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의 원인도 퀄컴 인수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럴 겁니다. 그 일을 보고 나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을 겁니다.”
실제로 최용욱 회장은 KM 그룹의 계열사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봤고, 최문경 부회장은 샐로먼 브러더스조차 2차전에서 박살이 나자 다른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게다가 필요하다면 KM 전자를 오히려 이용하기까지 했다.
물론 최민혁을 끌어내리는 것이 핵심이지만 그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장님이 퀄컴 인수를 통해서 회사 브랜드 가치를 키우자, KM 산업을 비슷한 방식으로 키우는 것을 고민한 것 같습니다. AD 설계 인수나 인텔과의 협력은 그 연장선에서 나온 계획 같습니다.”
“흠”
최민혁은 다시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결론을 내렸다.
“좋습니다. 이렇게 하죠. 우리 첫째 큰아버지를 그냥 내버려 두면, 엉뚱한 수작을 부릴 가능성이 높아요. 그러니 대적자가 필요합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KM 그룹 내에 우리 부회장님을 견제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AD 설계의 최영란 이사죠.”
“최영란 이사라면, 설마 최문경 부회장의 장녀 최영란 이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조성돈 팀장은 어이가 없어서 최민혁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딸과 아버지를 이간질하자니.
이게 무슨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아니었다.
“그건 좀…….”
최민혁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조 팀장님은 상상도 못 할 겁니다. 두 사람 관계가 얼마나 나쁜지 말이죠. 물론 우리 첫째 큰아버지야 가해자이니, 자신도 잘 모를 겁니다. 그런데 피해자는 이야기가 달라요. 특히 힘을 가진 피해자가 되면 반드시 복수하려고 할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 아닙니까.”
“아버지라? 우리 누나 생각은 좀 다를 겁니다. 지금까지는 숙이고 살았지만 내심 이를 갈았죠. 기회가 생기자마자 독립하는 거 보세요. 그게 그냥 우연히 생긴 일 같습니까?”
“하지만 AD 설계 설립 때 최 실장님이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제가 가이드를 잡아줬죠. 딱 그뿐입니다. 그걸 결과로 도출한 것은 우리 최영란 이사님입니다. 따라서 좀 더 밀어준다면 더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겁니다.”
조성돈 팀장은 도저히 최민혁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입니까?”
“네, 더욱이 우리 누나 실력도 만만치 않죠. 기회만 얻으면 행동이 달라질 겁니다. 한번 연락을 해보세요. 아니, 플랜도 한번 만들어 보고요. 아, 비메모리 반도체 쪽이니까. 괜찮은 아이디어도 고민해 보세요. 필요하다면 퀄컴이나 ETRI 쪽과 엮어도 좋습니다. ETRI는 이번 CDMA 협력 때문에 빚을 진 것이 있어서 우리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 겁니다.”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그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실상 최영란 이사는 이미 자기 손으로 비메모리 분야에 입성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AD 설계를 의식한 것 같구나. 하긴 AD 설계의 성장 속도를 보면 무시하기 어려워. 아무리 KM 그룹 브랜드를 이용하고, 한전 도움을 얻었다고 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냐.’
* * *
최영란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아버지 최문경에 대해 심한 콤플렉스를 느꼈다. 거의 PTSD 증후군이나 마찬가지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집에 있을 때면 최문경과는 아예 상종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에 아버지 최문경이 AD 설계를 노리는 것을 보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참다 못해서 최민혁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 문제를 상담했다.
일종의 하소연이다.
그런데 최민혁은 뜻밖에 무덤덤했다. 다만 AD 설계를 운영하는 최영란을 띄워줬다.
흔하다면 흔한 일이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아니었다.
그녀는 뒤늦게 자신감을 얻었고, 결국 집을 나가 버렸다.
정확히는 독립했다.
물론 그녀의 어머니 김이경 여사가 딸의 행동을 그냥 지켜보기만 하지는 않았다. 직접 장녀가 얻은 오피스텔을 찾아가서 다양한 압박을 했다.
하지만 최영란은 이제 과거의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KM 산업을 퇴직한 이후에 집에서 돈도 받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한 셈이다.
“엄마 돈은 땡전 한 푼도 필요가 없으니까. 이제 신경 쫌 꺼주라.”
“네가 이제까지 혜택을 누린 것이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최영란은 눈에 핏대까지 세우면서 김이경 여사와 대판 싸웠다.
흔히 말하는 막장 드라마의 한 장면을 제대로 살렸다.
다행인 게 있다면 뺨따귀를 때리지 않았다는 정도다.
하지만 정신적인 고통을 받은 최영란은 입장이 좀 달랐다.
“그까짓 돈? 얼마면 돼? 2억? 그 정도면 충분하지. 까짓거 내가 5억 줄 테니까. 우리 시원하게 정리하자. 아니, 호적에서 내 이름 빼!!”
“이 계집애가 진짜 미쳤나?”
가슴을 탁탁 치는 김이경 여사는 이 모든 사태가 한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게 모두 민혁이 그놈 때문이야. 어이구,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야.”
좀 과장스럽기는 하지만 그녀의 말에는 전혀 근거가 없지 않았다.
AD 설계의 성공에는 최민혁 실장이 있기 때문이다.
AD 설계가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서 최영란도 과거처럼 착한 딸 코스프레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가면을 벗어던졌다.
사실은 최민혁이 의도한 바다. 그녀는 어차피 최영란이 독립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녀가 자리를 잡는다면 그 자신이 최문경 부회장을 끌어내리는 게 한결 편했던 것이다.
김이경 여사 역시 최민혁의 행보를 꼼꼼하게 살폈기에 이런 변화를 뒤늦게라도 눈치를 챘다. 그녀는 최훈열 전무 사태까지 떠올렸다.
“멀쩡한 사람을 감옥에 보내지 않나. 그나마 있는 딸이 정신이 나가지 않나.”
최영란은 통곡하는 김이경 여사의 행동이 어이가 없었다.
“엄마는 나에게 한 행동에 대해서 전혀 기억나지 않지?”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래. 아, 예전에 만난 그 남자 친구 이야기하는 거냐? 이것아, 걔네 집안이 하는 것은 고작 매출액 50억이 채 안 되는 중소기업이야!”
“그게 어때서? 도대체 매출액이 뭐가 중요한데, 서로 사랑하면 그게 된 것 아냐?!!”
“다 지나 보면, 그때는 내가 왜 그 혼사를 막으려고 했는지 알 거다. 네 아빠가 다 널 위해서 그 일을 막은 거야. 고맙게 생각해!”
“정말 눈물 나게 고맙네. 그런데 어떻게 하나. 난 그런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김이경 여사도 딸의 행동이 심상치 않자 딸 눈치를 봤다. 그녀도 AD 설계에 대해서는 남편에게 들었다. 어지간한 대기업 재벌 3세보다 뛰어난 딸의 능력이 놀랍기만 했다.
결국 슬그머니 태도를 바꾸었다.
“…너, 외할아버지 유산은 어떻게 할 거야?”
최영란도 움찔했다. 외가 유산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깟 돈, 자신이 벌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깟 돈 필요 없으니까. 인제 그만 좀 가주라!!”
김이경 여사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최근 최문경 부회장이 퀄컴 인수 사태를 보면서 머리를 굴렸는데, 그 대안을 찾았다.
정확히는 AD 설계를 먹으려고 고민하다가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정략결혼이다.
최영란을 시집보내고 나면 AD 설계를 먹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결과는 곧 최용욱 회장에게 제대로 인정받는 일로 직결된다. AD 설계가 바로 비메모리 사업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는 최영란을 어떻게 해서라도 설득하려고 했다.
하지만 최영란의 반발은 생각보다 심했다.
모녀의 살벌한 싸움에 같이 이곳을 찾아온 수행원들은 쩔쩔맸다.
그들도 이제는 최영란 이사를 함부로 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명색이 AD 설계의 오너가 바로 최영란 이사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의 경호원이 문 입구에서 팔짱을 한 채 매의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필요에 따라서 간섭하기 위함이다.
결국 모녀간의 쟁투에 그들이 끼어들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최영란도 아주 집안과 벽을 쌓을 수는 없었다. 외가 문제도 있고, 최용욱 회장 일도 가볍게 생각하기 힘들었다.
김이경 여사가 최용욱 회장 핑계를 댄 채로 거짓말했다.
“…이번 일은 아버님 선에서 진행되는 일이야. 최소한 아버님을 생각한다면 무조건 거절해서는 곤란해. 만약 아버님께서 화를 낸다면 상황이 심각해질 거다.”
“…….”
최영란은 자신의 독립이 집안에서 허락받은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최용욱 회장의 이야기가 나오자 몸을 움찔 떨었다. 차마 최용욱 회장 말을 거역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녀는 쉽게 응하지 않았다.
“좋아. 하지만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결혼을 절대로 할 수가 없어. 그거 하나만 약속해!”
“그래, 알았다.”
김이경 여사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두 사람이 만나고 나면 어떻게 해서라도 상황을 진척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최영란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해서는 그녀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 AD 설계 매출이 서서히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도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한국처럼 인맥과 혈연으로 얽혀 있는 세상에서 단순한 영업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할아버지 최용욱의 도움이 필요했다. 물론 최민혁에게 부탁하는 게 가장 쉽게 처리하는 방법이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최민혁과 최문경 부회장의 관계 때문이다.
‘이게 모두 아버지 때문이야!’
그녀는 결국 여러 가지 이유로 김이경 여사와 타협을 한 셈이다.
그런데 상대는 소위 말하는 재벌 3세로, 겉으로 봐서는 나쁘지 않았다.
외모 역시 연예인 못지않은 외양이었다.
질척거리지도 않았고, 태도는 신사적이었다.
최영란도 첫 만남에서 호감을 느꼈다. 그녀가 최민혁에게 연락을 받은 것은 딱 이 문제 때문에 갈팡질팡할 무렵이었다.
[어, 알았어. 바로 찾아갈게.]
* * *
최영란은 정략결혼 대상자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한 상태로 별생각 없이 KM 전자 기획실장실에 있는 최민혁 실장을 찾았다.
“오 비서님, 안녕하세요.”
오혜정 비서는 반갑게 최영란 이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실장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우리 오 비서님은 나날이 아름다워지는 것 같아요.”
“어머, 아니에요.”
실상 오혜정 비서의 얼굴은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
최민혁 실장의 영향력이 어마 무시하게 커지면서 그녀 역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실상 KM 전자 내에서 오영근 사장조차 함부로 못 하는 것이 바로 오혜정 비서다.
최영란은 그걸 바로 알아봤다. 그녀는 오혜정 비서 외에 한선화 비서를 포함한 KM 전자 비서실의 비서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마치 미스코리아 대회나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최민혁 실장을 만난 자리에서 먼저 이 문제로 시비를 걸었다.
“너도 다른 남자랑 똑같구나.”
최민혁은 뜬금없는 소리에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오혜정 비서, 한선화 비서, 오수연 비서…….”
최민혁은 손을 들어서 그녀 입을 막았다.
“아, 아, 그만해, 알아들었으니까. 그런데 누나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녀들을 뽑은 사람은 우리 둘째 큰아버지 최훈열 전무님이셔.”
“어, 가만, 진짜야?”
“그 일을 벌써 잊은 거야? 둘째아버지가 한 일까지 이 자리에서 다 밝힐까?”
“아, 아니다.”
최영란 이사도 뒤늦게야 그녀들을 얻기 위해서 최훈열 전무가 한 일을 떠올렸다. 어렴풋하게나마 듣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제대로 몰랐다.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에 따른 보상을 해줬는데, 본인들은 회사에 계속 다니겠다고 하잖아. 그래서 그냥 둔 거야. 자꾸 이상한 놈으로 보면 난 억울해.”
최영란 이사는 가자미눈으로 최민혁을 째려봤다.
“정말이야?”
최민혁은 헛기침했다. 실상 좋은 게 좋다고 딱히 지금의 비서진이 싫지는 않았다. 다만 그걸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