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
최용욱 회장의 소문은 익히 들었다. FM 꼰대다. 정경유착의 정석이란 애칭으로 불린 자신을 최용욱 회장이 좋아할 리가 없다. 그라면 이번 혼사를 반대할 수도 있었다. 그건 곤란한 일이었다. 자신 역시 기대하는 바가 많으니까.
“그러면 내가 기다려야지. 하지만 시기를 놓치면 괜한 구설수에 시달릴 수 있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 일을 시작으로 두 그룹이 서로 동맹을 맺는 중요한 일입니다. 제대로 하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좋네. 자네만 믿겠어. 그리고 언제 시간 한번 비워봐. 내가 소개해 줄 사람이 있으니까.”
최문경 부회장은 쾌재를 불렀다.
“감사합니다.”
“하하하, 그렇게 말을 하면 내가 민망하잖아. 같은 집안 사람끼리 감사 인사 따위는 하지 마.”
“네.”
최문경 부회장은 겉으로는 온갖 아부를 하면서 속으로 냉정하게 머리를 굴렸다. 그 역시 한부 그룹과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떠안게 되는 리스크를 잘 알았다. 그건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은 그렇게 단순한 목적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민혁이 그놈을 끌어들이면 되니까.’
하지만 최명진 회장의 눈빛도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랐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을 마치 가족처럼 대접했지만, 머릿속으로 주판을 굴렸다.
‘상현이가 추천한 일이어서 하는 일이지만 괜찮은지 모르겠어.’
***
한부 그룹 비서실장이자 최명진 회장의 사남인 최상현은 최명진 회장이 그룹 본사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자 즉시 회장실을 찾아가서 고개를 조아렸다.
최명진 회장은 비서가 내준 홍삼차를 마시면서 소파에 앉았다.
“난 이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지금은 잘하고 계신 겁니다.”
“지금 우리 그룹에서 진행하는 일이 많잖아. 도시가스 사업에 진출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상명 제약을 인수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다 큰일이야. 그 사업과 비교하면 KM 그룹과 얽히는 사업이 별로 없어.”
“이번에 삼영신용금고를 인수한 것도 제조업 투자를 늘리기 위한 작업 아닙니까.”
“그렇지. 제조업 진출에 도움이 된다고 했어. 그런데 과연 KM 그룹의 도움을 받는 것이 그렇게 큰 도움이 될까?”
“절대적인 도움이 됩니다.”
“난 모르겠어.”
“당장 승명 데이터 시스템을 인수한 것은 TRS 사업 착수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KM 전자에서 진행하는 CDMA 시스템을 보면 굳이 TRS에 집착할 이유는 없습니다.”
“아니, 그쪽은 최민혁 그 친구가 국내 이동 통신 사업에는 끼어들지 않겠다고 발표했잖아?”
“최민혁 실장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는 다릅니다.”
“호, 네 말은 최민혁 실장을 이용해서 이동 통신 사업에 발을 걸치자는 말이야?”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특히 최민혁 실장이 ETRI 측과 공동 연구를 진행하면서 그 영향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계속해 봐.”
최명진 회장도 흥미를 느낀 채 묵묵히 최상현 비서실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비록 비서실에 있지만, 인수합병 쪽을 주로 담당했다.
따라서 다른 그룹과 업무 협조에 대한 일은 그가 전적으로 책임졌다.
최상현 비서실장은 그 덕분에 안목이 첫째나 둘째보다는 탁월했다.
그가 굳이 자기 밑에서 일을 하는 이유다.
최상현 비서실장은 덕분에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았다.
그는 과거 최민혁 실장이 한 일보다는 지금 진행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CDMA 시스템에 대한 일이었다.
“이미 지난주에 CDMA 자체 시범 서비스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보고받았습니다.”
“그건 이미 언론 통해서 발표했잖아?”
“올 초에 한 것은 단순한 기능 테스트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지난주에 나온 결과는 그것보다 한 단계 발전된 것입니다. 이백 명 이상을 동원해서 이전 시스템에서 나타난 많은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설마 바로 상용 서비스가 가능할 정도란 말이야?”
“그 전 단계라고 보면 됩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 네가 지난달에 보고한 내용과는 다르잖아? 적어도 내년 중순, 현실적으로 내년 하반기나 되어야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어?”
최상현 비서실장도 움찔 몸을 떨었다. 그 역시 조사를 진행하면서 믿기지 않는 프로젝트 속도에 잘못 알았나 싶어서 몇 차례 확인했기 때문이다.
“사실입니다. 굳이 ETRI만이 아니라 오성 전자나 HY 전자 CDMA 시스템 사업부 통해서 확인한 사실입니다. 그쪽에서도 ETRI 측의 능동적인 태도에 경악했다고 합니다.”
정확히는 최민혁이 만든 CDMA 시스템을 토대로 ETRI 측에서 업무 분담을 했다. 그중에는 교환기를 비롯한 CDMA 장비를 담당한 오성 전자나 HY 전자 쪽도 있다.
그쪽 파트 담당자도 수백 명의 연구원이 모여서 작업 중이었는데, 뜬금없는 ETRI 쪽의 지시 사안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그만큼 ETRI 측에서 내놓은 CDMA 시스템은 기존 시스템과는 차이가 심했다.
놀라운 것은 그 결과.
오현종 박사가 갑자기 내놓은 시스템 수정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발전되고 혁신적이었다.
다혈질인 최명진 회장조차 일이 그렇게 어수룩하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ETRI, 오성 전자, HY 전자 연구원을 한데 뭉쳐놓으면, 각자 따로 놀기 때문이다.
그 조율이 쉬울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럼에도 일이 쉽게 풀린 것은 정상적인 상황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불쑥 한 가지를 질문했다.
“결국 이전과는 달라진 점이 최민혁 실장이 끼어들었다는 거고, 최민혁 그 친구가 손을 써서 일이 그렇게 되었다는 소리야?”
“네, 어떤 형태로든지 최민혁이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합니다. 보통 친구가 아닙니다. 저도 이런저런 이상한 소문이 많아서 고개를 갸웃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릅니다. 최용욱 회장이 내세운 꼭두각시는 아닙니다.”
“그 최민혁이 최영란과는 사이가 좋고?”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최민혁이 본가로 들어간 이후에 최영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아마 그것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좋았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최민혁은 계속해서 최영란을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하면 해진이가 영란과 결혼하면 최민혁 그 녀석도 우리를 모른 척하지는 않겠어.”
“네, 그리고 AD 설계를 설립한 최영란 이사의 능력도 만만히 볼 정도는 아닙니다.”
최명진 회장도 아직은 최문경 부회장과 두 사람 사이에 구두 약속 정도로 진행한 이번 혼사를 소극적으로 놔둘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도 최문경 부회장 행동에서 석연치 않은 점을 떠올렸다.
“그런데 최용욱 회장이 아직 이번 혼사를 모르는 것 같은데, 알고 나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아마 사전에 정보를 얻는다면 그렇게 될 겁니다. 하지만 이미 쌀이 익은 상태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때 가서는 최용욱 회장도 마냥 결혼을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하하하, 그런가? 해진이 그놈이 잘하겠지?”
“제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여자가 좋아할 타입입니다. 제가 알기로 하버드 대학 다닐 때도 여자들에게서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하긴 내 손자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잘생겼지.”
“두 사람이 잘되면, KM 전자의 이미지를 이용해서 우리 그룹의 부정적인 면을 씻을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그룹 홍보 팀에서 철저하게 준비 중입니다.”
“좋아.”
최명진 회장은 그제야 만족했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이 갑자기 제안한 일이 이렇게 큰 의미가 있을지는 몰랐다.
“이번 일만 잘 끝내. 그러면 너에게도 충분한 기회를 줄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최상현 비서실장은 즉시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아버지가 말하는 기회가 곧 그룹 지분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았다.
사남 중에 막내라서 그룹 지분에 대해 기대를 할 수 없는 처지에서 이번 일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그가 최근 조사한 바로 KM 그룹은 수차례 구조조정을 거듭해서 꽤 건실한 기업으로 거듭났다. KM 그룹의 기둥인 KM 전자를 제외하고라도 KM 산업이나 KM 건설 부채도 80% 이하로 내려갔다.
다른 KM 그룹 계열사 역시 마찬가지다. 대부분 다 흑자로 돌아선 상황이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지금의 KM 그룹이라면 나쁜 혼사는 아니지.’
***
최민혁은 다른 것을 떠나서 최용욱 회장이 정말 손녀 혼사에 대해서 모를까 그게 궁금했다.
‘아무리 장 실장이 이야기를 안 한다고 해도 말이 되지 않아.’
그런데 이 일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다.
최문경 부회장을 비롯한 몇 사람만 알고 있다면 말이다.
‘영란 누나가 떠벌리고 다니는 타입은 아니니까. 가족 일에 대해서 모를 수는 있다는 걸까. 뭐 그것도 시간문제겠지.’
그는 결국 어지간해서는 잘 가지 않는 가족 식사 시간에 최용욱 회장의 저택을 찾았다.
저택은 이미 전문 정원사가 한층 준비해서인지 아름다움을 뽐냈다.
분홍색 장미가 아름답게 피어올라서 한껏 정원을 아늑하게 만들었다.
식탁에는 프랑스 파티에서나 볼 만한 독특한 음식이 나왔다.
식탁은 너무 풍성해서 보기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갔다.
최민혁은 지금까지 돈을 많이 벌기는 했지만, 정신없이 일만 하고 살았다. 이렇게 많은 음식은 처음이었다.
그는 인생 1회 차에서부터 최고급 호텔에서나 가능한 이런 호화 파티가 익숙하지 않았는데,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음식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주변 눈치 따위는 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최민혁에게 간섭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최민혁의 어머니 정미선은 그저 아들이 대견하기만 했다.
그저 아들이 잘 먹는 것에만 집중해서 최민혁이 먹고 난 쟁반을 치우기 바빴다.
하나씩 모임에 도착한 다른 사람은 다들 꾹 입을 다물었다.
당장 최훈열 전무의 장남 최민수는 최민혁의 눈치만 봤다.
최훈열 전무의 아내인 김여정은 어금니가 부러지도록 이를 갈았다. 그녀는 외가인 DL 그룹을 이용해서 최민혁을 어떻게 해서라도 밟아버리려고 했다가 다 실패했기 때문이다.
최근 KD LCD가 본격적인 행보를 거듭하면서 외가 쪽은 오히려 최민혁의 눈치를 봤다.
최민혁에게 이를 갈면서도 KD LCD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최민혁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
특히 김현탁 본부장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당장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김희찬 부사장과 김상구 회장을 설득했다.
정확히는 3달러를 돌파한 후에 벌써 3.5달러에서 횡보하는 에플 주식을 매입할 타이밍만 보는 중이었다.
주식을 사들이려고 했을 때는 너무 많이 올라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오히려 김여정에게 부탁해서 에플 정보를 얻으라고 부탁까지 했다.
그 덕분에 애가 타는 사람은 김여정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감옥에 있는 남편 최훈열 전무를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최동영 상무는 말이 없었다. 그는 솔직히 KM 건설의 구조조정 때문에 주변 다른 일 따위는 돌아볼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최근 KM 건설의 구조조정을 끝냈다는 점이다.
400%가 넘던 부채 비율을 80% 이하로 낮추었던 것이다.
이 일은 KM 그룹 내에서도 말들이 나왔다.
건설 사업 자체가 부채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KM 건설을 깔끔하게 정리했는지 궁금했다.
때문에 KM 건설 내에 비자금 설이 나왔다.
가장 늦게 가족 모임에 참석한 최용욱 회장이 보다 못해서 한마디 했다.
“민혁아, 아무리 배가 고파도 적당히 좀 하자꾸나.”
이전과는 달리 최민혁 눈치를 보던 최문경 부회장이 냉큼 최용욱 회장 말을 받아서 끼어들었다.
“야, 최민혁, 여기가 너희 집 안방이…….”
최민혁은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문 채 툴툴거렸다.
“혹시 영란 누나 혼사…….”
최문경 부회장은 눈치가 빨랐다. 정확히는 딸 혼사 문제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최민혁의 의도를 파악하자 냉큼 일어나서 최민혁의 앞을 막았다.
“민혁아, 아버지가 말씀하시잖아. 오늘은 가족 모임이니, 적당히 좀 하자!”
최민혁은 가자미눈을 한 채 고개를 갸웃한 최용욱 회장과 한쪽에서 고심에 잠겨 있는 최영란 이사를 교대로 쳐다보았다.
최영란은 혼사 문제 때문인지 아예 주변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흠흠, 그렇다. 아버지도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