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
어원 사장은 최민혁 실장의 압박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혹시라도 투자자가 될지 모르는 최민혁 실장과 척을 져서는 곤란했다.
최민혁 실장과의 협상이 설사 깨진다고 해도 두 기업이 손을 잡을 분야는 많았다.
“…혹시 들어보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오현종 박사님입니다. 한국 위성 사업 서비스 설계를 한 분으로 미국 내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분입니다.”
최민혁은 씩 웃었다. 그가 딱 예상한 바로 그 대답이었다.
‘사전에 미리 손을 써두었던 것이 다행이군. 오 박사가 알아서 퀄컴 쪽하고 연락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괜찮네.’
CDMA 원천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 퀄컴.
CDMA를 연구하면 퀄컴 쪽과 연락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TDMA 진영이 이미 대세가 된 상황이다.
둘은 이익이 문제가 아니라 CDMA 확장을 위해서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물론 어느 정도 시장이 만들어지고 나면 퀄컴은 ETRI가 필요 없지. 그때는 토사구팽을 해야 할 테니까.’
최민혁은 먹튀 논란이 끊이질 않았던 1회 차 기억을 떠올리면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어원 제이콥 사장을 쳐다보았다.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책임진 오현종 박사님 말인가요?”
어원 사장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오큘러스 프로젝트와 오현종 박사에 대해서 최민혁이 알지는 상상도 못 했다.
“아시는 분입니까?”
“안면이 있는 분입니다.”
“그렇군요.”
어원 제이콥은 최민혁 실장 눈치를 계속 봤다. 최민혁 실장이 오현종 박사와 안면이 있다고는 생각을 못 한 것이었다.
“…정말 놀라운 프로젝트였습니다. 기존의 그 어떤 회사보다 완성도가 높습니다. 지금 미국 내에서도 그 서비스를 채택해야 한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입니다.”
어원 사장은 괜히 최민혁 실장과 갈등하고 싶지 않은 탓에 말을 돌려 오큘러스 프로젝트 찬양론을 계속해서 펼쳤다.
“특히 보안 측면에서 오큘러스 프로젝트가 이룩한 성과는 기존의 어떤 위성 시스템과도 차원이 다른 수준입니다!”
“특히 내부 위성 시스템은 아무리 살펴봐도 흠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발전된 시스템입니다!”
“…….”
최민혁은 순간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대한 진실을 말하려고 했는데, 그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덕분에 어원 사장의 칭찬은 끝없이 이어졌다. 낮 뜨거운 금칠에 순간 당황했다.
어원 사장은 덕분에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실제로 구현한 사람을 앞에 두고 찬양을 계속했다.
“저도 이번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보고서야 한국의 놀라운 기술 진보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MIT에서 오죽하면 ETRI 측과 공동 연구 제안을 진행했겠습니까.”
실제로 사실이기도 했다.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사용된 오디오, 비디오 압축 기술을 떠나서 보안 프로토콜부터가 기존에 사용된 방식과는 달랐다.
그것의 가장 큰 강점을 꼽으라면 더 안정화된 위성 프로토콜이라는 점이었다.
이 부분은 미국의 상업 서비스보다 한 단계 더 격이 높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미 IEEE에서 따로 분과 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이걸로 전 세계 관련 학자에게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게다가 오큘러스 프로젝트뿐만이 아니었다.
MP3, IPS-LCD 원천기술과 관련이 있는 연구 팀은 MIT뿐만 아니라 다른 미국 대학들에게서도 공동 연구를 제안받고 있었다.
전부 다 최민혁 실장이 일을 맡긴 교수들이었다.
“…이동호 교수, 송한성 교수, 김호동 박사를 말하는 겁니까?”
어원 제이콥 사장은 다소 흥분된 얼굴로 이야기하다가 최민혁의 지적에 몸을 움찔 떨었다.
“…이들 교수는 MIT뿐만 아니라 칼텍에서 강연도 진행 중……. 어, 맞습니다. 역시 최 실장님도 잘 아시는군요.”
“모를 수가 없죠.”
최민혁은 최근 이동호 교수를 비롯한 자기 지인이 바쁘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근 들어서 한국 대학과 미국 명문 대학의 교류가 활성화된 이유구나.’
덕분에 MIT 내에서 한국에 관한 이야기는 무성하게 퍼졌다.
이세현 박사나 제프리 고든이 최민혁 실장을 보고 매우 놀란 이유다. 두 사람은 최민혁 실장이 단순히 재벌 3세라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얘기를 듣던 최민혁은 이들을 더 놔둬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는 어원 제이콥 사장과 다른 퀄컴 이사진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차례대로 쳐다보았다.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단순히 돈만으로는 설득하기 힘든 인간들이지. 그렇다면 굳이 이 자리에서 숨길 이유는 없어.’
“그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실제로 설계한 사람이 저입니다.”
“네? 그게 무슨…….”
어원 사장은 황당한 눈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아니, 그는 화를 냈다. 이건 도저히 넘겨 버릴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최민혁 실장님이라도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 것입니다. 이건 협상 이전에 양심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옆에서 지켜보던 크리스 아몬 박사가 냉큼 소리쳤다.
“최 실장님, 그 말은 너무한 것 같습니다. 아무리 당신이 스타 경영인이라고 해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솔직히 당신 말을 이제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오른손을 들어서 그들 입을 우선 막았다. 그러고선 바로 한국에 전화를 걸었다. 한국은 늦은 밤이었다. 아니, 다행히 새벽 시간이었다. 오현종 박사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오, 최 실장님, 오랜만입니다. 일전에 몇 번이나 미팅을 하자고 해도 계속 거절하셨더군요. CDMA 쪽 관련해서 진행 사안을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드문드문 전화를 주다니, 섭섭합니다.]
“어?”
어원 박사는 핸드폰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크게 당황했다. 그는 불과 지난주에도 오현종 박사와 협의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은 딱히 자신을 자랑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번 경우는 그럴 수가 없었다. 중요한 협상이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위성 시스템은 잘 돌아갑니까?]
[물론입니다. 최 실장님이 만들어 준 자료 덕분에 다들 시행착오 없이 프로젝트를 돌리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에도 알려진 덕분에 우리 ETRI 역시 세계적인 연구 기관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게 모두 최민혁 실장님 덕분입니다.]
[위성 시스템을 총괄한 분은 오현종 박사님입니다. 저는 옆에서 자문했을 뿐입니다.]
[그거야 다른 사람이 모를 뿐입니다. 사실 오성 그룹 전략 회의실에서 계속 찾아와서 안재운 황태자가 이번 일을 주도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정말 짜증스럽습니다. 아니, 글쎄 200억을 투자하겠다지 뭡니까. 하지만 오큘러스 프로젝트의 핵심을 만든 분이 최민혁 실장님이라는 것을 이번 일을 담당한 실무진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
최민혁은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어원 사장에게 만족했다. 다만 그는 안재운의 이야기를 듣자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안재운 이야기는 또 뭡니까?]
[오성 그룹 내에 안재운의 평판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이용해서 띄울 생각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e오성 역시 오큘러스 지분을 이용해서 오성 그룹 내부에 공작을 진행했습니다. 외부 공작도 지금 진행 중인데, 우리 ETRI 측에 안재운 황태자가 이번 사업을 총괄했다고 말해주는 대가로 200억을 투자하겠다고 했습니다.]
[…황당하군요.]
[그런데 이게 뜻밖에 오성 그룹 내부에서는 먹혀들어 갔습니다. 실무진 대다수는 입을 꾹 다물고 있고, ETRI 내부에서도 딱히 오성 그룹을 건드릴 이유는 없으니까요.]
최민혁은 기가 막혔지만, 어원 제이콥 사장을 앞에 두고 있어 이 일을 그냥 넘겼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죠. 제가 일전에 한 충고 말입니다. CDMA 말인데, 요즘 진행은 어떻습니까?]
[아, 그건 퀄컴 쪽의 도움을 받아서 일단 진행은 하고 있습니다. 특히 CDMA 관련 기지국이나 교환기 쪽으로 검토 중인데, 과연 이 일이 잘될지는 내부적으로 말이 많습니다. 이미 TDMA 시장이 80% 이상인데, 지금 이 시점에서 CDMA가 상업적으로 가능한지 의문을 많이 제시합니다.]
[하지만 CDMA가 안정적인 면과 상업적인 면에서 꽤 강점이 있지 않습니까?]
[압니다. 문제는 기업들의 태도입니다. 다들 CDMA만 이야기해도 난색을 표현합니다. 우리 ETRI야 연구 기관이니, 순수 연구 목적으로 CDMA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되기는 하지만 과연 이게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안 그래도 이 일 때문에 연락을 드리려고 했는데, 이 부분은 최민혁 실장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자칫 프로젝트가 흐지부지될 수가 있습니다.]
ETRI가 CDMA 관련 연구를 진행하지만 지금 이 시점은 아니다. 따라서 몰락해 가는 퀄컴을 보면 상황이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이 사업에 대한 ETRI나 정보 통신부 평가는 너무 안 좋았다.
그나마 오현종 박사가 최민혁 실장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덕분에 지금까지 그럭저럭 진행된 것이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일단 제가 부탁한 대로 진행을 해주세요.]
[…뭐 다른 분도 아닌, 최민혁 실장님의 부탁인데 당연히 해야죠.]
[알겠습니다. 제가 곧 찾아뵙겠습니다.]
[네, 기다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에플 인수는 다시 한번 축하합니다. 전 최 실장님이 에플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전화를 끊고 나서는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어원 사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어원 사장이 바보가 아닌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 못 할 리가 없었다. 그는 황당한 눈으로 최민혁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오큘러스 프로젝트는 그럴 수가 있다고 쳐도 CDMA 개발 상황은 그의 예측과는 너무 많이 달랐다.
“…설마 오 박사님이 퀄컴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최 실장님 때문이었습니까?”
멋쩍은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제 자랑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원 사장님과의 협상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는 최민혁 태도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서, 설마 ETRI과의 공동 연구를 방해하실 생각입니까?”
“천만에요. 제가 굳이 그럴 일을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TDMA 진영이 이미 압도적인 상황에서 CDMA가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요? 도움이 필요할 텐데요?”
“…….”
어원 사장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사실 현실적인 문제가 컸다. 그게 아니라면 최민혁 실장을 이렇게 만날 이유도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최민혁 실장과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야 했다.
당장 K투스가 그 경우다. 아직 TDMA 진영에서는 최민혁 실장과 접촉 중이다. 다행히 그 어떤 결과도 나온 바가 없었다.
더욱이 불가능이 없다는 신념을 지닌 어원 사장도 사실 많이 지쳤다.
아마 다른 대안이 없다면, 어떻게 이대로 가기는 가겠지만 이미 한계였다.
아니, 그만이 아니라 다른 동료 역시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연구만 하는 엔지니어라서 지금 퀄컴이 처해 있는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민혁은 굳이 더 자기 자랑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어원 제이콥 사장은 힐끗 다른 동료 얼굴을 쳐다보았다. 처음과는 달리 최민혁 실장에게 반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우울한 표정이었다.
최민혁이 아니라고는 해도 오현종 박사와 관계를 보면 그가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면 ETRI도 이번 CDMA 공동 개발과 관련해서 손을 뗄 것이 분명했다.
“…이틀만 더 주십시오.”
“그럼 좋은 대답 기다리겠습니다.”
“…네.”
최민혁이 굳이 급한 것이 없었다. 퀄컴은 지금 사면초가에 놓인 상황이다. 물론 자신의 도움이 없어도 이들은 위기 상황을 극복하지만, 그들 자신의 미래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내가 없었다면, 그냥 거절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어원 제이콥 사장도 갈등을 많이 할 거야. 지금은 설사 샐로먼 브러더스도 퀄컴을 돕지 못할 테니까.’
* * *
샐로먼 브러더스는 생각보다 한국 증시에서 발생한 무리한 공매도 때문에 크게 당황했다. SEC 측에서 경고를 해왔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불법적인 일이 아니라서 당당하게 반박하기는 했다.
문제는 IRS가 샐로먼 브러더스를 조사하는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