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505화 (505/1,021)

#505.

기조실이 장승일 실장의 지시를 받아서 AD 설계를 갑자기 살피기 시작했다.

단순히 기업 현황이 아니라 기업 가치에 대한 평가가 이어졌다.

지금 한국 경제가 처한 상황을 고려할 때 AD 설계는 꽤 매력적인 회사였다.

기업 평가 역시 외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서 저평가되어 있다는 점이 컸다.

실상 전력 관리 칩 분야는 많은 경험이 필요하고, 부가가치가 높아서 대기업이 끼어들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주 고객들이 주로 독일이나 일본 회사 제품을 선택하는 이유다.

그런데 AD 설계에서 내놓은 전원 칩은 독일이나 일본 회사보다 품질이 높으면서 가격도 저렴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AD 설계를 조사하면 할수록 탐욕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그런 상황인데.

감히 자신이 만든 밥그릇에 숟가락을 올리다니.

분노한 그는 보고를 듣기가 무섭게 기획 조정실 문을 발로 찼다.

쾅 소리에 기조실 내에서 회의하는 이들조차 깜짝 놀랐다.

뒤에서 비서가 뒤늦게 막으려다가 안절부절못한 채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그 당사자가 최문경 부회장이라서 경비를 호출할 수도 없었다.

장승일 실장은 최문경 부회장이 조직폭력배 두목처럼 나타나자 혀를 찼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여전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장승일 실장의 태도에 최문경 부회장은 내심 혀를 찼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장 실장, 내가 분명히 선을 넘지 말라고 했지?!”

“그게 무슨…….”

“AD 설계.”

“아, 그거야 단순한 조사를 한 겁니다.”

“야, AD 설계 가치 평가, 성장 기회 조사, 본질 가치에 대한 검토, 심지어 인수합병 이후에 KM 산업의 당기 성과와 초과수익률까지 검토하는데, 그게 단순한 조사에 불과하다고?!”

“…네.”

장승일 실장은 아차 싶었다. 그 역시 최문경 부회장이 얼마 전부터 AD 설계에 찝쩍거린다는 것을 들었다. 심지어 방문까지 했으니까. 당시에는 설마 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단순하게 끝날 일은 아니었다.

“그래. 해봐, 어디 변명이나 한번 들어보자!”

장승일 실장은 경호원을 데리고 우르르 나타난 최문경 부회장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최근 최문경 부회장이 비서실을 총동원해서 AD 설계를 살피는 것을 보고받았다.

심지어 최문경 부회장이 이게 내 거라는 영역 표시를 한 것까지 들었다.

그게 그냥 나온 이야기가 아니었다.

장승일 실장은 최문경 부회장의 반응을 보고서야 상황을 깨달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안 그래도 ETRI의 반응 때문에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굳은 얼굴을 한 채 침을 튀겨가면서 눈을 부라렸다.

“장 실장, 너, 내가 우습게 보이지? 아버지 눈치만 보면, 내가 병신 같지?!”

장승일 실장은 그제야 한 걸음 물러나면서 다른 핑계를 댔다.

“…회장님 지시 사안입니다.”

“장 실장, 너 이 새끼야, 내가 지금까지 너를 대단하게 봐서…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거기서 아버지 이야기가 왜 나와?!”

“…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야,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 개새끼가 죽으려고 작정했나?!”

최문경 부회장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최민혁 실장 때문에 쌓인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장승일 실장은 어지간한 설득으로는 최문경 부회장이 물러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독기가 가득한 그의 눈이 증거였다.

과거라면 그도 최민혁의 언급을 하지 않을 테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최민혁 실장님이 AD 설계 인수에 대해서 최용욱 회장님에게 넌지시 제안했습니다.”

“뭐? 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장 실장 네놈이 부추겼잖아.”

“전 모르는 사실입니다.”

“그걸 지금 날 보고 믿으라고?”

“제가 언제 인수합병을 제안한 적이 있습니까?”

“개소리하지 마. 넌 날 못마땅하게 여겼잖아.”

최문경 부회장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결국 장승일 실장의 멱살을 잡았다.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장승일 실장의 행동에 더 분노했다. 그는 장승일 실장의 멱살을 잡은 채 심하게 흔들었다. 장승일 실장의 머리가 앞뒤로 세차게 흔들렸다.

“이 개새끼가 정말 죽으려고 작정했냐?”

그제야 난리가 났다.

경호원이 뒤늦게 최문경 부회장을 말렸다.

기획조정실 직원은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 사태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KM 그룹이 무슨 중소기업도 아닌데, 사내에서 폭력 행위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당사자가 기업 부회장이었다.

덕분에 장승일 실장은 크게 당황한 경비원의 도움을 얻어서 어렵지 않게 최문경 부회장 손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구겨진 자신의 양복을 가볍게 탁탁 털어서 구김을 없앴다.

지켜보는 이들은 그 냉정한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장승일 실장은 어이가 없어 하는 최문경 부회장을 쳐다보면서 다시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번 일은 회장님의 지시 사안입니다. 저로서는 오너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어서 버럭 소리쳤다.

“갑자기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게 말이 되냐. 정 아니라면 내가 이미 AD 설계를 인수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만 했으면 되잖아!!”

“…….”

이 발언에는 장승일 실장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기획조정실 임직원은 다들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AD 설계 오너가 최문경 부회장의 장녀 최영란이라는 것을 잘 아니까. 설마 장녀가 설립한 회사를 그 아버지가 인수하려 하다니.

그것도 강제로 말이다.

그걸 사람이 이렇게 많은 자리에서 스스로 폭로하다니.

장승일 실장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이 그나마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 비밀리에 AD 설계를 인수하려 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괜찮겠습니까?”

“씨발!”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이 자리에서 듣고 있는 귀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늦게 자책했다. AD 설계 인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한 짓이 더 문제였다.

“…오늘 일이 외부에 흘러나가면 너희는 회사에 다니기 싫다는 뜻으로 알겠다!”

이 말만 남긴 최문경 부회장은 휑하니 기획조정실을 나가 버렸다.

구길모 차장은 도대체 최문경 부회장이 왜 이 자리에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실장님, 몸은 괜찮습니까?”

그는 구길모 차장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기획조정실 직원과 비서실 인원을 쳐다보았다.

“아, 별일 아냐. 그보다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함구해. 괜히 문제를 더 키울 생각은 마. 아마 이 일이 알려지면 모르기는 몰라도 난리가 날 테니까.”

“…알겠습니다.”

장승일 실장은 답을 듣기는 들었지만 확신하지는 못했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에는 입이 가벼운 직원도 있었다.

사실 이 일이 알려져 봐야 자신도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최 부회장은 창피하겠지.’

그건 그것대로 골치였다.

그런데 문득 이 일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최 실장님은 이런 일까지 예상한 것일까? 아니겠지. 그렇지는 않을 거야.’

* * *

최민혁은 최용욱 회장에게 조언해 준 후에 KM 전자로 돌아와서 최용욱 회장의 동태를 살폈다.

다행히 KM 그룹 내에는 최민혁 숭상파가 제법 있었다.

조성돈 팀장은 이런 숭상파의 도움을 얻어서 장승일 실장의 행보를 파악했다.

“AD 설계를 기획조정실에서 다시 재검토하는 것 같습니다.”

“기획조정실 전체가 움직이는 겁니까?”

최민혁은 최영란이 얼마 전에 했던 전화 내용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최문경 부회장님이 눈독을 들이는 기업인데, 가만히 있습니까?”

“아닙니다. 아무래도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실상 최문경 부회장은 퀄컴 사태 이후에 최민혁, 최용욱 회장의 동선을 철저히 살폈다. 두 사람의 만남 이후에 일어난 일도 빼놓지 않았다.

그런데 기조실이 갑자기 AD 설계를 마치 인수합병이라도 할 것처럼 조사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최문경 부회장이 장승일 실장을 직접 찾아가서 멱살까지 잡고, 주먹다짐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최민혁은 어이가 없었다.

“정말 장승일 실장을 때렸답니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문제는 그런 소문이 지금 퍼지고 있다는 겁니다. 몇몇 언론에서 조사한다고 합니다.”

최민혁은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아무리 최문경 부회장이 요즘 정신 줄을 놓았다고 해도 이런 일이 생길지는 몰랐다.

“믿을 수가 없군요.”

“그것 때문에 기조실도 분위기가 좋지가 않습니다. 비서실도 최악입니다.”

“쯧.”

최민혁은 최문경 부회장이 자존심 때문에 장승일 실장과 싸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비밀에 부쳤겠지만 새는 입이 몇 개인데, 다 막을 수가 있겠나.

‘그런데 그 정도는 약과지.’

최문경 부회장은 단순히 장승일 실장과 사이가 나쁜 것이 아니었다.

그를 싫어하는 이는 생각보다 많았다.

그중에 하나가 최영란인데, 그의 인생 1회 차 때도 최문경 부회장과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건 최영란이 최문경 부회장의 간섭 때문에 당한 과거 일 때문이다.

‘특히 첫사랑과 깨진 것이 우리 첫째 큰아버지의 간섭 때문이었으니.’

두 사람은 소위 말하는 막장 드라마 한 편을 찍었다.

원래 최영란이 사랑하는 남자는 같은 대학 동창으로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녀가 그 남자에 빠진 것을 안 최문경 부회장이 덩치가 좋은 비서실 직원을 보내서 남자를 협박했다. 심지어 전치 두 달에 가까운 상처까지 입혔다.

하지만 남자는 쉽게 최영란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버릴 수 있는 영화 속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었다.

결국 최문경 부회장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그 남자의 집안을 흔들었다.

은행 라인을 이용해서 자금 압박.

심지어 협력 업체를 압박해서 자금난에 시달리게 하였다.

안 그래도 지병 때문에 힘들어하던 아버지가 입원하게 되자 남자는 울면서 최영란과 헤어졌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멜로드라마를 두 사람이 찍은 것이다.

하지만 최영란과 최문경 부회장의 사이는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신념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이다.

그녀가 최문경 부회장과 사이가 좋지 않은 최민혁과 가까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최민혁이 인생 1회 차에서 죽기 전까지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최민혁은 인생 1회 차를 떠올리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실상 자신의 영향력이 커지기는 했지만, KM 산업을 흔들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아이러니한 사실이지만 자신이 주도해서 계속 밀어붙인 KM 그룹 구조조정의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곳은 다름 아닌 KM 산업이었다.

부실한 파트는 다 잘라내고, 오직 수익성만을 집중한 결과.

KM 산업은 심지어 KM 전자의 영향력을 최대한 이용해서 인텔과 협력을 강화했다.

조성돈 팀장은 최근 퀄컴 인수를 둘러싸고 일어난 몇 가지 일을 보고했다.

“인텔이 KM 산업과 스마트 다이 제품 생산을 위한 기술협력 계획을 강화했습니다.”

이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황당한 것은 인텔의 반응이다.

“문제는 그들이 KM 산업을 자신의 파트너로 인정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최문경 부회장이 미국 내에서 미래 가치를 계속 키워가고 있는 KM 전자를 내세웠다는 점입니다.”

최민혁은 어이가 없었다.

“KM 그룹 홍보 팀에서 그렇게 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건 최문경 부회장이 직접 지시한 사안입니다.”

“하여간 잔머리하고는.”

그는 혀를 찼다. 샐로먼 브러더스가 휘청하자 최문경 부회장이 다른 꼼수를 쓴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부분은 무시하기 힘들다.

최문경 부회장은 이 수법을 절묘하게 활용해서 인생 1회 차에서 그 어렵다는 IMF 시기를 극복하고,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는 심지어 최민혁을 악착같이 감시해서 망가뜨렸다.

최민혁이 기억하는 인생 1회 차의 최문경 부회장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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