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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82화 (482/1,021)

#482.

그는 바로 이세현 박사가 소속된 연구 팀의 일원인 제프리 고든 박사였다. 그는 이세현 박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매사에 자신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제프리 고든 박사는 결국 연구 팀에서 진행하는 일 중에 잡다한 일만 이세현 박사에게 떠넘겼다. 심지어 그보다 이제 갓 박사과정을 밟는 이들을 더 밀어주었다.

“응? 세현 씨, 어딜 가는 거야? 맡긴 혈중 산소 농도 변화에 따른 반응 측정이 끝난 거야?”

뇌 손상이 일어나면 시각이나 인지 기능이 대폭 떨어진다.

일종의 장애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경우에 뇌 피질의 혈중 산소 농도에 변화가 일어난다.

제프리 고든 박사가 말하는 것은 이 농도 변화에 대한 것이었다.

이 일은 의공학 쪽과 관련이 있어서 제프리 연구 팀이 직접 처리하기는 어려웠다.

제프리 연구 팀에서 진행하는 메인 연구는 이것이 아니다.

그들 연구는 뇌 손상에 따른 특성 변화를 근간으로 해서 대응되는 신경회로망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현재는 그 중간 단계로 컴퓨터를 이용해서 이를 시뮬레이션화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연구의 목표는 결국 뇌 손상을 대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세현 박사는 이 메인 쪽 일이 아니라 의공학 쪽의 사이드 작업을 맡고 있었다.

공학과 의학 사이에 있어서 얼핏 생각하기에는 괜찮은 영역처럼 보이지만 애매한 경우다. 의공학 쪽에서 제대로 정보를 오픈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양쪽에서 치이니, 잡일이 되어버린다.

“…아직 시간이 남았습니다.”

“매사에 그따위로 일을 하니, 제대로 된 결과가 안 나오잖아. 자네가 왜 우리 연구 팀에 배정되었는지 아직도 몰라?!”

제프리 고든 박사의 말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험악해졌다. 심지어 인신공격도 했다. 아니, 모질게 이세현 박사를 괴롭혔다.

“한국인은 다 그래? 진짜 멍청하네. 병신같이 일할 것 같으면 왜 MIT에 온 거야? 당신 때문에 내가 얼굴을 들 수가 없어!”

“죄, 죄송합니다.”

“본인 능력도 없으면서 욕심을 진짜 많이 부려. 세상이 자네를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해? 싫으면 당장에라도 때려쳐!”

“…….”

이세현 박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소심한 성격 탓에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최민혁은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이세현 박사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그는 제프리 고든 박사가 고마웠다. 그가 아니라면 이세현 박사가 박사과정을 계속할 테니까. 사실, 기존 환경에 문제가 없었다면 설득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나 다를까.

이세현 박사는 정말 억울했다. 그에게 기회가 주어줬다면 얼마든지 성과를 이룰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일 자체가 없었다.

MIT 내에도 인맥이 있고, 그들끼리 알음알음 다 해먹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앞에서 끌어주는 이와 경쟁해서 이길 수는 없었다.

물론 세계적인 천재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MIT에 들어올 정도면 다들 천재 소리는 듣는 이들이다. 따라서 이 불리한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었다.

이세현 박사는 충혈된 눈으로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그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미 많은 고민을 했다. 지금 이 기회가 놓친다면 끝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최 실장님, 그 스카우트 제안 지금도 유효합니까?”

최민혁은 분노한 제프리 고든 박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 역시 뒤늦게 최민혁 실장을 봤다. 그러곤 화를 내려다가 멈칫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네 명의 경호원을 보자 함부로 설치지 못했다.

김명준 과장의 포스는 특히 유별났다.

“전 코드가 맞는 사람을 선호합니다. 이 박사님은 그래서 딱 좋습니다.”

“좋습니다. 실장님 제안을 받겠습니다.”

“시원하시군요.”

“천만에요.”

이세현 박사는 제프리 고든 박사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들고 있던 실험 보고서를 그의 얼굴을 향해서 집어 던졌다.

아니, 심지어 모서리 부분으로 후려쳤다. 제프리 고든 박사의 얼굴에 상처가 나서 피가 흘러나왔다.

“야, 난 안 하고 만다!”

날아든 서류에 얼굴을 맞은 제프리 고든 박사는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갑작스러운 서류 싸대기를 피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 새끼가 미쳤나?”

“개새끼야, 박사과정 때려치운다고 하잖아. 너 같은 쓰레기 밑에서는 도저히 못 하겠다!!”

“하, 너 정신이 나갔구나. 이따위로 행동하고서 앞으로 MIT에서 제대로 연구할 수 있을 것 같아?”

“걱정하지 마라. 이 더러운 곳에서 단 한시라도 있기 싫으니까!”

그때 최민혁 실장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는 소심한 이세현 박사가 날뛰는 것을 흥미롭게 보다가 그의 발언 중 한 가지를 교정해 주었다.

“아, 그건 곤란해요. 이 박사가 당분간 해야 할 일이 MIT 내의 퀄컴 연구소 관리이니까.”

“네? 쿼, 퀄컴 연구소에 들어가란 말입니까?”

“으음, 조금 다르기는 한데, 비슷합니다. 알다시피 퀄컴에서 진행하는 일을 누군가 관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회사에서는 그런 일을 담당할 역량이 없어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따로 연구 팀을 신설할 겁니다.”

“…맙소사 그러면 아예 통신 연구소를 신설할 생각입니까?”

“새로 연구소를 설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퀄컴 연구소를 이용할 예정이니까. 엄밀히 말해서 CDMA 쪽은 아직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습니다. ETRI 쪽하고 중재도 해야 합니다. 거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간 연구도 해야 합니다. 일테면 이 박사님 경력과 연관되는 인공지능이 한 예입니다. 그러니 퀄컴 연구진을 도와서 어느 정도 결과를 내도록 합시다.”

“…….”

이세현 박사는 그제야 최민혁이 한 제안이 전혀 가볍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밀히 말해서 통신 전문가 수십 명이 팀을 만들어서 해야 할 일이었다.

그걸 바로 알아본 제프리 고든 박사는 오히려 비웃었다.

“정신이 나갔군. 그 일이 얼마나 복잡한 일인지 알면서 하는 소리야? 인공 지능? 하, 진짜 가소롭네. 아니, 다른 것을 떠나서 수천만 달러가 필요한 일이야. 돈이 얼마나 많다고 그딴 소리를 하는 거야?!”

이세현 박사 때문인지 흥분한 제프리 고든 박사는 최민혁을 아예 무시했다.

최민혁은 씩 웃고 말았다. 그는 새삼 자기 앞에서 돈 이야기를 하는 인물이 있다는 것이 신선하기만 했다.

“제가 돈이 좀 많습니다. 수천만 달러 정도 푼돈(?)은 돈도 아니니까.”

“뭐? 정신이 나간…….”

하지만 제프리 고든 박사도 완전히 바보는 아니었다. 아니, 그는 MIT에 들어올 정도로 천재였다. 그의 기억력은 보기 드물 정도로 뛰어났다. 그는 뒤늦게야 최민혁 실장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서, 설마 당신이 에플 대주주인 최, 최민혁 실장이라고?”

“오, 절 아니 다행입니다.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돼서 말이죠.”

“맙소사!”

제프리 고든 박사는 그제야 경악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 앞에서 욕설을 퍼부었는지 깨달았다. 억만장자 앞에서 고작 수천만 달러 타령을 했으니 말이다.

더욱이 최민혁 실장은 단순히 돈만 많은 억만장자가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에 관한 이야기는 MIT 내에서 말이 많았다.

그들이 인정하는 것 중의 하나가 최근 말이 계속 나오고 있는 K투스였다.

이 표준을 최초로 설계했다고 알려진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에플의 대주주이기도 했으니, 논란의 소지가 많았던 것이다.

최민혁은 제프리 고든 박사를 더 놀리고 싶었지만, 그 몫은 이세현 박사에게 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퀄컴 연구소 관리를 하면서 인공지능까지 손을 대면, 뇌 공학 쪽하고도 협업해야 하니까. 갑은 이세현 박사지.’

그보다는 다른 일이 있었다.

어원 사장을 비롯한 퀄컴 연구진이 뒤늦게 최민혁 실장을 발견하고는 후다닥 뛰어와서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화를 해보았지만, 연락이 되지 않아서 주변을 샅샅이 살피다가 뒤늦게 최민혁 실장을 발견한 것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미리 마중을 나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천만에요.”

최민혁 실장은 어원 사장을 비롯한 퀄컴 핵심 연구진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다만 굳은 그들의 표정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데, 내 제안을 거절할 리가 없는데. 지금 이 시절이 딱 힘든 시기지. TDMA 진영에서 갖은 협잡질을 벌이고 있을 테니. 이 타이밍에 반대할 리가 없는데?’

“…….”

다만 이들의 분위기를 잘 모르는 이세현 박사는 입을 살짝 벌린 채 어원 사장을 위시한 퀄컴 연구진이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보는 걸 보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도 어원 사장과 퀄컴 연구진이 누구인지 잘 알았다. 어떻게 보면 MIT 선배이기도 한 이들이다. 한편으로 존경하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이들조차 최민혁 실장의 앞에서는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민혁 실장은 그런 이세현 박사의 팔을 잡고 그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아, 이분은 이세현 박사입니다. 앞으로 두 회사가 손을 잡으면, 퀄컴 쪽을 책임질 분이니, 얼굴이나 익혀두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좀, 가서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최민혁은 어원 사장의 안내를 받아서 퀄컴 연구소 쪽으로 가다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패닉에 빠진 제프리 고든 박사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아는 천재 MIT 박사와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하긴 MIT 박사라고 해서 전부 다 대단한 것은 아니니까.’

다만 최민혁 실장은 어원 연구 팀 중에서 불만이 가득한 몇 사람을 보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물론 아는 척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전의 다른 거래와는 달리 이번 일은 자신이 있었다.

‘하긴 지분 매각을 마냥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래야지. 자존심이 있다면 말이야. 하지만 내 제안을 거절하기는 힘들 거야.’

* * *

최민혁이 이세현 박사를 내세운 것은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MIT 뇌공학 박사 2년 차란 말에 어원 연구 팀도 별다른 감정을 내세우지 않았다.

아무래도 같은 대학 연구원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물론 동양인이라는 불만이 없지는 않다.

문제는 최민혁 실장 때문에 그런 불만을 내비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계속 최민혁의 눈치를 보는 것을 봐서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최민혁은 어원 사장의 표정을 살피면서 묵묵히 기다렸다.

‘지금 시기라면 상황이 좀 많이 안 좋을 텐데. 후일 ETRI 쪽과 손을 잡고 어느 정도 결과를 도출했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그때는 10억 달러를 준다고 해도 받지를 않겠지. 그럼 자존심 때문인가? 지금 에플 주가를 본다면 느끼는 것이 있을 텐데, 도대체 무슨 일이지? 에플 상황을 봐서는 주식을 매각 하고 정치질을 할 리가 없어.’

최민혁의 마음을 알 길이 없는 어원 사장은 MIT 퀄컴 연구소 내부를 견학시켜 준 후에 대회의실에 그들을 안내했다.

정신을 차린 그는 새삼 최민혁 사장의 나이에 놀랐다. 아무리 봐도 자기 아들보다 어려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 재벌가는 특수 교육이라도 시키는 건가?’

물론 그는 SEC 입장도 있고 해서 말을 빙빙 돌려가면서 최민혁의 제안에 대한 거절 의사를 밝혔다.

“죄송합니다. 내부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해봤지만 아무래도 이번 제안은 받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최민혁으로서는 도저히 수긍하기 힘든 말이었다.

“이유가 뭡니까?”

“회사 내부적인 일이라서.”

“아니, 퀄컴 상황을 잘 아는 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퀄컴은 지금 심각한 상황 아닙니까? 자존심 지킬 때가 아닐 텐데요?”

어원 사장도 집요한 최민혁 실장의 지적에 몇 번이나 침묵하다가 결국 사정을 털어놓고 말았다.

“…사실 ETRI 때문입니다. 그쪽하고 이미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최민혁 실장님이 사전에 먼저 제안을 했다면 쉽게 해결되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최민혁은 그제야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벌써 ETRI가 CDMA에 관심을 뒀다면 자신과 무관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ETRI 말인가요?”

“네, 이미 ETRI와 사전 조율이 되어 가는 중이라서 최민혁 실장님 제안을 받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ETRI의 책임자를 알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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