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503화 (503/1,021)

#503.

최민혁은 괜한 오해를 받기 싫었다. 이미 퀄컴과 ETRI를 이용해서 홍보 효과도 봤다. 굳이 이런 상황에서 진흙탕 싸움할 필요는 없다.

애매한 지적보다는 인생 1회 차의 기억을 떠올렸다. 특히 KM 반도체 기술과 관련된 정보를 떠올렸다.

‘정작 이런 아이템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오히려 기존 아이템을 좀 더 발전시킬 필요가 있어. 어차피 할아버지도 계열사 매각을 진지하게 생각한다고 들었으니, 차라리 이번 기회를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일까?’

잠깐 최용욱의 눈치를 봤다.

확실히 이전에 자신을 대할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꽤나 차분하게 자기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몇 개월 전과 비교하면 가히 놀라운 변화였다.

꼰대의 정점에 이른 최용욱 회장이 자기 눈치를 보다니.

‘세상은 이래서 재미있다니까.’

그런데 자기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최용욱 회장만이 아니다.

자신이 자리에 멈추자 드러난 상황.

KM 그룹 경영진, 기자, 심지어 뒤쪽에서 구경하는 시민까지 수백 명의 시선이 최민혁의 입만 쳐다본 채 침묵했다.

그야말로 드라마의 한 장면이 아닌가.

최민혁은 심지어 핸드폰 카메라로 자신을 찍는 시민을 보면서 씩 웃었다.

그렇다면 이 자리는 자기 PR 자리였다. 굳이 그 기회를 마다치 않았다. 다만 이럴 때 신비주의로 치장한 CDMA 관련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

더 보수적인 태도가 필요했다.

“COF 매출과 리드프레임 매출이 계속 줄어드는 것으로 압니다.”

COF는 와이어 본딩을 대체하는 기술로 칩과 필름을 연결하고, 리드프레임은 반도체칩과 외부 회로를 연결하는 금속 기판이다.

최용욱 회장은 손자의 동문서답에 화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의문을 드러냈다.

“…리드프레임의 생산성 감소를 말하는 거냐?”

“네, 특히 원가 상승이 문제인데, 수익성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최용욱 회장 역시 KM 산업 사장에게 보고를 듣기에 아는 내용이다. 다만 자세한 것은 몰랐다. 그가 그룹에 복귀하기는 했지만 자잘한 것은 최문경 부회장에게 다 맡겼으니까.

그는 이보다 손자 최민혁이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아는지 신기했다.

“후도금 생성을 추가해서 경쟁력이 꽤 늘어난 것으로 안다. 아마 수익성은 앞으로 나아질 거야.”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장 실장 이야기로는 꼭 부정적이지 않아. 아쿠텍 플레이팅 고도 기술을 활용해서 COF 사업 부분도 큰 성장을 할 거야.”

아쿠텍 플레이팅 기술은 삼원합금 도금 기술이다. 환경친화적이고, 원가 절감에도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최민혁은 이 기술이 안정화되는 데, 시간이 많이 요구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 기술은 적어도 3~4년은 족히 지나야 쓸 만한 겁니다.”

“안다. 하지만 어떤 기술이라도 다르지 않아. 시간이 필요해.”

최민혁은 그제야 회귀 이후에 자신이 그동안 하고 싶었던 주제를 넌지시 꺼냈다.

“그 기간 동안 별일이 없다면 그럴 겁니다. 만약 외부 충격이 가해진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과연 그때도 아쿠텍 플레이팅 기술 개발에 집중할 수 있습니까?”

“그거야…….”

“그런 와중에 계속 수율 문제가 터져 나오면, 최악에는 기술을 포기해야 할 겁니다. 아니면 다른 경쟁사에 그 기술을 넘기는 방법도 있군요.”

아무리 KM 계열사 제품이라고 해도 수율이 많이 생긴다면 바로 적용하기 힘들다.

실제로 계열사가 헐값에 매각된 이후에 그렇게 되었다.

최용욱 회장은 설마 그럴까 싶어서 KM 반도체 기술 사장인 조병근을 쳐다보았다.

“…….”

실무진과 속닥이다가 따가운 최병욱 회장의 시선을 느낀 조병근 사장은 역시나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최민혁 실장이 이런 문제를 어떻게 아는지 그게 더 궁금한 눈치였다.

옆에서 지켜보는 기자들의 시선은 복잡했다. 그들이 원하는 쇼가 아니었다. 최민혁이 퀄컴 인수를 통해서 이룩한 자기 성과가 나올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랐다.

COF가 뭐가 중요한가.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 그걸 아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최용욱 회장이 손자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넌 최근 퀄컴 인수 때문에 미국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 사실을 어떻게 아는 거냐?”

그제야 기자 반응이 바뀌었다.

그들은 대화에 집중했다.

하지만 최민혁은 그런 기자의 호기심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 집안일도 제대로 모르고, 어떻게 외부 기업 일에 집중하겠습니까?”

“너에게 그런 소리를 다 듣게 되다니.”

허탈한 최용욱 회장은 그저 웃기만 했다.

최민혁은 그제야 넌지시 한마디 해주었다.

“알음알음 듣는 채널이 있어요.”

“그러냐?”

사실 최용욱 회장이 최민혁을 호출한 것은 바로 미국에서 있었던 퀄컴 인수 관련 일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손자는 KM 계열사의 리스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를 설명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마냥 허황되기만 한 게 아니었다.

실제로 KM 산업이 항상 안정적인 경영을 할 것이라 장담 못 하니까.

아마 최용욱 회장이 X 리포트에 대해서 몰랐다면 웃고 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장승일 실장 통해서 이 X 리포트의 위험성을 파악했다.

최민혁의 이야기가 그냥 하는 말로 들리지 않았다.

‘진짜 보고서대로 흘러간다면…….’

지금 KM 반도체 기술이 하는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셧다운 될 것이다. 심지어 헐값에 팔아치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부분은 이 자리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이야기는 다시 하자꾸나.”

그는 보좌관에게 말해서 일단 이야기를 멈춘 후에 최민혁과 같이 자리를 떠났다.

따라붙는 기자들이 아우성쳤지만 두 사람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김명준 과장을 위시한 경호원이 험악한 표정으로 기자들을 막아섰다.

공허한 외침만이 남을 뿐이었다.

[최 실장님!!!]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이 정도면 보수적인 기사가 나오겠지.’

* * *

최근 최민혁 실장과 ETRI의 행보는 뜨거운 감자였다.

뉴스 기사 대부분이 이들의 밀행을 보도했기 때문이다.

특히 CDMA의 원천기술, 정부의 CDMA 정책과도 관련이 있었다.

정부 기관 내에서는 TDMA와 CDMA 사이의 갈등이기도 했다.

이들 관련 기관이 언론에서 뉴스를 흘린 덕분에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TDMA 진영 쪽에서 로비를 받은 언론은 이미 TDMA가 상업적인 서비스 면에서 CDMA를 따돌렸으니, 무리한 투자를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최민혁 실장은 KM 그룹 계열사의 기술을 가지고 딴소리를 늘어놓았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맞기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언론은 최민혁 실장의 공격적인 행보를 기대하는 눈치를 보였다.

좀 더 정보를 풀라는 강압이다.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을 둘러싼 이 기사를 보면서 혀를 찼다. 하지만 그는 한국 언론에 놀아나지 않았다.

그는 실상 이미 장승일 실장을 통해서 1차로 정리한 계열사에 대한 것을 보고받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냉정하게 다시 원점에서 생각해 보았다.

불필요한 인력을 다 솎아내고, 남은 기업은 그래도 흑자이거나 미래 가치가 있는 기업이었다.

그런데 이런 그의 생각이 바뀐 것은 최민혁의 인수 합병 행보 때문이었다.

와컴을 비롯해서 최민혁이 인수한 대부분 기업은 원천기술을 가진 기업이다.

심지어 퀄컴 역시 예외는 아니다.

아니, 퀄컴 경우는 좀 달랐다.

다른 기업과는 달리 핫한 기업 중의 하나니까.

따라서 최민혁이 인수한 기업과 KM 그룹 계열사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KM 전자는 앞으로 미래 가치가 무궁무진한 기업인 반면에 KM 그룹은 현상 유지에 급급하다가 외부 충격을 받으면 사상누각처럼 와르르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최용욱 회장은 퀄컴 사건 이후에 최문경 부회장을 믿을 수가 없어서 본인이 직접 나서서 KM 그룹 계열사를 샅샅이 살폈고, 각 계열사에 미션을 부여했다.

KM 반도체 기술이 대표적이었다.

그리고 손자 최민혁에게 그 평가를 듣고 싶었다.

최소한 최민혁도 자신의 경영 능력을 높이 평가하지는 않아도 인정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최민혁으로부터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불안한 미래 이야기만 들었다.

최용욱 회장은 덕분에 1차적으로 다시 검토한 보고서를 읽은 후에 최민혁을 불러 놓고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보좌관뿐만 아니라 장승일 기획 조정실 실장까지 차갑게 쳐다보았다.

장승일 기획 조정실 실장은 최용욱 회장의 시선에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의 눈에는 그게 당연할 거라고 봤다.

그는 한편으로 억울했다.

최문경 부회장의 압박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이 그걸 모를 수가 없었다.

“장 실장, 자네는 최선을 다한 것이 맞아?”

“회장님, 죄송합니다.”

“난 지금 그런 말을 듣자는 게 아니야. 도대체 미국에 가 있는 민혁이 이 녀석이 딱 10분 동안 살핀 것도 눈치를 못 채서 하는 말이잖아. 리스크 관리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

장승일 실장은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무슨 말을 해도 먹힐 것 같지가 않았다. 실상 이번 행사는 리스크 관리에 대응하는 측면이 있었다. 즉, 목표하고는 관계가 없었다.

그저 쇼만 했을 뿐이다.

최민혁은 그 광경을 묵묵히 보고 있다가 그냥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뒀다가는 최용욱 회장이 하루 종일 질책할 것이 뻔했다.

아니, 이런 자리에 또 오고 싶지 않았다.

“회장님, 무슨 일 때문에 다시 절 부르신 거죠? 설마 지난번처럼 KM 그룹 계열사 자랑하려고 호출한 겁니까?”

이미 감정이 상한 최용욱 회장이 버럭 소리쳤다.

“넌 말이 왜 그러냐. 명색이 저래 봬도 우리 KM 그룹 계열사 중의 하나야!!”

그는 그제야 최용욱 회장의 호출 의도를 이해했다. 최용욱 회장은 자신의 조언에 따른 KM 그룹 구조조정의 성과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다음은 자신의 조언을 받아서 고쳐 나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혹평했으니.

잠깐의 고민.

과거라면 최용욱 회장에게 냉정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최문경 부회장을 서서히 정리해야 했다.

“제가 갑자기 미국에 간 것은 스티븐을 도와줄 목적도 있지만 지금 KM 전자의 주가 때문이기도 합니다.”

최용욱 회장도 스티븐 부분은 이해했지만, KM 전자의 주가란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KM 전자 주가에 대한 것을 하필이면 미국에서 찾는 거냐?”

“이번 일이 샐로먼 브러더스 짓인지는 할아버지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거야…….”

최용욱 회장도 헛기침했다. 그 역시 장승일 실장을 통해서 충분한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갈등은 손자 최민혁에게도 역시 문제가 있다고 들었다.

“…내가 알기로 샐로먼 쪽에서 충분히 협상의 여지가 있었다고 들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그런데 네가 일방적으로 거절했다고 들었다.”

“과연 그럴까요? 정말 그놈들이 그렇게 순진한 놈으로 보입니까?”

“네가 그들에게 한 요구 조건이 문경이 그 녀석과 손을 끊으라고…….”

최민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고작 그런 이유로 그들과 협상을 아예 하지 않으려고 했겠습니까?”

최용욱 회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아는 바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설마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거냐?”

최민혁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내걸었다.

“어차피 샐로먼 브러더스가 하려던 일은 우리 부회장님과는 관련이 없어요. 겉으로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물론 실제로 초점을 자꾸 그쪽으로 맞추려고 합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그건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무슨 뜻이냐?”

최민혁은 대답보다는 미국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말해주었다. 특히 미국 증권거래위원회 기업금융부국장을 만난 일이다.

최용욱 회장은 입을 살짝 벌리고 말았다. 장승일 전략 기획실 실장 역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SEC 측에서 미국 시민권을 제안했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구나. 더 황당한 것은 이미 시민권을 받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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