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509화 (509/1,021)

#509.

뒤늦게 장승일 실장에게 전화도 받았다. 그는 최영란 이사가 떠난 후에 정략결혼 문제를 차분하게 살핀 것이었다.

다행히 그는 최민혁보다는 KM 그룹 내의 정보를 쉽게 파악했다.

[아무래도 실장님에 대한 압박 때문에 부회장이 우군을 찾은 것 같습니다.]

최민혁은 황당해서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이 퀄컴 인수 때문에 미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 일은 과거에도 있었잖아요?]

[데니스 샐로먼 이사가 태국으로 좌천된 일도 영향을 줬을 겁니다.]

[어? 정말 데니스 샐로먼 이사가 태국으로 갔습니까?]

[네.]

[허.]

최민혁은 어이가 없었다. 그가 아는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그 능력이 만만치 않은 인물이다. 고작 이번에 실수했다고 태국으로 보낼지는 몰랐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고서야 그냥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 KM 전자 공매도로 샐로먼 브러더스는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지금까지 대략 드러난 거래 금액은 무려 7,000억을 훌쩍 넘겼다.

‘개인이나 투자회사나 그놈의 탐욕이 문제야.’

한 번만 더.

딱 한 번만.

이번 한 번이 마지막이다식으로 밀어붙인 결과 덕분에 천문학적인 손실을 입었다.

그래도 적자가 고작 1,000억에 불과한 이유는 KM 전자 주식으로 재미를 단단히 봤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성과만 놓고 본다면 데니스 샐로먼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샐로먼 브러더스 본사가 그걸 모를 리가 없다.

‘아, 어쩌면 아닐 수도 있어. 동남아 일에 자칫 변화가 생길 수가 있으니까. 동남아 외환 위기의 시작점은 태국이잖아. 만약을 대비해서 데니스 샐로먼 이사를 보낸 건가? 설마 내가 동남아 외환 위기 사태에 끼어들 거로 생각한 걸까?’

문득 최민혁은 자신이 나쁜 놈인가 고민했다.

그런데 입장을 살짝 바꾸어서 자신이 샐로먼 브러더스 책임자라면 어떨까?

‘아, 문제가 되겠구나. 하 참, 도대체 날 어떤 놈으로 본 거야? 정작 문제를 일으킨 놈들이 할 행동은 아니잖아.’

번민에 빠진 최민혁 실장을 내버려 둔 장승일 실장은 계속 입을 열었다.

[오성 전자나 LC 전자는 어려운 상황이고, 결국 차선책으로 찾으면서 권력을 비호까지 고려한 것 같습니다.]

[…그게 한부 그룹 최 회장이라니.]

[기조실에서 다시 조사한 바로는 이미 몇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중에는 대기업 회장도 있습니다. 협상은 좋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한부 그룹 최 회장입니다.]

한부 그룹 상황이 지금은 썩 좋지가 않았다. 특히 온갖 의혹에 대한 루머가 가라앉지 않았다. 그들로서는 국면 전환을 할 다른 대안이 필요했다.

최문경 부회장의 제안은 그들에게는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우리 할아버지도 알고 계세요?]

[회장님도 아직 이 일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설마 우리 부회장님이 치매가 나서 할아버지에게 보고도 안 하고 단독으로 일을 벌였다는 말입니까?]

[…대놓고 공식적으로 진행한 일이 아니라 일단 남녀 두 사람이 먼저라고 말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최해진 본부장은 몇 년 전에 하버드 대학을 나와서 컨설팅 업체에서 일했습니다. 외모도 괜찮은 편이고, 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설마 미남계라는 말씀이세요?]

[그것까지는 아닐 겁니다. 다만 한부 그룹이 우원건설 이후에 재벌 순위가 자산 기준으로 15위까지 뛰어오르면서 눈총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이게 부담스러운 것 같습니다.]

[우리 KM 그룹과 손을 잡아서 물타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요?]

[당장 우원건설만 해도 상황이 별로 좋지가 않습니다. 은행에서 받은 대출금만 3,700억을 넘겼습니다. 솔직히 걱정스럽죠. 마치 X 리포트에 나와 있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니까요.]

최민혁은 ‘X 리포트’ 이야기가 나오자 더 질문하지 않았다.

[누나는 뭐래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제가 관여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회장님에게 보고해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장승일 실장은 눈치를 보다가 한 가지를 더 말해주었다.

[확실하지는 않는데, 이번 일에 KM 전자를 내세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하하.]

최민혁은 한동안 어이가 없어서 웃기만 했다.

[…….]

장승일 실장은 차마 입을 열지 않았다. 최민혁의 심정을 잘 몰라서다. 화가 극도로 난 것 같기도 한데, 또 그렇지 않은 것처럼도 보였다.

[그 정도면 잘 알았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제가 회장님에게…….]

[아, 내버려 두세요. 이제 막 시작한 드라마를 조기 종영시킬 수는 없어요. 제대로 사태를 키워봅시다. 그리고 빵 터뜨리는 겁니다. 저한테 최해진 본부장 자료만 보내 보내세요.]

[…네.]

최민혁은 전화를 끊고 나서는 한동안 고민했다. 아니. 그는 곧 팩스로 날아온 최해진 본부장 프로필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프로필을 가져온 김명준 과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력만 봐서는 나쁜 친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아요.”

“하면 딱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필요가 있을까요? 당장 한부 그룹이 망하지 않는 바에는 말입니다.”

“당장은 한부 그룹이 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2년 후에 한부 그룹이 망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때는 애까지 낳은 우리 누나보고, 이혼하라고 해야 할까요?”

“…설마 그렇게까지 되겠습니까?”

김명준 과장 역시 한부 그룹에 대한 안 좋은 루머를 들었다. 하지만 한부 그룹은 여전히 잘나갔다. 정부의 비호를 받든 말든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니까.

최민혁은 김명준 과장 태도에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까지 고려해서 최해진 본부장을 죄인 취급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 보니 자신이 끼어들기에도 좀 어려웠다.

그는 이보다 최문경 부회장이 날린 잽에 피식 웃고 말았다.

‘역시 우리 부회장님 솜씨가 죽지 않았구나. 바닥으로 내몰리니, 결국 뭔가 대안을 들고 나와. 뭐 이래야지. 그냥 죽으면, 재미없잖아.’

한편으로 좋은 게 좋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최영란과 최문경 부회장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니까.

다만 최민혁은 차마 비극이란 종결장이 예정된 최영란의 인생과 관련된 일을 가지고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팝콘 각이기는 한데, 일단 지켜보면서 나설 수밖에 없겠어.’

* * *

얼핏 생각하면 한부 그룹과 KM 그룹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한부 그룹은 자산 출처 때문에 따가운 시선을 받는 기업인 반면에 KM 그룹은 새로운 기술과 혁신을 통해서 중견기업 탈을 벗어난 기업이기 때문이다.

물론 KM 그룹이 그런 노력을 한 것은 아니다.

전부 최민혁이 했다.

하지만 제삼자 입장에서는 최용욱 회장이 배후에서 빅브라더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최용욱 회장은 초창기에 최민혁에 대한 외부 간섭을 막아냈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

많은 이들이 이제는 의혹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문제는 최민혁이 너무 성장한 덕분에 섣불리 덤벼들지 못했다.

더욱이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최민혁의 성정이 정말 악질이라는 악명으로 자자했다.

그 증거로 그 대단하다는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조차 최민혁 실장에게는 한 걸음 양보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들은 이상할 정도로 최민혁에 대해서는 보수적이었다.

이는 최민혁이 아직 생각 못 한 부분이다.

아니, 그도 자신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을 스스로 과소평가했다.

그런데 아닌 사람도 있었다.

바로 최문경 부회장이다. 그는 데니스 샐로먼 이사가 이번 샐로먼 브러더스 투자 손실에 관한 책임으로 결국 태국으로 쫓겨난 것을 봤다.

그도 크게 당황했다.

새로 한국 지사에 오는 인물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결국 그는 대안으로 힘이 필요했다. DL 그룹은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DL 그룹이 자금이 많다고 하지만 이제는 최민혁에게 먹히지 않았다.

차선책으로 찾은 것은 정부 영향력이 강한 기업이었다.

그런데 그런 기업은 최문경 부회장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나마 있다면 바로 한부 그룹의 최명진 회장이었다.

“자, 제 술 한 잔 더 받으십시오.”

“오, 최 부회장, 고마워.”

최명진 회장은 술잔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자신의 장남을 보듯이 최문경 부회장을 따뜻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자네 조카 민혁이 그놈이 대단하더군. 정부에서도 칭찬이 자자해.”

“아, 네.”

최문경 부회장은 ‘최민혁’의 이름이 나오자 어색하게 웃었다.

최명진 회장은 최문경과 최민혁의 사이를 자세하게는 몰랐다. 두 사람이 후계 구도로 갈등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족인 것은 사실이니까.

“언제 한 번 소개를 해줘야 하지 않겠나. 나도 민혁이 그 친구를 만나서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으니까.”

“…그게 좀 제 조카라서 하는 말이 아닌데, 성격이 까칠합니다. 제 말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조금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면 소문대로 성정이 보통이 아니라는 이야기군. 하지만 그 정도라면 그래야 하지 않을까. 고만고만한 성격이라면 그런 성과를 얻지는 못했을 거야.”

“…….”

최문경 부회장은 내심 최민혁을 내세워서 최 회장과 손을 잡았다. 다만 딱히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말을 적당히 각색했을 뿐이니까.

최 회장은 물론 자신이 듣고 싶은 쪽으로만 생각했다.

두 사람 사이의 오해.

그는 굳이 그 착각을 깰 생각이 없었다. 아니, 철저히 이용했다.

최명진 회장 역시 바보는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좀 있다는 기억을 떠올렸다. 너무 최문경 부회장을 자극할 이유는 없었다.

“이제 곧 한집이 될 사이가 아닌가. 자네도 좀 편하게 있어.”

“감사합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기꺼이 허리를 숙였다. 아무래도 두 사람 사이에는 나이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이보다 최명진 회장이 사회 선배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가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나이대접을 해주냐 하면 그건 아니다.

강자에게 철저히 복종하니까.

다만 이 정도였다면 최민혁이 최문경 부회장을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

최문경 부회장은 한부 그룹 최 회장 등에 빨대를 꼽아서 최대한 해먹을 목적이니까.

한부 그룹 최명진 회장은 최문경 부회장의 저자세에 만족했다. 요즘 승승장구하는 KM 그룹은 그도 무시하기 힘들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의 장녀 최영란에 대한 프로필 기억을 떠올렸다.

‘여자치곤 괜찮아. 며느릿감으로 부족하지 않아.’

AD 설계 창업 이후에 그녀가 보여준 능력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 한부 그룹이 멀쩡한 상황이었다면 오히려 최영란을 손자며느리로 맞는 것을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두 집안 혼사가 성립된 이후에 최영란을 밀어줄 생각이다.

최영란 이사가 뜬다면 한부 그룹 역시 며느리 후광을 이용해서 이미지 세탁을 할 생각이다.

이건 사실 최영란 이사가 능력이 없어도 될 일이다.

그런데 굳이 과장하지 않아도 최영란 이사 능력은 차고도 넘쳤다.

최문경 부회장은 물론 최영란이 KM 그룹의 실세로 자리 잡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가 계획한 것은 바지 경영자이니까.

장녀 최영란 이사를 띄워서 KM 그룹 브랜드가치를 재고할 생각이었다.

두 사람의 이해관계는 너무도 잘 맞았다.

물론 그 역시 X 리포트에 대한 것을 봤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부 그룹이 망한다.

한부 그룹이 흔들리면서 한국은행 부실이 확대된다니.

그 여파가 지역 금융 기관을 흔들어서 한국 대기업조차 산산조각 낸다니.

‘말도 안 되지.’

그의 생각은 딱히 이상하게 보기 힘들었다. 수사 사건 이후에 한부 그룹이 부활의 날갯짓을 하면서 승승장구했기 때문이다.

“진작 회장님을 알았다면 좀 더 빨리 연락을 했을 텐데, 아쉽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아, 그리고 최 회장과의 자리도 빨리 만들어 보게.”

당연히 최용욱 회장이 알 것으로 생각한 말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내심 당황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당사자가 서로 좋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혼 대상자는 스스로 결정할 일입니다.”

“아, 그렇지.”

최명진 회장은 겉으로는 넘어가는 척했지만 내심 혀를 찼다.

‘설마 최 회장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건가? 하긴, 그럴 수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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