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
“지금 당장 최문경 부회장에게 연락해서 최민혁 실장이 CDMA 사업을 노린다고 전해. 최용욱 회장은 CDMA 사업 자체에 비관적이니, 아마 이 사실을 알면 막으려고 할 거야. 만약 이 사업이 성공한다면 최문경 부회장은 끝장이라고!”
“…알겠습니다.”
데이비드 싱어 수석 매니저는 데니스 샐로먼 이사의 다급한 말에 혀를 내둘렀다.
‘이사님의 이런 모습은 또 처음이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구나. 도대체 최민혁 실장은 어원 제이콥 사장을 어떻게 구워삶은 것일까?’
* * *
최문경 부회장은 데이비드 싱어 수석 매니저의 국제전화 연락을 받고 나서 조카 최민혁이 CDMA에 관심을 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혀를 찼다.
‘이놈이 드디어 미친 건가?’
당장 CDMA를 주도하는 것은 이동 사업자 허가를 받은 신세기 통신이다. 여기엔 설사 오성 전자라도 자기 임의대로 끼어들기 어려웠다.
따라서 처음에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동 통신 서비스가 단순한 사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마전이지.’
신세기 통신 이야기를 흔히 하는데,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신세기 통신의 배후에는 정보 통신부와 같은 정부 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로비는 단순히 몇 마디 말로 끝낼 일이 아니다.
정보 통신부와 엮여 있는 정치권과 관련 정부 고위 공무원에게도 로비해야 한다. 그 숫자가 생각보다 아주 많았다.
만약 조카 최민혁이 그 내막도 모르고, 이 일에 끼어든다면 이전과는 상황이 달라진다.
이해 단체의 로비를 받은 정보 통신부와 정치권이 손을 쓸 테니까.
‘지금까지는 아버지가 중재해서 넘어갔어. 하지만 CDMA는 상황이 다르지. 더욱이 정치권 쪽에서는 최민혁 그놈을 노리는 이들이 많아.’
다만 그도 이제까지 최민혁 실장에게 된통 당한 터라 굳이 데니스 샐로먼 이사의 제안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권재홍 비서실장에게 지시했다.
“네? CDMA 말입니까?”
“그래. 그룹 차원에서 검토했잖아.”
“그건 장승일 실장에게 있습니다.”
“쯧, 뭐 상관없어.”
권재홍 비서실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일단 장승일 실장을 찾아가서 CDMA와 관련해서 검토한 자료를 일단 받았다.
장승일 실장의 따가운 시선은 덤이다.
“아, 그냥 단순히 살펴보는 것이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필요하다면 저희 기조실에서 도와 드리겠습니다.”
“됐습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다시 최문경 부회장에게 정리된 자료를 넘겼다.
최문경 부회장은 일단 CDMA 사업에 대한 기존 자료를 살펴보았다.
역시 문제가 된 것은 신세기 통신, 오성 전자, HY 전자와 같은 대기업이다. 이들 외에 자잘하게 엮여 있는 대기업도 있었다.
도저히 KM 그룹이 어떻게 대응할 수 없는 역량을 가진 이들이다.
‘죽일 놈의 새끼들.’
내심 화가 난다.
10대 대기업 카르텔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이들이 정부와 손을 잡고, 돈이 되는 사업을 독점하기 때문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곰곰이 이 문제를 들여다보다가 뒤늦게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하네. 민혁 이놈은 지금까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업에는 끼어들지 않았어. 근데 문제가 뻔히 되는 것을 아는 CDMA 쪽에 왜 관심을 두는 걸까?”
권재홍 비서실장도 순순히 수긍했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 덕분에 이해 관계자와의 대립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별다른 외압이 없이 성장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샐로먼 브러더스 쪽에서 걸려온 전화의 의미를 깨달았다. 자신이 끼어들기에는 어려운데, 그건 다른 이들에게도 같이 적용된다.
“생각해 보면 이 CDMA는 이야기가 좀 다르지. 당장 들어간 자금 규모가 5억 달러는 넘었어.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잖아. 추가로 들어갈 자금이 10억 달러, 아니, 20억 달러는 넘을 거야.”
문제는 역시 이들의 배후다. 정보 통신부가 겉으로 드러나 있지만 정작 로비를 하는 이들까지 합치면 절대 단순한 규모가 아니었다.
특히 오성 전자 하나만 봐도 그렇다.
만약 오성 전자도 최민혁 실장이 CDMA 사업에 끼어든 것을 안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최문경 부회장은 한 가지, 이 정보를 이용할 다른 대안을 떠올렸다.
“…참, 아버지는 어디 있어?”
권재홍 비서실장은 다시 그룹 비서실에 전화로 확인했다.
“회장님은 지금 전경련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거 딱 좋네.”
최문경 부회장은 바로 상의를 챙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최문경 부회장 뒤를 따르면서 눈치를 봤다. 도대체 최문경 부회장이 뭘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최민혁 실장이 CDMA 사업에 끼어든 것을 전경련 안에서 폭로할 생각일까? 그런데 정말 최민혁 실장이 퀄컴을 통해서 CDMA 사업 쪽에 끼어들려는 것일까?’
* * *
전경련은 다양한 경제 제반 문제를 통일해서 정부 시책에 반영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이다.
오늘 모임은 연초에 발표된 이공계 대학 교육 혁신 방안을 점검하는 자리였다.
공대생의 현장실습과 같은 대안이 대표적인 예다.
이런 부분은 기업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따라서 각 기업은 알아서 역할 분담을 했다.
사실 대기업 입장에서는 홍보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전경련 모임에 참석한 최용욱 회장은 따가운 전경련 회장의 시선 때문에 불편했다.
손자 최민혁의 성공 스토리 때문이다.
정략결혼 얘기가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최 회장, 그 너무 까칠하게 구는 것 아닌가. 내가 부탁하는 것은 손자 최민혁 그 친구와 잠깐 이야기를 나눌 자리를 만들자는 것 아닌가.”
“최 회장, 손자 최민혁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봐. 아직 대학교 1학년생인 것으로 아는데, 대학은 포기한 거야?”
“최 회장, 요즘 최민혁 그 친구는 뭘 하고 지내는 건가?”
“최 회장, 이거 섭섭하네. 나랑 이야기조차 하기 싫은 거냐?”
다른 주제이기는 하지만 이들이 노리는 것은 다름 아닌 손자 최민혁이었다.
처음에는 최용욱 회장도 손자 자랑에 여념이 없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특히 KM 전자 주가가 27만 원 선을 유지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솔직히 지금까지는 다들 KM 전자의 주가에 거품이 끼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KM 전자의 주가를 노린 세력의 분탕질에도 KM 전자 주가는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시장에서 바라보는 KM 전자 주가의 가치는 현재 무려 27만 원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다들 최민혁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쳐다본 것이었다.
처음과는 달리 이제 주변의 시선에 질린 최용욱 회장은 지친 얼굴을 한 채 전경련 모임에서 조심스럽게 나왔다.
그런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앞을 막은 것은 DL 그룹 김상구 회장이었다.
“이봐요, 최 회장.”
“…무슨 일입니까?”
최용욱 회장은 딱히 김상구 회장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전경련의 분위기가 문제다. 이미 수십 쌍의 눈빛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김상구 회장이 과연 어떤 행동을 보일지 관심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불편하다고 KM 그룹 투자자 중의 한 사람인 김상구 회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KD LCD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김상구 회장은 잠깐 최용욱 회장을 째려보다가 성질대로 하지 못했다. 그 역시 최용욱 회장이 많이 컸다는 것을 인정했다.
“거 사돈어른 태도가 그게 뭡니까. 제가 당신 적이라도 됩니까?”
“아, 오늘 모임 때문에 지쳐서 제가 신경이 예민했습니다.”
“그래도 같은 집안끼리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KM 전자가 잘 나간다고 절 괄시하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제가 다시 한번 사과를 드립니다.”
그제야 최용욱 회장의 태도에 만족한 김상구 회장.
최용욱 회장은 지랄 같은 김상구 회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헛웃음만 지었다. 그는 새삼 감방에 들어간 최훈열 전무가 떠올랐지만, 곧 털어버렸다.
“요즘 손자 놈이 잘나가서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걸 알아야 해요. 튀어나온 놈은 결국 주변의 시기를 받게 마련이니까.”
최용욱 회장은 좀 큰 소리에 귀를 쫑긋한 전경련 회장들 모습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최 회장, 당신을 걱정해서 하는 충고입니다. 지금까지는 잘 빠져나왔지만 만약 저기 돈 많은 재벌가 회장의 밥그릇을 자칫 잘못 건드리면 또 다른 상황이 연출될 테니까.”
“…….”
“제 말이 농담 같습니까? 당장 HY 그룹 장학생이 움직여도 KM 그룹은 세무조사 때문에 난리가 날 겁니다. 정말 그런 상황을 원하는 겁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최용욱 회장은 내심 부글부글 감정이 들끓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KM 전자 주가 파동 이후에는 상황이 또 달라졌다.
이제는 자신의 역량으로도 외압을 막아내기 벅찰 정도였다.
‘민혁이 녀석이 더러운 권력과 엮이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
최용욱 회장은 안 그래도 시기가 가득한 전경련 회장의 시선을 느끼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김상구 회장의 조언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다들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그냥 두고만 봤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최민혁 실장이 커도 너무 컸다.
설사 최민혁 실장의 배후에 있는 이가 최용욱 회장 자신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만약 최민혁이 이들 대기업 카르텔의 이권에 끼어든다면 문제는 이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 탐욕 때문인가?’
최용욱 회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들만을 탓할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 역시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 막내 최병문 상무의 죽음도 어쩌면 자신의 탐욕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가 굳이 손자 최민혁을 밀어준 것은 막내아들에 대한 마음의 빚 때문이었으니까.
너무 심란한 최용욱 회장은 도저히 전경련 모임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전경련 건물을 나섰다.
그런데 건물 입구에는 뜻밖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장남 최문경 부회장이다. 그는 전경련 건물 입구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전경련 수행원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했다.
심지어 담배를 피우려고 나온 전경련 참석 실무진들의 시선을 느꼈다.
딱 자신이 원한 그림이었다.
여기서부터 자신의 연기가 중요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한껏 분노한 연기를 보였다. 아니, 실제로 화가 났다. 조카 최민혁의 행보를 항상 한발 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아버지, 민혁이 그놈이 CDMA 사업에 뛰어든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입니까?!”
꽤 큰 목소리.
당연히 최문경 부회장은 명분이 있었다.
“아니, CDMA 같은 사업은 우리 KM 그룹이 끼어들 사업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저보고 경고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민혁이 그놈은 뭡니까? 사람 차별이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분노는 양념.
최문경 부회장은 자기 연기에 200점을 줬다. 워낙에 큰 소리를 낸 탓에 전경련 모임에 참석한 대기업 수행원들의 분위기부터가 달라졌다.
서로 정보를 교환하던 이들조차 입을 꾹 다물고는 최문경 부회장의 입에 주목했다.
특히 CDMA 우선 참여 대상자가 된 오성 전자나 HY 전자 실무진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그들은 다급하게 이쪽저쪽에 전화하기 시작했다.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두 기업이 설사 대기업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이들은 정신없이 뛰었다.
최용욱 회장은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는 CDMA와 최민혁의 관계가 문제가 아니라 괜한 정보가 다른 기업 귀에 들어갈 것을 염려했다.
“이놈아, 닥쳐!”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은 이를 드러냈다.
“이건 그렇게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아, 좋습니다. 민혁이 그 녀석 편을 드는 것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불공정한 경쟁은 곤란하지 않습니까. 후계 구도 싸움을 붙였으면, 공정한 규칙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한쪽 편만 드는데, 제가 민혁이 그놈을 어떻게 이깁니까?!!”
“그, 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