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
최민혁 실장이 수십 명의 ETRI 연구원을 초청해서 강연하는 일은 당연히 KM 전자 직원들도 알 수밖에 없었다.
KM 전자 본사를 통해서 그들이 움직였을 뿐 아니라 건물 입구에는 아예 대놓고 정보를 흘렸기 때문이다.
[ETRI CDMA 연구원을 환영합니다!]
이 모습을 본 KM 전자 임직원들은 이런저런 썰을 풀었다.
그중에는 원래 마케팅 팀에서 재무 팀으로 보직 이동 한 후에 회사 생활에 잘 적응한 민성일 과장 역시 빼놓기 어렵다.
그는 본사 건물 출입구 앞에 있는 휴게실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그 모습을 봤다.
“회사 생활은 어때?”
말이 없는 이정훈 대리는 아직도 긴가민가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홍보 팀의 전희주 과장은 괜찮은 사람이야.”
“아, 그건 잘 압니다. 이용식 부장님도 괄괄하기는 하지만 은근히 잘 챙겨줍니다. 다만 회식에는 좀 인색해서 말이 좀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만족합니다.”
이용식 부장은 사람이 좋아서 홍보 팀 내의 평판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굳이 무리수를 두지 않아서 딱히 눈총을 받는 이는 아니었다.
대학 2년 후배인 이정훈 대리에게 이직을 권유한 민성일 과장은 우르르 몰려가는 ETRI 박사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로서는 신기한 일이었다.
“…가끔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있지. 그건 모두 최민혁 실장님과 관련된 일이니까. 그것만 빼면, 나머지는 큰 문제가 없을 거야.”
“그게 정작 문제입니다. 최민혁 실장님과 관련이 되면 제 상식이 산산이 부서집니다.”
“쯧.”
민성일 과장은 혀를 찼다. 그 역시 이 고루한 후배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잘 안다. 그런데 이건 경험해 보지 않는 이상 알기 어렵다.
자신이 대표적인 증거였다.
“내 이야기를 아직 못 믿어?”
“믿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직하지 않았을 겁니다. 원래 계획대로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이었을 겁니다.”
“대학원 나와도 달라지는 것 없어. 이미 회사 공지가 나갔잖아. 다른 아이디어가 있으면, 기획 팀에 사업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차라리 그걸 노려!”
하지만 이정훈 대리는 이미 LC 전자에 있을 때 여러 가지 경우를 봤다. 그는 아무리 선배 말이라고 해도 아직은 KM 전자를 믿지 않았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저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민성일 과장이 턱짓으로 가르키는 곳.
그곳에서는 차량에서 내린 30명의 ETRI 연구진이 우르르 몰려가는 중이었다. 그들은 요즘 뉴스에서 그렇게 물고 빠는 KM 전자의 본사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퀄컴 인수 이후에 KM 전자의 주가는 한국 언론 모두의 관심사였다.
대중 역시 40만 원을 훌쩍 넘긴 KM 전자의 주가 상승세가 언제까지 이어지나 궁금했던 것이다. 애초에 다들 한국 증시라는 틀 내에서 KM 전자 주가의 상승세는 한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러한 틀을 깬 것이 바로 KM 전자였다. KM 전자는 전 세계 모든 투자 자본을 흡수했다. 이런 현상은 한국 증시 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정훈 대리의 반응은 다른 이들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홍보 팀이나 재무 팀에서 두 사람을 따라 같이 내려와서 담배를 피우는 이들도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최민혁 실장이 이제까지 했던 일들은 그들의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것이다.
민성일 과장은 단언했다.
“내가 장담하지만 이건 우리 회사만의 문제가 아니야. 당장 KM 그룹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이정훈 대리는 이미 언론에서 큰아버지와 조카의 난이라는 황당한 기사를 써 냈던 걸 떠올리면서 툴툴거렸다.
“…한창 후계 싸움 문제로 시끄러웠던 최문경 부회장을 말하는 겁니까?”
“그래.”
민성일 과장은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주변 일보다는 지금 자신의 삶에 더 만족했다. 최민혁 실장이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든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최민혁 실장님은 이미 직원들에게 독립에 대해 약속을 했어. 따라서 이제 기회는 자기들 하기 나름이니까.’
* * *
KM 전자 직원들에게서 시작된 변화는 KM 그룹 계열사 곳곳에도 전해졌다.
그들은 서로 모이기만 하면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의 행보와 관련한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ETRI의 박사급 인재들이 KM 전자 본사로 몰려와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아무리 들어도 선뜻 믿어지지 않는 소식이었다.
당연히 이 정보는 최문경 부회장의 귀에도 흘러들어 갔다.
그다음으로는 데니스 샐로먼에게 넘어갔다.
이 정보는 다시 바다 건너서 샐로먼 브러더스 본사에까지 보고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샐로먼 브러더스 본사 내에도 여러 세력이 엮여 있던 터라 그 통로를 따라서 다시 입소문이 돌고 돌아서 퍼져 나갔다.
이 효과는 퀄컴 주가에서 바로 나타났다. 퀄컴 주가가 1.3 달러 주가를 행보하다가 갑자기 1.5달러를 넘어서 1.7달러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건 단순히 최민혁이 퀄컴을 인수했다는 공시 때문이 아니었다.
이보다는 ETRI의 CDMA 상업화가 본궤도에 오를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퀄컴의 주가 폭등은 결국 돌고 돌아서 한국 언론에서도 관심을 두었다.
[미다스의 손, 최민혁 실장의 퀄컴 투자는 또 대박인가!]
[최민혁 실장이 얼마 전에 개인 돈으로 퀄컴을 인수했다. 이 일은 미국 내의 통신사 지분 인수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다만 이 투자가 과연 상장 이후에 1달러 선을 넘지 못했던 퀄컴의 가치에 영향을 주겠느냐는 의문도 있었다.
그런데 불과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퀄컴 주가는 무려 70% 가까이 폭등했다.
최민혁 실장의 이런 투자 결과는 가히 투자의 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민혁은 한국 언론조차 자신이 그린 그림대로 흘러가는 것을 보자 그제야 주변을 돌아보았다.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벌써 KM 그룹 기조실 직원까지 보내서 자신을 호출한 최용욱 회장이었다.
지금까지는 바쁘다는 핑계로 최용욱 회장을 찾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충분히 애가 타겠지? 계열사를 다시 들여다본다는 소식도 있으니까.’
그는 장승일 실장에게 전화해서 최용욱 회장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다.
장소는 서울 인터컨티넨탈 호텔이었다.
해당 호텔에서는 TV나 VCR 화면에 다양한 문자를 띄울 수 있는 칩 발표회가 열리고 있었다. 주로 노래방, 비디오 CD 등에 응용할 수 있는 제법이었다.
마이컴과 DRAM이 내장된 제품으로 나름 기술력이 꽤 필요했다.
퀄컴 인수로 이미 뜨거운 주목을 받은 KM 전자 때문에 워낙에 KM 그룹에 관한 관심이 커져서인지 이 발표회에 기자들 수십 명이 몰려와서 열띤 취재를 벌였다.
KM 그룹은 이번 구조조정에서 오히려 투자를 대폭 늘렸던 KM 반도체의 기술을 공개함으로써 이번 발표회에서 자부심을 한껏 드러내 보였다.
그런데 최민혁이 나타나자 분위기는 아주 달라졌다.
[최 실장님, 퀄컴 인수를 굳이 개인 자금으로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KM 전자 내에 현금이 넘쳐난다고 알고 있는데, 굳이 그 자금을 사용해서 퀄컴을 인수하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최근 ETRI의 박사 오십여 명이 KM 전자 중앙 연구소를 찾았다고 하는데, CDMA 시스템 연구 때문입니까?]
갑자기 나타난 최민혁 때문에 기자들의 통제가 잘 되지 않았다.
그들은 저마다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경호원이 나서서 기자들을 통제해도 그들의 열기를 막기는 어려웠다.
최민혁은 아무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한 채 그저 기자들 사이를 지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자들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 * *
갑자기 이어진 임시 기자회견의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을 둘러싼 이야기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퀄컴 인수와 관련해서는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미국 통신 보안 문제와 관련이 있는 퀄컴을 최민혁 실장이 무슨 재주로 해결했는지가 의문투성이었기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을 향한 카메라가 모두 최민혁 실장을 향했다.
최민혁은 마치 최고의 톱스타인 양 기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최용욱 회장은 KM 그룹의 홍보 팀이 나서서 어렵게 만든 무대가 쑥대밭이 되자 어이가 없었다.
“…누가 보면 오늘 발표회는 네가 주인공인 걸로 알겠구나.”
최민혁은 꽤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애초에 퀄컴 인수와 ETRI 특강은 다 이 목적으로 만든 일종의 쇼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오고 간 기술이 가짜는 아니었다.
엄연히 KM 전자 특허 팀에서 특허출원도 하고, 관리하기 때문이다.
“질투가 나십니까?”
“허허허.”
최용욱 회장은 딱히 손자를 시기하지 않았다. 그저 황당해서 웃을 뿐이다. 그는 민혁을 보면 일단 혼쭐을 내려고 했는데, 그럴 힘조차 나지 않았다.
경호원이 벽을 쳐도 아우성치는 기자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단 한 푼의 로비도 하지 않았음에도 최민혁에 대한 인기는 무서웠다.
‘하긴 퀄컴 인수 후에 KM 전자의 인지도는 이전과는 아주 달라졌으니까.’
이건 장승일 기획조정실 실장이 따로 외부에 용역을 줘서 얻은 조사 결과였다.
최용욱 회장도 직접 그 결과를 인식하자 이제는 최민혁이 손자라는 생각마저 들지 않았다. 그는 결국 자신이 일방적으로 최민혁을 호출할 수가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결국 두 손을 든 그는 이보다는 노래방 기기 시장을 노린 제품을 보여 주었다.
“민혁아, 어떠냐?”
최민혁은 최근 ETRI 강연 탓에 쌓인 피로 때문에 하품하면서 물끄러미 스페이스 칩을 살폈다. 그가 보기에는 딱히 대단한 기술이 들어간 제품이 아니었다.
그는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조병근 사장을 비롯한 김원주 부장, 이근식 부장이었다.
그들은 마치 스타를 보는 일반인처럼 멍하니 최민혁의 입에 집중했다.
조병근 사장은 최문경 부회장 라인이고, 이근식 부장 역시 마찬가지다.
흥미로운 이는 김원주 부장으로, 최훈열 전무의 외가 인물이다.
그는 혀를 찼다. 다만 세 사람은 낙하산임에도 그렇게 무능한 편은 아니었다.
스페이스 칩이 그 증거였다.
‘다만 방향이 문제지. 물론 비메모리 사업에 대한 사전 정지 작업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큰 의미는 없어. 영란 누나의 AD 설계를 벤치마킹한 것 같은데, 시장이 전혀 다르니까.’
최민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 KM 그룹의 구조조정 성과는 괜찮았다. 비록 낙하산 인사라고 해도 능력이 있는 이들이 남았으니까.
다만 이들이 IMF라는 쓰나미를 견딜 수 있는 인재는 아니었다.
‘차라리 영란 누나가 괜찮지.’
이미 국내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최영란 이사의 전화를 받았다.
최영란은 주로 자기 아버지 최문경 부회장의 탐욕을 싸잡아서 비난했다.
바로 AD 설계에 대해서 집착하는 최문경 부회장을 욕한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고역이기는 했지만 나름 최문경 부회장의 행적을 들은 것으로 만족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할아버지도 별반 다르지는 않지. 하지만 고인물로는 한계가 있지. 그렇다고 새로운 인물을 당장 포섭하려고 해도 마땅한 인재가 보이지 않을 테니까.’
최민혁은 딱히 자신이 어떤 제안을 하기에도, 충고하기에도 마땅치가 않았다.
“…….”
최용욱 회장은 손자 최민혁의 얼굴이 괴상한 것을 보자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나름 이 사업이면 괜찮다 싶었는데, 손자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그건 다른 말로 사업의 비전이 없다는 거다.
그렇다고 그냥 침묵만 하게 둘 수는 없었다.
“솔직히 네 생각을 듣고 싶구나.”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자기 입에 집중하는 이들의 표정을 보자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토끼처럼 귀를 세우고 있는 기자들이었다.
여기서 한 한마디가 기사화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곳은 기자를 초청한 장소다. 기자가 번거롭다고 내쫓을 수도 없었다.
최민혁은 결국 굳은 얼굴을 한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에 조병근 사장, 김원주 부장, 이근식 부장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했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좀비처럼 거무죽죽하게 변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