김현우 수석 부장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실상 두 사람 다 아직도 김현우 수석 부장이 회사에 다니는 것이 신기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야 두 사람은 김현우 수석 부장이 어떻게 생존했는지 깨달았다.

틈을 파고드는 것이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회사에 다닐 사람이야.’

권태성 기획실장은 복잡한 상념에 잠긴 두 사람을 보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어떻게 하자는 건가?”

“최문경 부회장을 이용하는 겁니다. 그는 최민혁 실장 때문에 전전긍긍 앓는 것으로 압니다.”

“하긴 최 부회장이 최근 LC 그룹 부회장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을 만났다는 소리를 들었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처럼 절박한 상황에 놓인 최문경 부회장이라면 반드시 우리가 만든 미끼를 물 겁니다. MP3 독과점 문제는 계속 나온 이야기였으니까요. 아니, 그는 이 사태를 더 키울 겁니다.”

“하긴 국내 MP3 시장 100%를 장악한 곳이 KM 전자이니.”

독과점의 폐해는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당장 에경유지가 무수프탈산을 생산하는 포스코 캠을 인수하지 못한 일도 이 독과점 문제 때문이다.

독과점 문제로 인수합병이 어그러진 일은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MP3가 과장해서 말하면 이와 유사한 경우였다.

KM 전자가 MP3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기업은 MP3 시장에 끼어들고 싶어도 KM 전자가 보유한 원천특허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다만 다른 독과점과는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새로운 MP3 산업이 만들어진 지가 고작 1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국가 경제의 고른 발전을 위한다면 다른 기업에도 문을 열어주는 것이 맞다.

“만약 이 독과점 문제가 터진다면 최민혁 실장도 MP3에서 재미를 보지 못할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상황을 보다 유리하게 이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권태성 기획실장은 최근 최문경 부회장의 삽질을 보고받았다. 그는 선뜻 최문경 부회장을 믿을 수가 없었다.

“최문경 부회장이 잘할 수 있을까?”

“그건 최문경 부회장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최민혁 실장이 음흉해서 그렇습니다. 온갖 수작을 다 부리는데, 최문경 부회장이 당해낼 수가 없었던 것뿐입니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 옹호설에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하지만 굳이 김현우 수석 부장의 기를 죽이지는 않았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자신이 손해를 볼 일은 아니다.

대신 최악의 상황에 대한 대비가 필요했다.

“다만 설사 그 일을 한다고 해도 나랑은 무관해. 아니, 우리 오성 전자는 그 일에 전적으로 관여한 적이 없어. 만약 일이 생기면 자네가 다 책임을 져야 할 거야!”

“그 책임, 기꺼이 제가 다 지겠습니다!”

“…….”

권태성 기획실장은 자신만만한 김현우 수석 부장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김현우 수석 부장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한편으로 은근히 기대했다.

‘최 실장이 압박을 받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으니까.’

“그럼, 한번 진행해 봐.”

“그럼 결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마치 이 일이 성공한 것처럼 당당하게 기획실을 나섰다.

그가 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임권수 부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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