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84화 (484/1,021)

#484.

안 그래도 지난번에 불법적으로 진행한 일 때문에 미국 정부 기관한테 탈탈 털린 경험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일을 당한다면 지금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다 중지해야 한다.

결국 제프리 세퍼 부회장이 나서서 투자자를 만나 도움을 청했다.

그로써 다행히 SEC의 압박은 어떻게 넘어가는 것 같았다. 애초에 샐로먼 브러더스가 진행하는 펀드 투자가 전부 미국 정부를 상대로 로비한 결과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 정부가 수상쩍은 시선으로 쳐다보는데, 무리할 수는 없었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결국 제프리 세퍼 부회장에게 경고를 받았다.

[SEC라고 해서 이 일에 간섭하고 싶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안 좋은 소식은 최민혁 실장이 미국 시민권을 얻을 거라는 소리도 있어. 이제는 미국 사업가끼리의 경쟁이 된 거야. 이런 판국에 괜히 일을 더 키워서 문제가 복잡해지면 자네 입지도 안 좋아질 거야. 지금은 최민혁 실장에게 집착할 상황이 아니잖아.]

[…알겠습니다.]

[농담이 아니야. 이번 일 때문에 이사회에서 말이 나오고 있어.]

[잘 알겠습니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의 답변은 쿨했다. 제프리 세퍼 부회장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더 구박하지 않았다.

그 역시 데니스 샐로먼 이사의 능력을 인정하기 때문이었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의 처지에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아니, 그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최민혁이 한국인이라는 점을 이용한 플랜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젠 그것도 어려운 상황이다. 더욱이 그는 설마 샐로먼 본사로부터 레드카드를 받을지는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그도 지금까지 정신없이 밀어붙인 공매도 수량을 파악하고는 아차 싶었다.

“…6백만 주라고?”

데이비드 싱어 수석 매니저는 데니스 샐로먼 이사의 눈치를 봤다.

“공매도 물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한국 정부에서도 환율 때문에 고까운 시선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공매도 때문에 한국으로 들여온 달러가 무려 1조 원을 넘겼기 때문이다. 불과 한 달 남짓한 사이에 무려 1조 원에 가까운 달러가 한국 증시로 흘러들어 왔다.

다른 문제를 떠나서 환율이 요동을 친 것이다. 한국 정부가 다급하게 수습하기는 했지만 갑작스러운 외환 시장의 혼란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만약 이 자금이 국내 투자에 사용된다면 오히려 환호할 일이다.

그런데 자금의 성격이 불확실했다.

그래서 한국 정부 기관이 SEC 측에 국내 공매도를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서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일단 급하게 300만 주는 메꾸기는 했지만, 손실이 제법 큽니다.”

증권 트레이드로는 어쩔 수가 없는 선택이었다.

KM 전자의 상황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최민혁 실장이 스티븐을 만난 이후로 나오는 이야기가 이전과는 달랐다.

단순한 실적 때문이 아니었다.

둘이 만들어내는 찌라시가 문제였다.

그게 꽤 그럴듯했다.

만약 최민혁 실장의 성과가 없었다면 큰 이슈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K투스를 시작으로 굵직굵직한 모멘텀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KMP-01의 차세대 모델이다.

“…솔직히 아직도 차세대 모델이 어떤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KMP-01 모델을 에플을 통해서 미국 시장에 팔아도 판매량이 최소한 500만 대를 넘을 것으로 예측이 나왔습니다. 한국 내수 시장 판매량이 결국 100만 대를 넘겼기 때문입니다.”

“…5백만 대면, 전체 매출이 1조 5천억인가?”

“네, 이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KM 전자 상표가 아니라 에플 상표로 나가면 말입니다.”

이 부분은 판매하기 나름이다.

미국인들 중에는 아직 KM 전자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그런데 에플은 이야기가 다르다. 에플 상호를 달고 나온 KMP-01이라면 매출액이 못해도 4~5배는 늘어날 것이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도 이 일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냥 두고 볼 일은 아니군. 가만, 이 일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최문경 부회장은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그냥 지켜만 보고 있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일전에 최 부회장과 미팅을 잡으라고 했잖아. 그건 어떻게 되었어?”

“그게 최 부회장이 당장은 바쁘다고…….”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전의 자기 딸랑이 노릇을 하던 최문경 부회장의 행동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핸드폰으로 최문경 부회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데니스 이사입니다.]

[…지금은 좀 바빠서 그런데, 추후 연락하셨으면 합니다.]

[제가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여긴 KM 산업 안산 공장인데, 이쪽으로 올 수 있겠습니까?]

[좋습니다. 가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고 나서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이비드 싱어는 수행원에게 차를 준비하라고 지시한 후에 조용히 데니스 샐로먼의 이사 뒤를 따랐다. 그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확실히 최민혁 실장이 보통은 넘어.’

* * *

최문경 부회장이 결코 거짓말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 산업은행, 조흥은행, 국민은행을 비롯한 10개 은행이 KM 산업의 반도체 생산 규모 확대에 따른 투자를 진행하기 앞서서 KM 산업 반도체 공장을 방문한 것이다.

KM 산업은 이미 반도체 생산 규모를 대폭 늘려서 지금은 1억 개를 넘긴 상황이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KM 산업은 반도체 패키지 분야에만 선택과 집중을 꾀했다.

덕분에 기존 경쟁 업체보다 앞선 새로운 몇 가지 기술을 고안했다.

그 덕분에 반도체 생산 규모 능력이 대폭 증가했다.

따라서 이제는 안산 공장 규모를 늘려도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았다.

10여 개의 은행 담당자가 각자 자료를 보면서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 이 증거였다.

물론 반도체 신디케이트론의 형태를 띠기는 하지만 기존의 차입금과는 이야기가 달랐다.

명확한 수익 규모가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년 수출 계약 물량이 그 증거였다.

관련 자료를 살피는 은행 실무진들의 표정이 밝을 수밖에 없다.

이건 그 어떤 투자보다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번 행사에 참여한 KM 그룹 계열사 사장 역시 표정이 밝았다.

그들은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최문경 부회장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뜻밖에도 장승일 실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득의 어린 표정이었다. 그는 양손을 펼친 채 새로 건립될 공장 부지와 반도체 설비가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말했다.

“장 실장은 어때?”

“…나쁘지 않습니다.”

“고작 그 정도야?”

“후유, 아닙니다. 솔직히 최고의 성과입니다. 당장 내년에 올해 대비 20% 이상의 매출 성장세를 보일 테니까요.”

“그렇지? 하하하, 이거 장 실장이 이렇게 칭찬해 주니, 마음이 편해. 진작 이렇게 해야 했는데, 그래도 늦지 않지?”

“…네.”

장승일 전략 기획실 실장은 혀를 찼다. 지금 이 일은 전략 기획실에서 수십 차례나 권고한 제안이었다.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은 계속 그 제안을 씹었다.

차입금이 날아가고, 최영란 이사의 AD 설계가 대박을 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최문경 부회장도 결국 안정적인 성장을 선택해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마치 이 일이 처음부터 자신의 성과인 양 행동하는 모습이 짜증스럽기만 했다.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화 통화를 한 데니스 샐로먼 이사가 안산 공장까지 내려왔던 것이다.

“어? 데니스 샐로먼 이사님 아닙니까?”

“장 실장님이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잠깐 급한 일이 있어서…….”

간단한 인사와 동시에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데이비드 싱어와 같이 최문경 부회장에게 달려가서 악수를 청했다.

“오, 이거 샐로먼 브러더스의 데니스 샐로먼 이사님 아닙니까?!”

큰 소리는 당연히 주변의 시선을 끌었다.

KM 그룹 계열사 사장 중에는 ‘샐로먼 브러더스’란 말에 깜짝 놀라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지난 차입금 때문에 그룹 차원에서 협상한 이들 중의 하나가 샐로먼 브러더스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샐로먼 브러더스.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아는 이들은 이 투자 은행이 얼마나 규모가 큰지 잘 알고 있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계열사 사장단이나 한국은행 실무진들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보고는 쾌재를 불렀다. 이젠 다른 일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 역시 데니스 샐로먼의 이사 성격을 잘 알기에 의아했다.

그가 아는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물에 빠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인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있었다.

“최민혁 실장과 관련해서 잠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 제 조카 민혁 말입니까. 그런데 그놈은 지금 미국에 있을 텐데요?”

“미국이라면 스티븐을 만나고 있는 겁니까?”

최문경 부회장은 권재홍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기존에는 삽질했던 미국 파견 인원을 통해서 얻은 정보를 반사적으로 말하고 말았다.

“지금은 MIT에 있는 것으로 압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황당해서 소리쳤다.

“아니, 에플에 있다면서? 갑자기 MIT 이야기가 왜 나와? 하, 민혁 이놈은 정말 잠시도 그냥 있지를 않는구나. 지가 무슨 홍길동이라도 되는 건지.”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아니, 그냥 말해 봐!”

권재홍 비서실장도 최민혁 때문에 최문경 부회장에게 매일 씹히고 살았다. 그는 그래서 미국에서도 정보를 얻기 위해서 사람을 배치했다.

그들은 최민혁 실장의 뒷조사를 계속했다. 지난번에는 계속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에플에 반감이 있는 퇴직자를 통해서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결국 발견한 것이었다.

다만 아직은 긴가민가했다.

“퀄컴의 어원 제이콥 사장을 만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퀄컴? 어원 제이콥 사장? 아니, 왜?”

“CDMA 때문입니다.”

“흠.”

최문경 부회장은 CDMA에 대해서 들어보기는 했다. 차세대 통신 사업에 대한 검토 때문에 봤던 것이다. 다만 자세한 것까지는 몰랐지만 한 가지 사실은 알고 있었다.

“…CDMA는 TDMA 때문에 별 가능성이 없다고 했잖아?”

권재홍 비서실장은 잠시 주춤했다. 그 역시 이 문제 때문에 최문경 부회장에게 바로 보고하지 못했다. 정보가 일단 사실인지 확실치가 않았던 것이다.

“…사실 그 문제는 검토 중입니다. 더욱이 퀄컴과 같은 통신 회사는 미국 안보와도 관련이 있어서 외국인이 지분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최민혁 실장도 그런 점을 알 겁니다.”

“그래?”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권재홍 비서실장이 말하는 바를 깨달았다. 그는 슬쩍 데니스 샐로먼 이사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최 부회장님이 바쁜 것 같습니다. 지금은 지난 일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다시 약속을 잡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바로 최문경 부회장에게 인사만 남기고는 휑하니 떠났다.

“…….”

최문경 부회장은 영문을 몰라서 눈만 끔뻑였다. 고작 사과 한마디 하려고 저 자존심 강한 데니스 샐로먼 이사가 자기 앞에 나타났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당황한 권재홍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다시 말해 봐. 민혁이 그놈이 지금 미국 MIT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권재홍 비서실장은 숨길 일이 아니라서 자신이 아는 범주 내의 정보를 다 털어놓았다. 겉으로 봐서는 별다른 것이 없는 정보다.

최민혁 실장 정도라면 MIT에 인재를 스카우트하기 위해서라도 갈 수가 있으니까.

다만 CDMA란 이슈는 이야기가 좀 달랐다.

장승일 전략 기획실 실장 역시 혀를 내두르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또 실장님이 무슨 일을 꾸미는 걸까? 하지만 CDMA 쪽은 큰 메리트가 없을 텐데,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래도 한번 확인을 해 봐야겠어.’

* * *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최문경 부회장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퀄컴이란 말을 듣자 아차 싶었다.

그 자신은 이미 KM 전자를 죽이려고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퀄컴과 같은 문제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는 데이비드 싱어과 같이 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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