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
“미국 국무부를 통해서 나온 이야기겠죠. 그 배후에는 미국 정부에 로비하는 이들이 있을 거고, 그 세력은 에플 이사회나 유니버설 이사회와도 관련이 있을 겁니다.”
“설마 그 정도이겠느냐?”
“확실합니다. 의도적으로 그쪽을 만나서 정보를 흘렸으니까.”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이 기업 간의 만남조차 정보 공작 용도로 이용했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허허허.”
최민혁은 굳이 그 내막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이미 에플 인수설 때문에 잔뜩 독이 오른 이들일 겁니다. 그들은 제 미국행을 열심히 지켜봤을 거고, 기회가 되자 그런 식으로 끼어든 것뿐입니다.”
“하면 미국 5대 투자 은행 중의 하나인 샐로먼 브러더스는 지금까지 사냥개 역할을 했다는 거냐?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그런 짓을 한다는 거냐?!”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다만 미국 정부는 일본에 대해서 견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플라자 협상이 그 시작이었으니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지금 미국 정부의 행보는 일본 정부를 길들이는 장기적인 플랜의 일환일 겁니다.”
“…….”
최용욱 회장은 황당한 눈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가 장승일 실장을 다시 봤다.
장승일 실장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그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으니까. 다만 그 일이 이런 식으로 엮여 있을지는 상상도 못 했다.
아니, 짐작한다고 해도 그 일이 정말일까에 대해 의심했다.
그런데 그 증거가 이렇게 놓여 있었다.
“그렇다면 에플 인수도 문제가 되지 않느냐?”
“아마 문제가 되었을 겁니다. 다만 에플은 파산 직전인 상태였고, 심지어 인수합병 하려던 기업도 다 포기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물쩍 넘어간 것일 겁니다.”
그랬다.
에플 인수와 관련해서 미국 증권 거래 위원회 내부에서도 말이 많았다. 심지어 미국 국무부조차 실무진 선에서 검토가 이어졌다.
문제는 에플 상황이 간단하지 않았다. 일테면 계륵이었다.
누구도 에플 인수에 관심이 없는 상황에서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막기는 어려웠다.
더욱이 에플 CEO는 스티븐이었다. 최민혁 실장은 에플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에플의 부활을 도왔다.
그런데 최민혁이 미국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유니버설 측과 협상을 이어갔다.
“냅스트?”
“음악 고유 파일 프로그램입니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냐?”
최용욱 회장은 정말 몰라서 한 질문이었다.
최민혁은 냅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대략적으로 해주었다.
그걸 들은 최용욱 회장은 감탄했다.
“맙소사, 아니, 그런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KMP-01 매출에도 영향을 줘야 하지 않느냐?”
“아직은 널리 퍼지지 않아서 그렇죠.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겁니다. 냅스트의 성장은 가속화될 거고, 결국 KMP-01 매출에 영향을 줄 겁니다.”
“신기하구나. 미국은 늘 진일보한 기술로 세상을 놀라게 하던데, 냅스트라니.”
냅스트라는 아이디어에 놀란 최용욱 회장은 한동안 냅스트 찬양론을 폈다.
특히 그는 냅스트를 만든 선구적인 공학자에 대한 찬사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당사자는 정작 최민혁 자신이었다.
최민혁은 낮 뜨거운 최용욱 회장 칭찬에 급히 주제를 바꾸었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냅스트의 가능성을 본 유니버설 이사회로서는 에플의 차세대 무기를 보자 스티븐의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다만 이 정보를 사전에 알게 된 이들은 엉덩이가 들썩들썩했다.
그들은 최악의 상황에 대한 보험을 사전에 준비한 것이었다.
그게 미국 시민권였다.
정확히는 최민혁의 성향을 떠본 것이다.
최민혁이 어쭙잖은 애국심 타령을 해서 미친 짓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의 대화가 가능하다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최민혁은 철저한 기업가일 뿐이었다.
그것도 한국 경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였다.
실제로 최민혁의 행보는 한국 경제에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최대한 이익을 볼 수 있는 편성이었다.
최용욱 회장이 아무리 관록이 있다고 해도 이런 점까지 알아보지는 못했다. 다만 그는 미국 상황이 석연치 않다는 점을 느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SEC까지 움직인 이유는 뭘까요? 뭔가 노림수가 있다는 거죠. 단순히 기업 차원에서의 문제가 아닙니다. 네, 아마 일본이란 나라가 타깃일 겁니다. 그런데 그 공격 대상에는 일본 대기업이 포함되는데, 문제는 그들이 한국 경제와 연결 고리가 있다는 거죠.”
“…설마 단기 일본 자금을 말하는 거냐? 하면 미국 정부가 아예 작정하고 한국도 노린다는 말이야?”
“미국 정부가 딱히 한국을 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한국 주변국에 이상이 생기면, 일본이 무지막지하게 투자한 동남아가 대표적입니다. 아마 그렇게 된다면, 한국 경제는 큰 타격을 받을 겁니다. 그건 곧 한국의 경제 위기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동남아 경제가 무너지면, 한국 기업은 돈을 못 받는다. 그게 다 적자가 될 테니까. 만약 그런 상황에서 일본 단기 자금이 다 빠져나가면 메가톤급의 충격을 받는다.
“…….”
최용욱 회장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전처럼 최민혁의 주장을 비웃지 않았다. 장승일 실장이 중심이 되어서 이미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당히 검토했기 때문이다.
즉, 낮은 확률이기는 하지만 최민혁의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최민혁은 뜻밖에 최용욱 회장이 순순히 자기주장에 귀를 기울이자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러니 이제부터 두 번째 구조조정을 진행해야 할 겁니다. KM 반도체 기술이 하는 장난 따위에 관심을 버리세요. 핵심 계열사 10개만 남기고 나머지 기업은 다 정리하셔야 합니다.”
“글쎄다. 그건 좀 너무 나간 이야기 같구나.”
최민혁은 단호했다.
“아뇨. 어차피 하게 될 겁니다. 대신 지금 하면 기업 매각대금으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최문경 부회장은 이런 일을 처리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차라리 최영란 누나를 활용해 보세요. AD 설계를 인수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누나에게 직위, 음, 부사장 정도가 좋겠네요. 지분도 주고 말입니다.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견제와 균형입니다.”
“…….”
최용욱 회장이 아마 몇 달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당장 손자 최민혁의 다리를 부러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최민혁의 주장은 그럴듯했다.
장승일 실장이 주도해서 기획 조정실에서 조사한 내용 중에 지역 금융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 있었다. 이미 자금이 빈약한 저축 은행이 지속해서 문을 닫았다.
정부가 나서서 언론을 압박한 탓에 그 이야기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아는 이들은 이미 익히 다는 사실이었다.
AD 설계 역시 마찬가지다.
기조실에서 이미 조사한 바로는 KM 계열사 중에서는 가장 성공한 기업이고,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높은 기업이었다.
설사 그게 한전이란 공기업 도움을 얻었다고 해도 그 결과 자체가 퇴색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최민혁이 일어나서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도 잡지 못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X 리포트를 보면서 늘 뭔가 있다고만 생각했지 그 대안은 찾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최민혁이 제안한 대안은 딱 맞춤형 대답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 * *
최용욱 회장은 한동안 회사에 출근도 하지 않은 채 저택에서 손자 최민혁이 던진 화두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심지어 손자 최민혁의 행보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부채를 철저하게 관리하는 경영 행보.
굳이 미국 투자를 늘리고, 미국 기업을 사들이는 동선.
심지어 KM 전자 내부에 쌓인 막대한 현금과 금 역시 예외는 아니다.
마치 전쟁을 대비해서 화약과 식량을 채워 넣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마 최민혁의 성과가 없었다면 미친놈 취급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 SEC와 국무부조차 손자 최민혁의 능력을 인정했다.
이건 이야기가 좀 달랐다.
최용욱 회장은 한동안 깊은 생각을 한 끝에 장승일 실장을 집으로 불렀다.
“장 실장, 민혁이 의견에 대해서 한번 말해 보게.”
장승일 실장 역시 최민혁 실장 이야기를 듣고 나서 기조실 인원을 총동원해서 X 리포트 관련 보고서를 원점에서 살폈다.
이제는 단순히 추론이 아니라 가능성을 이야기해도 좋았다.
“아무래도 일본 경제 위기에 한국도 피해 가기 어렵다는 뜻 같습니다. 미국 정부가 굳이 헤지펀드를 이용한 것도 한 대안일 겁니다. 아무래도 일본은 미국 동맹국이니, 민간 자본을 이용한 겁니다.”
“직접적인 간섭은 어려워도 간접적인 묵인을 통한 방법은 가능하다?”
“네.”
“좀 쉽게 말해 봐!”
“일테면 미국 정부에서 헤지펀드를 규제할 장치는 없지만, 뒤로는 얼마든지 묵인을 할 수는 있으니까요.”
“그건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지만 그놈들이 왜 우리를 노린다는 말인가?”
“우리를 노리는 것은 아닐 겁니다. 미국 정부가 압력을 넣은 상대는 바로 일본 정부입니다. 일본 경제가 흔들리면 일본 단기 자금은 급속히 빠져나갈 겁니다. 아마 최 실장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저것일 겁니다.”
“그게 가능한 소리야?!”
“…그 부분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최 실장님은 이에 따른 위기를 철저하게 대비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KM 전자만 해도 본사는 물론이고, 해외 지사에도 달러를 쌓아 두기만 합니다.”
최용욱 회장은 기가 막혔지만 한 가지 사실을 금방 떠올렸다.
“하면 샐로먼 브러더스는… 놈들의 하수꾼이나 마찬가지란 말인가?”
“그럴 겁니다. 일본에 대한 작업을 하기 전에 문제가 될 최민혁 실장을 따로 만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에플이나 퀄컴의 분위기를 봐서는 실장님이 이 일에 끼어들면 문제가 아주 복잡해집니다. SEC가 국무부를 대리해서 최민혁 실장님을 만난 것이 그 이유일 겁니다.”
“장 실장, 자네는 그 말이 믿어져?”
장승일 실장도 막상 자신이 추리한 의견이지만 확신하지는 못했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최민혁 실장님의 역량은 진짜라는 겁니다. 그것도 미국 SEC가 인정했을 정도로 말입니다.”
최용욱 회장은 장승일 실장 대답에 더 황당해져서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설마 장승일 실장이 저런 대답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역시 장남 최문경 부회장이 샐로먼 브러더스와 손을 잡은 것을 잘 알았다. 그 역시 이 일을 넌지시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봐서는 샐로먼 브러더스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최문경 부회장을 장기말로 쓰려는 것처럼 보였다.
정확히는 KM 그룹을 이용해서 뭔가 획책하려는 것이 있는 듯했다.
최용욱 회장은 그제야 과거 샐로먼 브러더스가 줄기차게 요구한 것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연합 SB도 그 한 예다.
그는 뒤늦게야 자기 얼굴을 사자 입에 들이댔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추측이지만 개연성이 너무 높았다.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간단한 문제가 아니구나.’
그제야 최민혁이 한 조언이 떠올랐다.
최문경 부회장은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에는 맞지 않다는 점과.
이 위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인재로 꼽은 것이 바로 손녀 최영란이었다.
“…AD 설계와 관련된 보고서를 가져와 봐. 아니, 최근 현황까지 조사한 내용을 추가해서 정리해 와.”
“…알겠습니다.”
장승일 실장은 딱히 최용욱 회장 지시를 반박하지 않았다. 그 역시 AD 설계의 현황을 잘 알았다. KM 계열사 중에는 KM 전자를 제외하고는 가장 안정적인 성장을 하는 기업이기 때문이다.
‘특히 비메모리 쪽으로는 제대로 성공한 경우이니까.’
* * *
최문경 부회장은 과거처럼 어수룩하게 최민혁 실장을 지켜보지 않았다.
그는 솔직히 김명준 과장을 위시한 최강의 경호 팀이 없었다면 납치극이라도 벌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만약 그런 짓을 하다가 걸리면 자살골이나 마찬가지다.
최민혁이 그걸 명분으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살인 교사범으로 몰려나?’
그런 그이기에 최용욱 회장도 소극적으로 살피지 않았다.
당장 내일이라도 관 속에 들어갈 것 같았던 양반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시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