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97화 (497/1,021)

#497.

‘ETRI 쪽과의 대리인 역시 최민혁 실장님에게 직접 요구하다니.’

아마 그도 최민혁 실장의 지난 행보를 몰랐다면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조성돈 팀장을 제외한 다른 팀장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민혁 실장 얼굴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그 시선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만 그는 이런 일 때문에 KM 전자 주가가 40만 원을 돌파할 것을 잘 알았다.

이제는 이런 시선을 즐길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은 어쩔 수 없지.’

우영민 부장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조성돈 팀장에게 한 가지 자료를 넘겼다.

“이건 기획 팀에서 한번 검토를 해봐요. 필요하다면 ETRI 측에 자문해도 됩니다. 아, 혹시 ETRI 측에서 법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면, 퀄컴 대리인 자격이라고 언급하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번 CDMA의 경우는 이전과는 달리 원칙대로 갈 생각입니다. 기획 팀도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네.”

조성돈 팀장은 혀를 찼다. 그 역시 늘 마음에 걸린 일이었다. 기획 팀이 도대체 왜 존재하는지 스스로 많은 반성을 해왔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 * *

올 연초에 ETRI가 개발한 CDMA 관련 기술은 상업적인 면에서는 많이 부족했다. 아니, 정확히는 지금 시점에서 늘어나는 사용자의 숫자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학술적인 제품과 상업적인 물건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불균등하게 분포될 수밖에 없는 기지국 문제다.

특히 통화량이 늘어나면 생기는 블록킹 현상은 쉽게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민혁은 이 블록킹 현상을 포함해 CDMA 시스템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 100가지를 토대로 해서 뼈대가 되는 시스템 가이드라인을 잡았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해서 CDMA 시스템의 뼈대를 따로 설계했다.

물론 그 자신이 이런 설계를 한 것은 아니다.

아니, 세상 그 어떤 천재도 이런 시스템을 만들 수는 없었다.

통화 블록킹 현상만 해도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서 답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기지국과 제어국에 대한 관리가 필요한데, 간섭 레벨에 따라서 전력을 조절해야 하는 것이라 이게 무슨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직접 삽질을 해야 한다.

인생 1회 차를 돌아보면, 이지수 박사가 왜 이런 정보까지 자신에게 교육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워낙에 괴짜인가 할 뿐이다.

물론 본인 딴에는 과거의 원천기술과 관련된 시행착오와 전문 지식을 안다면 앞으로의 경영에 있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말이 안 되기는 하지만…….’

그런데 결과는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최민혁은 기억나지 않는 부분도 이지수 박사가 설명한 핵심 뼈대에서 추론해서 메꾸어 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 완성을 할 수가 있었다.

그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의 능력이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대단한 여자지. 진짜 인정할 수밖에 없어.’

“…….”

최민혁 스스로 인정한 결과물을 조성돈 팀장을 통해서 받은 배종대 과장을 비롯한 기획 팀은 최민혁 실장의 기술 자료를 보고는 다들 입을 쿡 다물었다.

그는 도저히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어서 ETRI의 오현종 박사에게 자문했다. 그런데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해당 자료를 본 오현종 박사는 흥분해서 제자리에 앉아 있지도 못했다.

[…바로 이겁니다! 저희가 원한 자료입니다. 이 자료가 필요했습니다. 역시 최 실장님입니다! 대단합니다. 진짜 보고도 믿기지 않습니다.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바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아, 우리 쪽에서 알아서 자료를 다시 취합해서 관련 자료를 보내겠습니다!!]

굉장히 놀랍고, 적극적인 ETRI의 반응이었다.

ETRI 측은 KM 전자와의 공동연구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최민혁 실장과의 협조를 말이다.

과거 STB 사업부 업무를 맡았던 이정원 과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학 연구소에 외주 용역을 줘도 이런 식으로 자기 기술을 까발리지 않는데,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긴 이런 경우는 없죠?”

“네, 더욱이 ETRI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 성과도 나온 CDMA 연구 과제입니다. 그런 ETRI가 뭐가 아쉬워서 하소연하겠습니까?”

설령 CDMA 연구가 이제 시작이어도 ETRI가 외부 기관에 이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비록 상업적인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해도 CDMA 성과물이 어느 정도 나온 상태다. 그런데 뭐가 답답해서 아쉬운 소리를 하겠나.

ETRI 연구원 정도의 자존심이라면 본인이 직접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런데 최민혁 실장에게만큼은 무조건 저자세를 보였다.

평소에 말이 없던 임웅 대리 역시 조용히 입을 다물고만 있지 않았다.

“오큘러스 프로젝트 때문인지 ETRI 측 담당자가 특히 더 적극적인 것 같아요.”

하지만 모두가 편한 얼굴은 아니었다.

배종대 과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 이젠 CDMA도 공부해야 하나. 정말 돌아버리겠습니다.”

* * *

CDMA라고 해서 모든 CDMA 기술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당장 CDMA 통신 시스템에서 기지국, 단말 송신기, 단말 수신기에 따른 페이딩 작용의 효율을 올리는 것만 해도 답은 여러 가지가 나온다.

여러 가지 대안이 나올 수가 있는데, CDMA 시스템 회로를 통해서 효율을 올릴 수도 있다.

이 위상 추적 회로 하나만 완성도를 올려도 CDMA 감도는 올라가고, 시스템 부하는 떨어진다.

이게 안 되면?

시스템이 문제가 있는 건지, 송신 단말기가 문제가 있는 건지, 수신 단말기 효율이 떨어진 건지, 기지국 시스템에 오류가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삽질을 하다 보면, 개발은 완전히 산으로 가버린다.

아차 실수한 경우에 귀중한 몇 개월의 시간이 그냥 훅 지나가 버린다.

따라서 이런 부분은 설명을 자세히 첨부해도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당장 CDMA가 어떤 식으로 동작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라면 더 심하다.

그나마 ETRI 쪽 연구원의 도움을 얻어서 어느 정도 힌트라도 잡을 수는 있었다.

큰 기대를 하고 KM 전자의 기획 팀을 방문한 김문호 박사는 혀를 찼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됩니까?”

“그게 좀…….”

배종대 과장을 비롯한 기획 팀 임직원들은 다들 얼굴을 들지 못했다.

“뭐, 여러분의 잘못은 아닙니다. CDMA는 최근 나온 학문이니까요. 더욱이 아직 상용화조차 되지 않았으니,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가만, 그러면 이 설계안을 만든 분은 어떻게 된 겁니까?”

“최민혁 실장님 말입니까? 그분은 우리와는 격이 다른 천재죠.”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김문호 박사는 오큘러스 프로젝트 전체와 관련된 실무진을 총괄했다. 그는 아직도 최민혁이 넘긴 오큘러스 프로젝트 결과물을 잊지 않았다.

“그럼요. 최민혁 실장님이 겸손해서 사람들이 모르는 것뿐입니다. 정작 최민혁 실장님이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관여했다고, 정말 중요한 부분은 혼자 다 하셨다는 것을 이해를 못 합니다.”

씁쓸한 김문호 박사.

그는 오큘러스 프로젝트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았다.

“…….”

덕분에 충격을 받은 기획 팀은 다들 입을 쿡 다물기만 했다.

자신들은 최민혁 실장이 만든 설계안과 그 부분을 해설해 주는 김문호 박사의 이야기를 듣고도 아직 제대로 이해도 못 했다.

정성근 대리는 조용히 침묵만 했는데, 곧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자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최민혁 실장님이 판을 깔아놓아서 다행입니다. 나머지 전문적인 것은 김문호 박사님의 도움을 받으면 될 것 같고요.”

배종대 과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 대리, 넌 이걸 보고 이해가 되냐?”

“굳이 다 알 필요가 있을까요? 분야별로 영역을 나누면 되지 않을까요?”

“파트를 나누면 알 수는 있고?”

정확히는 그 파트가 뭔지도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이게 이것 같고, 저게 저것 같으니까.

정성근 대리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툴툴거렸다.

“어차피 우리는 엔지니어가 아닙니다. 다 알 필요는 없죠. 실장님이 딱 찍어놓은 모범 답안과 김문호 박사님의 설명을 토대로 대화를 전할 정도면 됩니다.”

그 대화가 안 되니까 문제였다.

“쯧.”

배종대 과장은 혀를 찼다. 그는 절망에 빠진 기획 팀의 얼굴을 일일이 쳐다보았다. 다들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솔직히 그들이 봐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차라리 무능한 기획 팀이 좋았다.

괜히 유능한 기획 팀이 되려고 하다가 가랑이가 찢어질 상황에 놓인 셈이다.

그런데 이건 기획 팀만 탓할 수는 없었다.

김문호 박사는 그 나름의 의아한 점이 있었다. 그는 대체 이런 정보를 어떻게 얻었는지부터 파고들었다.

“…최 실장님이 왜 일을 이렇게 번거롭게 처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처럼 그냥 담당자에게 기술을 던지면 될 텐데, 아, 물론 여러분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

배종대 과장은 딱히 김문호 박사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정성근 대리가 한심스러운 눈으로 배종대 과장을 쳐다보았다.

“최 실장님이 무슨 신도 아닌데, 이걸 다 알 수가 있습니까? 오큘러스 프로젝트와는 상황이 좀 많이 다르잖아요.”

정성근 대리가 일편단심 최민혁 실장의 이야기를 늘어놓자 상황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이번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기획 팀 일부는 정성근 대리를 싸잡아서 씹었다.

“야, 정 대리, 이건 솔직히 말해서 선을 넘은 거잖아. 우리 기획 팀이 CDMA 기술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어야 일을 할 것 아냐!”

결국 보다 못한 조성돈 팀장이 끼어들었다.

“이전 방식이 옳지가 않아서 그렇잖아. 아무리 최민혁 실장님이라고 해도 혼자서 이 모든 일을 다 처리할 수는 없어. 이게 옳은 방식이잖아. 앞으로도 계속 이전처럼 구경만 할 생각이야?”

“그렇지만…….”

“정 필요하면 ETRI 측에 실무진을 더 보내달라고 하면 되잖아.”

김문호 박사는 넌지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럭저럭 결론을 내린 조성돈 팀장조차 슬쩍 다시 최민혁 실장이 준 설계안을 살피면서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번 일은 기존 일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게 맞기는 맞아. 다만 최 실장님이 알아서 단독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까. 이렇게 하면 일정이 생각보다는 늘어질 거고, 정보도 알게 모르게 외부에 흘러 나가잖아.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설마 샐로먼 브러더스를 노린 것일까?’

* * *

올해 샐로먼 브러더스는 세계금융회의를 열어서 세계 금융 대개혁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자리에서 세계화, 투자금융 강화란 경영전략을 논지를 이끌어냈다.

실제로 일본, 미국의 자본가는 이런 샐로먼 브러더스의 방향성에 손뼉을 쳤다.

다들 샐로먼 브러더스의 약탈적인 성향을 욕하면서도 배웠다.

더욱이 저금리 때문에 정상적인 투자로는 이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세계 금융계 분위기를 슬쩍 바꾼 샐로먼 브러더스의 투자 성향이 더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물론 이들이 노린 것이 한국 금융 시장만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동아시아 금융 시장을 노렸다. 대신에 한국 금융 시장을 보험 성격으로 봤다. 그건 일본 내의 저금리 때문에 엔화가 한국 금융 시장에 깊숙이 파고들어 있어서다.

이 부분을 잘만 활용한다면 뜯어먹을 것이 많다고 봤다.

그래서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한국 기업에 대한 투자였다.

차입금 명목으로 우선 손을 잡으면, 그것을 이용해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한 것이다.

그 대상이 바로 KM 그룹이었다.

최용욱 회장은 반도체에 대한 꿈이 있었기에 동맹은 쉽게 진행되었다.

KM 그룹 계열사의 주식에 대한 투자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당시 이때만 해도 샐로먼 브러더스는 KM 그룹을 호구로 여겼다.

차입금을 이용해서 KM 그룹을 흔들고, 경영권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일환의 하나가 최훈열 전무였다. 그를 이용해서 KM 전자의 체질부터 곪아 들어가게 하였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뒤틀어진 것은 바로 최민혁 실장이 KM 전자의 기획실장이 되고 난 다음이다.

그들도 최민혁 실장 혼자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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