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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511화 (511/1,021)

#511.

“하지만 할아버지도 손녀 혼…….”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처음에 최민혁이 몰라서 저 이야기를 하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그는 바짝 긴장했다. 두 사람의 혼사가 알려진다 해도 그게 지금이어서는 곤란했다.

“민혁아!”

“네?”

최민혁은 ‘난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자세를 몸으로 연기하면서 눈만 끔뻑거렸다. 그는 정말 눈치가 없는 사람처럼 최문경 부회장을 쳐다보았다.

‘이 새끼가.’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최민혁 이놈이 작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툭하면 바쁘다고, 빠진 가족 모임에 나올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최민혁이 바빴기에 최용욱 회장도 딱히 최민혁을 타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KM 전자는 최민혁의 손에 넘어간 지가 오래라 다른 이들과는 달리 최용욱 회장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돌아가는 상황을 확인한 최민혁은 그제야 음흉하게 웃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최문경 부회장을 자극했다.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간이 큰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은 마.”

“그게 과연 오해일까요?”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난 솔직히 딸의 연애 문제는 관심이 없으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아.”

“풋.”

그 모습을 본 최민혁은 황당해서 기침하다가 목이 막혀서 콜록콜록 거리다가 물을 먹고서 겨우 진정했다.

그는 솔직히 이 자리에서 최문경 부회장의 자유연애론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다만 굳이 이 자리에서 최영란 혼사 문제를 들먹이지 않은 이유가 있다.

이 일을 잘만 이용한다면 일을 크게 키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최민혁의 태도에 불안을 느낀 최문경 부회장은 힐끗, 최용욱 회장의 눈치를 봤다. 다행히 최용욱 회장은 다른 계열사 사장과 이야기를 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불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정미선에게 부탁해서 자리를 바꾸어 앉았다. 최민혁 바로 옆자리였다.

뒤늦게야 그 모습을 본 최용욱 회장은 영문을 몰라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말을 더듬었다.

“아, 민혁이랑 긴히 할 말이 좀 있습니다.”

“그러냐?”

“네, 아버지. 이제껏 이런저런 일이 있었는데, 계속 그렇게 지낼 수는 없습니다. 나이가 한 살이라도 더 많은 제가 양보할 생각입니다.”

“그래야지.”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과 최문경 부회장 사이를 보면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딱 원하는 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가 개와 고양이 같은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두 사람의 이런 행보 때문에 KM 그룹은 잘나가는 중이다.

최문경 부회장도 과거처럼 안주하지 않았고, 늘 긴장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가소로운 얼굴로 최문경 부회장을 쳐다보았다.

“뭐 하자는 겁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네가 영란이 일까지 간섭할 생각 마. 내 딸이니까.”

“제 누나이기도 하죠.”

“…배다른 누나다.”

“배가 다르든 말든 누나는 누나죠. 저도 누나 미래가 걱정되어서요.”

최문경 부회장은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최민혁 사지를 찢어서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따가운 최용욱 회장 시선을 느끼자 어색하게 웃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너희 둘이 화해하려는 것 맞냐?”

“아무래도 쌓인 앙금이 좀 많아서요.”

“감정이 물론 쌓였겠지. 하지만 너희 두 사람이 가족이란 사실은 바뀌지 않아. 내가 이런 가족 모임을 계속하는 것도 앙금을 풀어버리기 위함이다.”

실제로 사실이었다.

최용욱 회장은 다른 대기업 회장과는 달리 가족 간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 가족 유대란 점에서는 부족했다.

최용욱 회장도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더 타박하지 않았다. 오늘 모임에 참석한 가족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둘째 며느리인 김여정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면 바로 최근까지 계속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는 최훈열 전무의 장남 최민수였다.

최민혁과 비교하면 최민수는 너무 비참했다. 그는 최민수가 DL 그룹에 가 있다는 이야기에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제 KM 그룹도 자리를 잡았으니, 최민수에게 KM 그룹 본사에 자리를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김여정은 눈물을 흘리다가 내심 환호했다.

최민혁은 그 모습에 혀를 내둘렀지만, 딱히 최용욱 회장의 행동에 반대하지 않았다. 솔직히 이제 와서 최민수를 염두에 두기에는 그의 격이 맞지 않았다.

이보다는 최영란 누나의 혼사가 더 문제였다.

생각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최용욱 회장에게 폭로하고 싶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가 아는 바로는 최용욱 회장은 절대로 한부 그룹과 혼사를 진행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최문경 부회장의 태도에서 확신했다.

‘역시 자기 멋대로 결정한 일이야. 뭐, 날 견제한 수단이 필요했겠지. DL 그룹은 KD LCD 때문에 당분간은 내 눈치를 봐야 할 테니까.’

그건 최영란 이사 역시 다르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경고할 필요가 있었다.

“뭐, 영란 누나 혼사는 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니죠. 하지만 우리 KM 전자를 내세워서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기 바랍니다. 절대로 그냥 안 넘어갈 테니까. 다시 이 일이 생기면 할아버지에게 따지겠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내심 뜨끔했다. 그는 최민혁이 과거 한 행동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네, 네놈이 설마 고소라도 하겠다는 소리냐?”

“못할 것도 없죠. 둘째 큰아버지와 같이 나란히 감방 생활하는 것도 좋죠. 아, 그림 나옵니다. 그거 괜찮은데요?”

“이 새…….”

그는 다시 느껴지는 따가운 최용욱 시선에 입을 쿡 다물고 말았다.

퀄컴 사건 이후에 최용욱 회장의 태도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완전히 타인인 것처럼 자신을 대했다.

이 자리에서 더 큰 사건을 터뜨릴 수는 없었다.

실제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최용욱 회장은 정말 화가 난 눈치였다. 다른 이들은 다들 최용욱 회장 눈치만 보고 있는데, 두 사람은 달랐기 때문이다.

특히 퀄컴에 대한 앙금 때문인지 최민혁이 아니라 자신을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억지로 웃으면서 최민혁과 어깨동무를 했다.

“아버지도 참. 민혁이랑 이렇게 사이가 좋습니다.”

“…그래, 알겠다. 세상 살다 보면 가자 중요한 것이 바로 가족이야. 그걸 잊지 말아라. 너희도 마찬가지야!”

최용욱 회장의 ‘가족 사랑’ 이야기는 그제야 꽃을 피웠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최영란의 혼사 문제를 어떻게 해서라도 숨기려고 전전긍긍했고, 최훈열 전무의 아내 김여정은 남편을 감옥에서 꺼내기 위해서 최용욱 회장의 눈치만 봤으며, 최동영 상무는 지친 얼굴로 멍하니 침묵하기만 했다.

다른 계열사 사장은 최근 말이 나오기 시작한 계열사 매각 소문 때문에 아프리카 독재자의 연설을 듣는 사람처럼 그저 입을 다물었다.

최민혁은 바보들의 모임과 같은 이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그도 원래 계획은 많았지만, 문득 지금 상황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고민하는 것은 정작 따로 있었다.

최문경 부회장이 한부 그룹 최명진 회장과 손을 잡을 때 할 일 때문이다.

나올 수 있는 흥미로운 시나리오가 너무 많았다.

아무리 최문경 부회장이 자기 관리를 잘한다고 해도 한부 그룹과 같이 무리수를 둔다면 불법적인 일에 엮일 것이 분명했다.

‘솔직히 첫째 큰아버지가 한부 그룹과 같이 불법적인 일을 한다면 안성맞춤이니까. 아니, 내가 그렇게 하도록 압박을 해야겠지.’

대신 바라본 사람은 역시 심란한 얼굴을 한 최영란 이사였다.

그녀는 이런저런 내적갈등 때문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흠, 최해진 그 친구가 마음에 들었나 보네.’

남녀 일은 모르는 법이다.

딱 최영란 일이 그랬다.

그녀도 오락가락한 자기 마음을 모르고 있었다.

고민을 거듭한 최민혁은 굳이 무리하게 일을 밀어붙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영란 누나에게는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줬으면 할 만큼 한 거지. 중요한 것은 메인이 CDMA이니까.’

최민혁은 겉으로 살갑게 굴면서 계속 자신을 협박하는 최문경 부회장의 태도가 오늘만큼은 기분이 좋았다.

‘부회장님, 기대하죠.’

***

ETRI 내의 CDMA 시스템 개발은 최민혁 덕분에 개발 진척 속도가 빨라졌다. 물론 그건 단순히 ETRI에만 해당하지는 않았다.

기지국과 교환기를 비롯한 CDMA 장비 연구를 맡은 오성 전자나 HY 전자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오현종 박사에게서 모범 답안지를 받고 나서는 처음에는 자존심 때문에 발끈했지만, 곧 내부 조사를 한 후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최민혁 실장이 만들어놓은 이 설계도는 가장 안정적이고, 발전된 모델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CDMA 시스템을 수년에 걸쳐서 운영한 후에나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오현종 박사에게 자문을 구했지만, 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지금 이 순간에는 최민혁에 대한 것을 밝히지 않았다.

덕분에 오성 전자나 HY 전자 연구 팀은 최민혁 실장이 만들어놓은 설계도를 따라서 시스템 전체를 수정해야 했다.

겉으로 봐서는 일을 두 번 해서 프로젝트 속도가 느려질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초기 설계가 워낙에 이상적이어서 오히려 속도는 더 올라갔다.

그 덕분에 ETRI 내에서 시범 서비스를 3차례에 걸쳐서 진행했다.

모두 유의미한 성공을 거두었다.

노이즈 없는 깨끗한 품질에 경악한 오성 전자 중앙 연구소 원명섭 실장은 오현종 박사를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게 정말 ETRI에서 개발한 겁니까?”

오현종 박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제 진실을 말할 시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큰 골격은 최민혁 실장이 했습니다.”

“…정말입니까?”

“네, 이미 우리 ETRI 연구 팀이 KM 전자 중앙 연구소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었지 않습니까. 바로 이 프로젝트 때문이었습니다.”

“믿을 수가 없군요.”

두 사람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현종 박사도 두 사람 심정을 잘 알았다.

“최민혁 실장은 흔히 말하는 재벌 3세와는 전혀 다릅니다.”

“아무리 그래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믿을 수가 없어서 HY 전자의 연구 팀장의 이견 조율을 받으면서 고민에 빠진 조영준 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조 실장님!”

조영준 실장은 의문이 가득한 연구 팀장의 시선을 무시한 채 몸을 돌렸다.

“지금까지 테스트한 바로는 자잘한 문제가 제법 있지만 크게 손을 댈 것은 없습니다.”

그 자잘한 문제들은 시스템 전체를 돌아보면서 이것저것 재수정해야 할 일이어서 간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석박사 인력만 해도 200명이 넘었고, 각 회사 중앙 연구소에서 이 일을 담당한 인원까지 합치면 족히 천 명에 가깝다.

그들이 머리를 맞대고 일을 하는데, 일이 안 될 리가 없었다.

만약 초기 설계에 문제가 있었다면 이 많은 이들이 프로젝트를 산으로, 바다로 몰아갔을 테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실상 이번 프로젝트 완료일을 내후년으로 본 이유였다.

자사 내의 다른 연구 팀도 불협화음이 나는데, 다른 회사 연구원과 제대로 의사소통이 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조용준 실장조차 프로젝트가 이렇게 쉽게 흘러가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직접 경험하면서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오현종 박사는 마치 자신이 칭찬이라도 받은 것처럼 웃었다.

“제가 이미 몇 차례 말씀했지 않습니까. 이번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이게 모두 최민혁 실장님의 능력 덕분입니다. 솔직히 최민혁 실장님이 손을 댄 이상 이 일은 이미 끝난 것이나 진배없다고 말만 안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CDMA 시스템이 단순한 컴퓨터 부품은 아니지 않습니까?”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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