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7.
그녀는 괜히 심술이 났다. 온갖 언론의 주목을 받는 최민혁. 실상 뉴스를 틀면 최민혁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넌 남자가 이제 공인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그렇게 좁쌀다워. 그냥 그런가 하고 대범하게 넘어가야지. 꼭 내가 한 말을 걸고 넘어져야 속 시원해?”
최민혁은 말도 안 되는 억지에 피식 웃었다. 이해는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입을 꾹 다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 난 그런 일로 좀스러워도 괜찮아. 괜한 오해를 받기 싫으니까.”
그녀는 차를 내온 오혜정 비서에게 눈인사한 후에 다시 정색했다.
“그래, 알겠다. 내가 졌다. 내가 사과할게. 그런데 참 좋겠다. 우리 최훈열 전무님 때문에 민혁이 하렘까지 차리고.”
최민혁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제 어지간하면 다 아는 사실인데, 새삼스러웠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불렀어.”
최영란 이사는 피식 웃으면서 하렘 이야기를 그만했다. 그녀는 사실 최민혁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에 좀 무리했으니까. 그녀는 이보다 장승일 실장에게서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소식 들었어. 할아버지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면서?”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장 실장님에게 들은 거야?”
“어, 기조실에서 AD 설계를 조사했어.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고 연락이 왔더라. 굳이 몰래 처리하는 것보다는 내가 알고 있는 게 낫다고 했으니까. 괜한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은가 봐.”
최민혁은 장승일 실장의 일 처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매사에 공정한 사람답게 괜한 문제를 만들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
“그래도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좀 있어.”
최영란 이사는 이틀 전에 찾아온 김이경 여사를 떠올렸다. 그녀는 너무 갑작스러운 방문이라서 조사를 해봤는데, 확실히 이유가 있었다.
사적인 이야기이지만 혼자 끙끙 앓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거든. 오죽하면 우리 엄마가 날 찾아와서 정략결혼 타령하겠어? 근데 그게 민혁이 너 때문이었더라. 아버지도 독이 잔뜩 올랐더라.”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는 최근 있었던 자기 일을 토로했다. 물론 이 일의 발단은 최문경 부회장 때문이기는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전부 최민혁과 관련이 있었다.
최민혁이 찔끔찔끔 뿌려놓은 씨앗이 서서히 발아하면서 하나둘씩 나타난 현상이었다.
최민혁은 팔짱을 한 채 흥미로운 눈으로 최영란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사실은 또 어떻게 안 거야?”
“장 실장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도 조사를 해 봤어. 그런데 모든 일에는 전부 민혁이 너랑 연결 고리가 있었어. 따지고 보면 AD 설계 창업도 네 제안이었잖아. 그렇게 보면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내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않았어. 사실 민혁이 네가 연락하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찾아왔을 거야.”
냉정한 시선. 조금 전에 괜히 비서진을 걸고넘어진 것이 아니었다. 사실 최민혁을 떠보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었으니까.
“흠.”
최민혁은 내심 감탄했다. 그녀가 설마 자신이 몰래 작업한 일의 흔적까지 깨달을지는 몰랐다.
일단 최근 자신이 최용욱 회장 앞에서 최영란의 이름을 꺼낸 이상 그 일이 어떻게 해서라도 진행될 것으로 생각했다.
다만 최용욱 회장이 기조실까지 동원해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일지는 예상 못 했다.
‘상관이 없나?’
어차피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최문경 부회장을 견제할 사람이었다.
그럼 차라리 이 정도 눈치와 역량이 있는 것이 훨씬 나았다.
조성돈 팀장은 이미 최영란 이사에 관한 조사를 끝냈다. 그의 판단으로는 최영란 이사는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최민혁은 굳이 이번 일을 공짜로 할 생각은 없었다. 최용욱 회장에게 그룹 체질 개선에 따른 수수료를 KM 산업 주식으로 받을 계획이었다.
‘설마 입을 다물지는 않겠지? 뭐 푼돈에 관심이 없기는 하지만 공짜 주식이 들어올 기회를 마다할 이유는 없으니까.’
이보다는 주식이 있어야 KM 산업, 더 나아가서 KM 그룹에 본격적으로 간섭할 수 있다. 그 기반이라면 최문경 부회장 숨통을 서서히 조일 수 있다.
심지어 최용욱 회장의 승인이 있다면 당당하게 나설 수도 있다.
다만 자신이 나서서 돈도 안 되는 진흙탕 싸움을 할 이유는 없었다.
“정략결혼까지 각오했다면 스스로 한계를 느꼈을 것 같은데, 이제 대충 돌아가는 상황은 알지?”
최영란 이사는 차를 홀짝홀짝 들이켜면서 번민에 빠졌다. 그녀도 최근 최민혁의 행보를 잘 안다. 그야말로 최고의 톱스타다. 그가 가는 곳에는 온통 기자들이 따라다녔다.
“…나도 너처럼 할 수 있을까? AD 설계를 계속 키워 나간다면 될 것 같긴 해. 솔직히 민혁이 네가 도와만 준다면 전혀 불가능할 것 같지 않아. 그게 가능하다면 완전한 독립을 할 수 있으니까.”
“우리 최문경 부회장님이 조용히 지켜만 볼까?”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버지가 수작을 부릴 거로 생각해?”
“어이가 없네.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가서 한번 조사를 해 봐.”
“…지금 말이야?”
“어. 본인 스스로 주도적이지 않아서는 곤란해. 내가 누나를 도와줄 수는 있지만 떠먹여 줄 생각은 없으니까. 만약 일하다가 제대로 하지 못하면, 난 언제라도 손을 뗄 거야.”
“…너 생각보다 냉정하구나.”
“누나를 위해서 한 이야기야.”
* * *
최영란 이사는 최민혁에게 경고를 들은 후에 AD 설계로 우선 복귀했다. 그녀는 김희수 연구소장을 불러 AD 설계의 미래를 논했다.
역시나 부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솔직히 AD 설계가 망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어느 한계 이상은 성장하지 못할 겁니다.”
“32비트 CPU도 개발했잖아요? 그걸 이용하면 파이를 키울 수 있다고 했고요!”
“물론 시간이 제법 지나면 이 CPU를 이용해서 회사를 키울 수는 있습니다. 다만 그걸 확신하기는 힘듭니다. 과연 다른 상업 CPU가 많은데, 우리 회사 제품을 선택할 곳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뜻밖의 반응이었다.
그녀 자신도 최근 AD 설계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기는 했지만 이런 대답을 들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김희수 연구소장이 굳이 이 시기에 진실을 말한 이유가 있다.
“저는 KM 그룹 일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최문경 부회장이 우리 회사를 조사한 이상 우리 회사의 단점을 잘 알 겁니다. 아마 그 부분부터 파고들기 시작할 겁니다. 당장 지금은 직원이 동요하지 않는다고 해도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최문경 부회장의 지난 방문 이후로 김희수 연구소장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 사람 좋은 사람이 굳은 안색을 한 채 그녀에게 하소연하고 있으니.
“…미안해요.”
“아닙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할 뿐입니다.”
“하아.”
그녀는 냉정한 현실을 다시 인식하고서야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민혁이 충고가 맞았어.’
* * *
최민혁의 조언은 최영란 그녀에게는 천금과 같은 것이었다.
최영란은 냉정한 현실을 깨달은 후에 단단히 각오를 한 채 다시 최민혁을 찾아갔다.
최민혁은 최영란의 태도를 보자 드디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AD 설계를 어떻게 해서라도 먹으려고 할 거야. 비록 비메모리 사업이 좌초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쪽에 꿈을 버리지 않았으니까. 그게 할아버지의 꿈이잖아. 우리 첫째 큰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무리수를 둘 거야.”
실상 이 대안이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비메모리 사업 쪽은 점점 파이가 커지는 상황이다.
오성 전자조차 작년에 이어서 2억 달러를 넘어간 이 사업에 투자를 늘리기로 했다. 작년 매출 대비 무려 100% 이상 성장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최용욱 회장이 왜 이 사업에 여전히 관심을 기울이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직 그는 반도체에 대한 꿈을 접지 않았다.
“우리 KM 전자, 에플, 와컴, 퀄컴은 꽤 괜찮은 고객이기도 하잖아. 아마 기반만 만들어둔다면 망하지는 않을 거로 생각할 거야.”
실제로 최민혁의 인생 1회 차와는 상황이 좀 달랐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비메모리와 관련된 초기 투자금이다.
“자금이 만만치 않게 들 텐데…….”
“그래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 AD 설계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지. 그걸 기반 삼아서 리스크를 최대한 줄이면서 비메모리 사업 영역 투자를 늘려가면 되니까. 굳이 천문학적인 자금이 당장은 필요 없잖아.”
“하, 그래서 아버지가 그 난리를 치는 거구나.”
쉽게 말해서 돈이 되는 비메모리 아이템이 있다. 그걸 반도체 설비를 이용한다면 기본적인 수익이 날 수밖에 없다.
다행히 그 물량이 그렇게 크지 않다.
시작은 적자를 본다고 해도 그 손실을 최대한 줄이면서 영업을 키워 나간다면, 금방 흑자로 돌아설 수가 있었다.
거기에 덤으로 KM 전자 계열사에서 주문을 받는다면, 탄탄한 성장 기반이 된다.
아마 1년 정도면 흑자 전환을 넘어서서 기반을 탄탄히 다지고도 남는다.
최문경 부회장이 이걸 모를까.
아니, 그는 틀림없이 안다.
그러니 장녀가 세운 회사를 강제로 뺏으려고 하는 거다.
최영란 이사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으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녀도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이 만든 회사마저 빼앗길 지 모르기에 불안했다.
최민혁은 그제야 일어나 최영란 이사 바로 앞까지 가서 고개를 숙인 채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넌지시 내밀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가만히 당할 수는 없잖아. 차라리 우리 부회장님에게 크로스를 한 방 먹여서 KM 산업 지분을 뺏어!”
“…그게 무슨 소리야?”
“선수를 치는 거야. 차라리 AD 설계를 KM 그룹에 넘겨. 자진 납세를 통해서 KM 산업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해. 그 힘으로 최문경 부회장을 끌어내리면 되잖아.”
“…으음.”
그녀는 상상도 못 한 달콤한 제안에 마른침을 꼴칵 삼켰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난 KM 산업 지분도 없어. 있다고 해봐야 고작 계열사 지분인데…….”
“설마 AD 설계를 공짜로 넘길 생각이야? 그걸 주고 KM 산업 지분을 받으면 되잖아. 자리도 부사장은 무리고, 상무 정도면 딱 맞네.”
“KM 산업 지분이라…….”
그녀는 눈동자를 대굴대굴 굴렀다. 생각보다는 현실성이 높았다. 다만 꼰대 할아버지 최용욱 회장을 설득하는 일이 문제였다.
“…할아버지가 과연 내 제안을 받아들일까? 힘들 것 같아.”
최민혁은 그제야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와의 협상은 내가 도와줄 수 있어. 필요하다면 KM 산업에 주문을 넣을 수 있을 거야. 우리 KM 전자 물량뿐만 아니라 에플 물량까지 합치면 꽤 짭짤할 거야. 그 물량이면 상무 자리를 요구하고도 넘쳐.”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최영란 이사는 재벌가 풋내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KM 산업에서 밑바닥 경험도 해봤고, AD 설계 창업도 해봤다.
아무리 대주주라고 해도 계열사에게 영향을 미치려면 명확한 근거가 필요했다.
그녀는 최민혁이 왜 이렇게까지 자신을 도우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 진짜로? 도,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주려는 거야?”
최민혁은 마치 이 질문을 기다린 사람처럼 즉각 대답했다.
“난,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아주 싫걸랑. 그게 다야. 솔직히 우리 최 부회장님이 내 눈에 안 보였으면 좋겠어. 누나도 다르지 않잖아? 내 말이 틀려? 그런 면에서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잖아.”
“…….”
최영란 이사는 최민혁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설사 거짓말이라도 믿었다. 최민혁의 제안은 그녀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처럼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 할게, 아니 할 수 있어. 이 비메모리 사업은 반드시 성공하게 시키겠어!!”
“좋아.”
최민혁은 욕망으로 불타오르는 최영란 이사의 두 눈을 보면서 악수했다. 그로서는 앞으로 꽤 만족스러운 파트너였다.
따지고 보면 그가 굳이 최영란에게 힌트까지 줘서 AD 설계를 키우게 한 것도 이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니까.
최영란 이사가 배신하는 거?
절대로 그럴 일은 없었다.
인생 1회차 가 그 증거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최영란이 힘이 별로 없었다. 따라서 최문경 부회장에게 일방적으로 난타만 당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