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
이는 KM 전자의 인력을 이용한 방법이다.
물론 ETRI 쪽의 전문가가 표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다만 KM 전자 본사 중앙 연구소로 초청을 받은 오현종 박사, 김승구 팀장, 김문호 박사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최민혁의 제안을 받아서 KM 전자 기획 팀 직원 교육을 맡았다.
대신 최민혁은 이들 세 사람과 ETRI 쪽의 핵심 실무진만을 따로 뽑았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최민혁 실장이 내놓은 부분 중에는 지금 ETRI에서 작업 중인 부분과 맞지 않는 부분이 좀 있었다.
이론과 현실이 서로 들어맞지 않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최민혁은 이런 점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다 해 주었다.
“CDMA 셀룰라 시스템은 사용자의 통신량에 따라서 시스템 성능 자체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각 셀당 간섭 효과를 토대로 어느 정도 계산이 가능합니다.”
CDMA 셀은 동일한 크기라고 가정할 때의 이야기인데, 여기에 대응되는 전파 모델을 어느 정도 수식화할 수가 있다.
각 셀 구조와 좌표에 따라서 좌표 체계는 일방적인 직교 함수와는 다르다.
최민혁은 각 셀에 따른 간섭 한계를 수식화해서 간섭 문제를 정리했다.
다만 이 이론 자체는 어설픈 점이 있다.
그 역시 굳이 이 문제를 스스로 다 적용해서 설명하지는 않았다.
‘나도 다 아는 것은 아니니까.’
1회 차에서 얻은 주입식 교육(?)의 단점이다.
하지만 듣는 사람이 어느 정도 수준이 된다면 상황이 다르다. 심지어 이미 초기 단계 시스템을 개발한 이들이라면 말이다.
“셀 간섭 요소에 따른 간섭량 계산은 따로 연구하는 팀이 있습니다.”
해석적인 연구 방법은 ETRI 내의 연구 팀이 따로 관리했다.
다만 이들 연구는 어디까지나 연구에 불과했다.
실제로 적용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정확히는 이론 자체가 여러 부분에서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런데 최민혁이 제안한 방식 때문에 어느 정도 실마리를 풀었다.
답을 알고 있으니, 거꾸로 끼워 맞춰도 되는 것이다.
“…아, 맞습니다. 계수를 셀 바운더리 컨디션에 맞추면 답이 부족한 부분을 메꿀 수 있습니다. 그러면 됩니다!”
“그렇습니까?”
최민혁도 설명을 듣고서야 뒤늦게 수긍했다. 인생 1회 차에서도 주입식으로 교육받은 터라 제대로 이해를 못 했는데, 이 자리에서 안 셈이다.
‘뭐 ETRI와 손을 잡은 것은 이걸 노린 것이니까. 앞으로는 좀 쉽게 가자.’
최민혁은 완전한 천재가 아니다. 그가 비록 인생 1회 차의 지식을 안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인식 밖의 지식은 다시 새로 봐야 했다.
심지어 인생 1회 차에서 암기만 하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놀랍군요.”
늘 조용한 김승구 팀장은 딱 근사적인 설명에도 충분히 이해했다.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최민혁 실장님의 주장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셀 모델과 간섭 계산 이론에서 부족한 점을 다 메꾼 겁니까?”
“셀 간섭에서 전력, 거리에 따라서 일정한 전력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 부분은 시스템 설계에 반영하면 됩니다.”
“균일한 셀에서 사용자 수에 따라서 차등적으로 적용하면 된다는 말이군요.”
“바로 그것입니다!”
다만 오현종 팀장은 조금 부정적이었다. 그는 이 문제를 담당한 팀에게서 벌써 몇 개월에 가까운 보고를 받았지만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론이라고 되어 있는 것도 셀 형태가 겹치는 특성에 따라서 맞지 않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가능하겠습니까?”
흥분한 김승구 팀장이 소리쳤다.
“CDMA 시스템의 간섭비에 대한 수치 척도가 다 나왔습니다. 이걸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확인하고, 시스템에 적용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우리 ETRI 쪽에서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
오현종 팀장은 갸웃했지만, 유레카를 외치는 소심한 김승구 팀장 의견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승구 팀장과 동행한 연구원들은 다들 뒤에서 속닥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문제가 된 부분에 대한 답을 찾은 것이다.
“김 팀장님 의견처럼 충분히 가능합니다!”
“흠.”
오현종 팀장은 그제야 한 걸음 물러났다. 실무진이 된다고 한다면 자신이 굳이 간섭할 필요는 없었다. 1년 넘는 삽질 끝에 결국 답을 찾지 못했는데, 최민혁 실장의 강연 덕분에 해결안을 찾았다.
실상 최민혁이 내놓은 이론에 대한 증명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이용한 실험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시뮬레이션의 알고리즘이나 구현은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 인생 1회 차에서 나온 결과를 기준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용자 숫자가 늘어나면서 셀 간섭량 자체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면, 교환기나 기지국 시스템의 안정성에 큰 영향을 준다.
그럼 중간에 통신이 뻗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용자가 많은 대도시의 시스템 용량을 사전에 정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CDMA 관련 시스템 부하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가 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아직 남아 있는 항목은 많았다.
이게 다 끝난다고 해도 끝이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나머지 시스템 항목 역시 다른 쪽에 영향을 줄 테니, 그 부분에 관한 추가 조사도 필요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어렵다고 해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똑똑한 ETRI 연구원에게 있어 이 문제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하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들은 뒤에서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해답을 하나씩 찾아냈다.
[됐어, 이거면 돼!]
올 연초에 공개된 시스템의 문제점에 대한 솔루션이 마구잡이로 쏟아진 것이다.
최민혁은 중요한 부분만 간단히 설명했다.
“이제 충분한 설명이 된 것 같군요.”
오현종 박사는 뒤로 가서 실무진에게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설마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오현종 박사는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받아서 퀄컴 쪽으로부터 자료를 받았다. 심지어 ETRI CDMA 연구 팀의 보고를 통해서 어느 정도 검토도 진행했다.
다만 그 자료에서는 CDMA 시스템 자체의 근원적인 문제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심지어 작년, 올해 연초에 ETRI 내부에서 진행된 연구 결과에는 이런 언급이 아예 없었다.
그저 상업적으로 적용하기 힘들 정도로 성능이 아주 나쁘다는 평가만 있었을 뿐이다.
그 문제를 일일이 다 고려하게 되면, CDMA 시스템의 상용화 일정이 또 얼마나 늘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최민혁은 이 프로토타입을 뼈대부터 고쳐서 적용할 수 있게 하였다.
‘솔직히 이대로라면 내년 하반기도 어려웠어. 다음 해가 되어야 그나마 괜찮은 결과물이 나올 거라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시스템 수정안대로라면 일정을 대폭 줄일 수도 있었다.
원래는 실상 시범 서비스가 검증된 후에도 해야 할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당장 큰 문제는 이번 CDMA 개발에 참석한 다른 대기업 연구원들을 설득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그들에게 합리적인 개발안을 줘야 서로 소통이 되기 때문이다.
당장 오성 전자 중앙 연구소 쪽만 해도 자존심이 세서 쉽게 수긍하지 않았다.
결국 서로 밀고 당기고를 해야 하는데, 이것만 해도 시간이 꽤 소요된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CDMA 시범 서비스의 일정을 대폭 당겨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번 프로젝트에 참석한 다른 대기업 연구 팀도 각각 해야 할 프로젝트에 할당할 수 있었다.
다 최민혁 실장이 지적한 부분 덕분이다.
이것은 실로 신기한 일이었다.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면 오현종 팀장도 이 상황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최민혁은 마치 미래에 일어날 일은 예언하는 선지자처럼 앞으로 나올 만한 문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기 때문이다.
“…….”
‘정말 알 수가 없어. 이게 단순히 천재라는 것만으로 설명될까. 오큘러스 프로젝트야 당시 KM 전자 연구 팀이 있어서 그럴 수가 있다고 쳐. 그들의 도움을 얻으면 가능하니까. 하지만 CDMA 프로젝트는 이야기가 다르잖아.’
CDMA 프로젝트는 한마디로 말해서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오현종 팀장의 의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당장 이 정보를 안다면 오성 전자부터가 태도가 달라지겠어.’
* * *
최민혁의 기자회견은 오성 그룹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
만약 정말 최민혁 실장이 이동통신 서비스에 끼어든다면 오성 전자도 이전처럼 마냥 불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그 덕분에 오성 그룹 내에서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권태성 실장이었다.
그는 이미 최민혁 실장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꽤 많은 것을 챙겼기 때문이다.
다만 그 역시 바보는 아니었다. 비록 최민혁 실장이 기자회견까지 했지만, 이번에는 다양한 인원을 동원해서 사태를 지켜봤다.
그런 중에 알게 된 것은 역시나 최민혁 실장과 ETRI와의 관계다.
ETRI 연구원이 KM 전자 중앙 연구소를 들락날락한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는 이전과는 달리 ETRI 측 라인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최민혁 실장이 뭘 하는지 알아봤다.
“강연?”
이번 일을 책임진 임권수 부장은 자신이 보고하면서도 선뜻 확신한 얼굴은 아니었다.
“ETRI 연구 팀을 불러 와서 강연한다고 했습니다.”
“CDMA 강연 말하는 건가?”
“네, 그런데 그 내용이 좀…….”
그는 이야기하기 난감해서 머뭇거렸다.
이번 일의 실무를 맡은 황광수 차장이 보다 못해서 툴툴거렸다.
“최민혁 실장이 새로운 CDMA 시스템을 가지고 ETRI 연구원에게 강연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자가 오현종 박사를 비롯한 실무 총책임자입니다.”
“흠.”
권태성 기획실장은 크게 늘라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일은 너무 허황된 것이 많아서 이제는 그냥 그런가 싶었다.
임권수 부장은 자기 말을 가로챈 황광수 차장을 째려본 후에 대답했다.
“저도 처음 보고를 받고는 이상해서 몇 차례 더 확인했는데,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최민혁 실장이 CDMA 분야는 ETRI 쪽보다 더 많이 안다는 소리야?”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권태성 기획실장도 옛날 같았으면 임권수 부장을 타박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차라리 보고가 맞다고 가정하는 게 훨씬 낫다.
“좋아, 그건 맞다고 하세. 하면 최민혁 실장이 제안한 방식이 더 상업적으로 가치가 높다는 거잖아. 그럼 CDMA 시범 시스템의 일정을 더 앞당길 수도 있다는 소리야?”
“그게…….”
임권수 부장은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것이다.
다만 옆에서 지켜만 보던 황광수 차장은 인내력이 임권수 부장만큼 되지는 않았다.
“차라리 그게 합리적인 설명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야 ETRI 연구원들의 행동이 말이 되지 않으니까요.”
“으음.”
권태성 기획실장은 굳은 안색을 한 채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두 사람의 보고가 사실이라면 최민혁 실장이 이동통신 서비스 사업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는 것보다는 대응책을 강구하는 것이 더 맞았다.
“…하면 CDMA 시스템 관련 원천기술도 최민혁 실장이 챙기는 거야?”
“그렇지 않을까요. 제가 직접 접촉한 연구원조차 믿지 못한 눈치였습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제안한 시스템 특허를 확인한 결과로는 개연성이 높았습니다.”
권태성 기획실장 표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만약 CDMA 상업 서비스 일정이 당겨진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이제까지 오성 그룹과 HY 그룹 사이에서 눈치만 보던 이들도 적극 끼어들 것이다.
그들이 힘을 합쳐서 오성 그룹과 HY 그룹을 역공할 수도 있었다.
“…일단 HY 전자 기획 팀 쪽에 연락해 봐. 당장 만나자고.”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 할 말이 많았지만, 굳이 더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은 최민혁이 이동통신 서비스 사업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정말 최민혁 실장이 CDMA의 상용화 일정을 앞당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