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99화 (499/1,021)

#499.

“당장은 무리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안 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퀄컴에서 개발하는 단말기에 들어가는 칩과 KMP-02를 합치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그게 쉽게 될까?”

“만약 ARN이 없다면, 여러 가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ARN 오너 역시 최민혁 실장 아닙니까. 모르기는 몰라도 개발 속도가 더 빨라질 겁니다. 실제로 지금 어원 제이콥 사장이 ARN 쪽과 긴밀하게 만나는 중입니다.”

“가만, 그 이야기는 설마 최민혁 실장이 여기에도 손을 썼다는 소리야?”

“네. KM 전자 기획 팀 직원이 이미 미국에서 VLSI 마크 듀켄 이사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의 도움을 얻어서 중재한 상황입니다.”

“칩 생산은 결국 VLSI가 맡겠군.”

“네.”

“하.”

“…….”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다가올 미래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당장 나와 있는 결과를 조합하면 나오는 미래까지 무시하지는 않았다.

하물며 ARN, 퀄컴, VLSI 인재들이 다 힘을 합친 경우라면 무엇이라도 가능할 것이었다.

그는 가슴이 답답해서 도저히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기 사무실 차창을 열었다.

고층 건물이 만든 스카이라인이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었다.

12층 이상의 고층 건물은 마치 줄을 지어 행진하는 병사들처럼 힘이 넘쳤다.

간헐적으로 새로운 고층 건물이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도로 정비는 차라리 미국 뉴욕보다 더 깨끗하고 깔끔했다.

아직 미국 뉴욕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그 역시 한국의 발전상을 이곳에 와서야 느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의 행보는 도저히 그런 부분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KMP-02가 만약 프로토타입이 된다면, 거기서 나올 수 있는 결과는 생각보다 많았다. 메시지 패드 2 타입에도 적용되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메시지 패드의 악몽을 극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KM 전자의 주가 폭등은 이런 부분과 기묘하게 관련이 있었다.

최민혁 실장이 흘린 정보를 얻은 세계적인 투자자가 바보는 아니니까. 샐로먼 브러더스가 굳이 공매도 물량을 메꾸기 위해서 손실을 감수한 것이다.

그 역시 뒤늦게 이성을 되찾고서야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결국 지금 이대로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한국 내에서라도 최민혁 실장을 압박할 필요가 있었다.

“…최문경 부회장이나 HY 그룹 측에 다시 연락해 봐. 필요하다면 최선을 다해서 돕겠다고. 어차피 최민혁 실장이 KM 그룹 후계자가 되는 것을 그도 원치 않을 테니까!”

“…최문경 부회장은 어느 정도 소통이 되겠지만, HY 그룹은 K투스 때문에 쉽지 않을 겁니다.”

“K투스를 이용한 핸즈프리를 말하는 거야? 그래, 그럴 수 있지. 하지만 HY 그룹은 IPS-LCD로 엮여 있는 오성 그룹이나 LC 전자와는 다르잖아. 최민혁 실장과 엮인 것이 많지 않으니까. 필요하다면 대운 전자 쪽하고 접촉해 봐. 미국 투자, 아니, 동유럽 쪽의 투자를 도와줄 수도 있다고 해봐!!”

대운 그룹이 세계화 경영을 표방한 채 전 세계로 그 영역을 확장했지만 무리한 차입금으로 문제가 많았다.

“지금은 비상 시기야. 대운 그룹의 부채도 필요하다면 무시할 수 있어.”

“하지만 대운 그룹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알아. 그래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우리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할 거야.”

“…알겠습니다.”

데이비드 싱어 역시 답답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의 지시를 이해하면서도 이게 쉽게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HY 그룹이나 대운 그룹 역시 바보는 아니었다. 그들이 돌아가는 상황을 안다면 차라리 최민혁 실장에게 손을 댈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샐로먼 브러더스도 최민혁 실장을 공격할 다른 대안이 마땅치가 않았다. 지금은 최민혁 실장을 압박하면서도 같은 배에 탔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 일어난 환율 급락 사태가 문제였다.

사실 자신은 억울했다. 이번 외환 시장 사태는 자신과는 무관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최민혁 실장이 만든 판이었다.

그런데 모든 책임의 화살은 자신을 향했다.

‘하물며 지금처럼 한국 정부에 찍힌 상황에서는 조심할 수밖에 없어.’

* * *

최문경 부회장은 데이비드 싱어가 보낸 전언을 듣고는 낄낄거리면서 한참 웃고 말았다.

“이봐, 데이비드 수석.”

비틀린 웃음을 보면서 데이비드 싱어는 그냥 있지 않았다.

“이번 일만 도와준다면, 향후 차입금 관련해서 이자를 더 줄여주겠습니다.”

불과 몇 달 전이라면 허리를 숙여야 할 좋은 제안에도 최문경 부회장은 삐딱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어이구, 우리 샐로먼님이 이렇게 좋은 제안을 할 줄 몰랐네.”

“…농담이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미국 법인 진출도 도와줄 겁니다. 아니, 미국 법인 나스닥 상장까지 다 포함한 겁니다. 그건 부회장님이 그렇게 원하던 것 아닙니까?”

“흠.”

최문경 부회장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힐끗, 권재홍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권재홍 비서실장도 깜짝 놀라서 표정 관리를 한다고 여념이 없었다.

KM 산업 역시 KM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에 진출할 수 있다면 매출 규모를 단숨에 4~5배 가까이 키울 수가 있다.

심지어 나스닥 상장이 가능하게 되면 미국 자금을 끌어오기도 쉬웠다.

최문경 부회장이 끊임없이 그리고 있는 KM 산업의 청사진이었다.

‘하,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날뛰는 것을 봐서는 이번에 손실이 컸나 보네.’

생각보다는 샐로먼 브러더스에 뜯을 것이 많았다. 이번에 설사 손실이 컸다고 해도 샐로먼 브러더스가 세계적인 투자회사란 진실은 변하지 않았다.

‘더욱이 KM 전자 주식에 손을 댄 것은 제법 된 것으로 알아. 그렇다면 그때 번 이익도 많잖아. 이번 공매도로 손실을 보았다고 해도 큰 타격을 받지는 않았을 거야.’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던 최문경 부회장은 권재홍 비서실장의 표정이 상기된 것을 보자 다시 데이비드 싱어 수석 매니저를 쳐다보았다.

그는 처음에 보인 태도를 바꾸었다.

“뭐, 우리야 그쪽하고 이미 동맹을 맺은 상황이니까. 필요하다면 뭐라도 해야지. 아, 최민혁 그놈을 끌어내리는 일이라면 내가 오히려 부탁할 일이니까.”

“잘 좀 부탁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 샐로먼 브러더스 한국 지사는 KM 전자 하나만을 보지 않습니다. 한국 투자 시장 전체를 보니까. 이쪽에만 인력을 투입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부회장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알았어.”

최문경 부회장은 정색한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데이비드 싱어 수석 매니저는 뒤틀린 최문경 부회장 눈빛을 보면서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할 만큼은 했다.

데이비드 싱어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하던 권재홍 비서실장은 최문경 부회장 모습을 보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푸하하하!!!”

호탕한 웃음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데이비드 싱어가 사무실을 떠나자 그의 태도를 떠올리면서 푼수처럼 한동안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실상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세파에 대한 감정이 가득 담겨 있는 해학적인 웃음이었다.

“권 실장, 내가 이상해?”

“…아닙니다.”

“그런데 솔직히 통쾌해. 샐로먼 저놈들이 처음 만날 때 보인 위세가 기억나? 우리 KM 그룹을 어떤 눈으로 봤는지 말이야. 중소기업으로 봤어. 내가 얼마나 자존심이 상한 줄 알아?”

“그거야 수백 조 자금을 다루는 세계적인 투자회사이니까요.”

“알아. 그래서 난 샐로먼 저 새끼들에게 내 마음대로 하지 못했어. 민혁이 그놈을 봐. 완전히 박살을 냈잖아. 이번만큼은 민혁이 그놈이 부러워. 남자라면 저래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부회장님에게는 오히려 그 일이 악재입니다. KM 그룹 임직원 중에는 이번 사태를 두고 최민혁 실장을 지지하는 이들이 대폭 늘어났습니다.”

“어쩔 수 없잖아. 솔직히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지. 퀄컴 인수는 누구라도 경악할 일이야. 돈이 많다고 소문이 자자한 안건민 회장도 퀄컴과 같은 기업은 먹지 못했어.”

사실 안건민 회장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퀄컴을 노린 기업은 생각보다 많았다. 어원 제이콥 사장은 굳이 그런 투자 제안을 받지 않았다.

“그 결과는 주가로 증명했잖아. 세상에 40만 원을 넘겼어. 아니, KM 전자가 어떻게 40만 원을 넘길 수가 있는 거야? 민혁이 그놈은 1,500원에 매입했으니, 무려 266배의 잭팟을 터뜨렸어!!”

“…….”

권재홍 비서실장도 이번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번 KM 전자의 주가 폭등과 관련해서 언론에서도 떠드는 정보이니까.

한창 흥분해 있던 최문경 부회장이 겨우 감정을 추슬렀다.

“민혁이, 이놈은 지금 뭘 해?”

“KM 전자 내부 조직 관리에 정신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데이비드 싱어 수석 매니저의 제안을 완전히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꼭 그의 제안이 아니라도 이제는 나서야 했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 다른 것을 떠나서 ETRI 쪽에는 연락해야지?”

“KM 전자 기획 팀이 ETRI 측과 부산하게 만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자세한 것은?”

“계속 파악 중입니다.”

“최선만으로 곤란해. 우리 자금주인 샐로먼 쪽에서 원하는 일이잖아. 필요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조사해 봐. 도청을 해도 좋아!!”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우리 회장님은 요즘 어때?”

“그게 좀…….”

“지금 이 난리가 났는데, 뭘 숨기고 말고 그래. 나 같아도 민혁 그놈을 지지해 주고 싶어. 그렇다면 더 실망할 것도 없잖아?”

“…KM 그룹 계열사를 원점에서 다시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구조조정이 끝난 것으로 아는데?”

“아무래도 사업 체질 개선을 위해서 미래 가치가 불투명한 계열사를 아예 매각할 생각마저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그건 좀 말이 나올 텐데, 설마 그것도 이번 퀄컴 인수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네. 아무래도 고만고만한 계열사와 퀄컴을 비교하면 생각이 바뀌지 않겠습니까?”

“설마 우리 아버지는 자신이 퀄컴 같은 기업을 인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장승일 실장도 요즘 정신이 없는 것을 봐서는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쯧.”

최문경 부회장은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사실 최용욱 회장 처지에서는 최민혁이 퀄컴까지 인수한 상황이니, KM 그룹 계열사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는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 동선도 계속 세밀하게 들여다봐. 필요하다면 비서실 인력뿐만 아니라 다른 가용 인원을 총동원해도 좋아. 그쪽을 통해서 민혁 그놈이 틈을 보일 수 있으니까. 그놈이 사람 새끼인 이상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어. 그 틈만 찾아낸다면 샐로먼 브러더스를 이용해서 크로스카운터라도 먹일 수 있어!”

“…알겠습니다.”

* * *

최민혁은 최문경 부회장의 동태를 살피면서 느긋하게 CDMA 관련 기술 자료를 하나씩 만들었다. 이번 일은 이전과는 달리 전부 다 자신이 하지 않았다.

그는 따로 특허를 출원해야 할 부분은 임기석 부장을 불러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임기석 부장은 이미 이와 유사한 일을 몇 번이나 경험했기에 이전처럼 놀라지 않았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CDMA 관련 특허에는 혀를 내둘렀다.

최민혁은 따가운 눈총을 받았지만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이건 아이디어 특허라서 이전에 출원한 특허와는 좀 다를 겁니다. 자칫하면 거절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 특허출원을 할 때 구체적인 부분을 다 메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최민혁은 밑 작업이 끝난 후에 ETRI 측에서 먹을 수 있는 기반도 어느 정도 만들어 뒀다.

심지어 기획실 직원을 동원해서 CDMA 관련 기술을 익히도록 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CDMA 관련해서 정보가 사방으로 퍼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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