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81화 (481/1,021)

#481.

검은 뿔테 안경에 고집스러운 모습은 딱 컴퓨터 괴짜였다.

가끔 하는 이야기에는 역시 MIT 재학생이라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물론 어두운 면도 있었다.

‘한창 고민할 때군. 연구실 내부 갈등 때문에 결국 박사과정을 포기하니까.’

최민혁은 새삼 혀를 내둘렀다. 그 역시 MIT 대학이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런데 실상 MIT 대학에 들어간 이후가 과연 창창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특히 외국인은 자칫 자기 경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면 겉돌 확률이 높다.

이세현 박사가 바로 그런 경우다.

더욱이 지금은 이세현 박사의 집안 상황이 좋지 않아서 그를 지원해 주기 어려웠다.

결국 미국 내에서 돈을 직접 벌어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다만 이세현 박사도 바보는 아니다. 그도 처음에는 최민혁이 누구인지 몰랐는데, 말을 나누다가 그의 얼굴이 뭔가 익숙하다는 것을 느꼈다.

“서, 설마 에, 에플 대주주인 최, 최민혁 실장님입니까?”

최민혁은 멋쩍은 얼굴을 지으며 자연스럽게 자신의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하하하, 제가 꽤 알려진 모양이군요. 다시 소개해 드리지만 KM 전자의 기획실장인 최민혁이라고 합니다.”

“맙소사!”

명함을 확인한 이세현 박사는 진짜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자신이 MIT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엘리트라는 자부심이 있지만, 최민혁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 역시 처음에는 최민혁 실장의 소문을 듣고 역시 재벌 금수저라고 욕했다.

MIT 내에서도 끼리끼리 놀면서 정보와 경험을 독점하는 것처럼 최민혁 역시 재벌가의 힘을 빌려서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플 인수 후에 미국 과학계에 알려진 최민혁 실장의 이야기는 좀 많이 달랐다.

그리고 지금 에플 지분의 가치만 봐도 수십억 달러가 넘는다.

이 정도의 일은 고작 재벌 3세라는 신분만 가지고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최민혁 실장에 대한 황당한 루머가 많아서 진실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최민혁의 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세현 박사가 최민혁에게서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은 그가 이룩한 성과였다. 고작 20대 초반, 대학 1학년생이 이룩한 결과물이라는 걸 그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완전히 넋을 잃은 이세현 박사의 모습에 흡족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 필요에 따라 정보를 적절하게 흘려뒀기 때문이다.

굳이 힘숨찐 노릇을 계속하고 싶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인재를 스카우트할 때는 자기 이미지 역시 무시하기 어렵다.

‘아끼다가 똥 되니까.’

최민혁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이세현 박사의 안내를 받아서 MIT 내부를 빙빙 돌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건물 좋네요. 안내 좀 해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모든 곳이 폐쇄된 하버드와는 달리 MIT는 건물이 개방되어 있다.

건물 내부가 꽤 복잡해서 잘 모르는 이는 헤매기 일쑤였다.

독특한 건물이 많은데, 창의력을 특히 강조하는 면이 있었다.

“내부 모습은 외부 모습보다 오히려 더 인상적이네요.”

“층수 구별이 어려워서 그럴 겁니다. MIT를 처음 접하는 신입생들이 이 독특한 미로 때문에 당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세현 박사는 신이 나서 MIT에 대한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최민혁 실장에게 안내를 하는 것만으로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다.

최민혁은 안쓰러운 눈으로 이세현 박사의 눈을 힐끗 쳐다보았다.

딱 영화 속에 나오는 공붓벌레의 모습이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문제가 좀 있지만, 그의 능력은 진짜였다.

‘소심한 성격만 아니었다면 MIT 내에서도 성공한 엔지니어가 되었을 텐데…….’

최민혁은 문득 자신의 인생 1회 차를 떠올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딱히 그때 자신의 모습 역시 이세현 박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이세현 박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조금 친숙해지자 슬쩍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박사님이라고 하셨죠? 이 박사님은 이상하게 이야기하기 편합니다. 사실 원래 계획한 일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MIT에 오니, 괜찮은 인재가 있다면 스카우트할 생각이 있습니다.”

“아, …네.”

이세현 박사의 눈동자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가 최근 따로 조사한 최민혁 실장은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넌지시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민혁은 이세현 박사의 표정에서 지금 그의 마음을 확신했다.

“이 박사님은 어때요?”

“네? 저 말인가요? 하지만 제 이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아마 분야가 다르겠죠. 그렇다고 이 박사님이 MIT 박사인 것은 변치 않습니다. 그 능력이면 퀄컴 쪽과 같은 통신 연구를 관리하기에 충분합니다.”

“전 전공이 그쪽과는 다릅니다.”

“뇌 공학을 전공한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러면 인공 지능이나 인지 과학 쪽일 텐데, 퀄컴 연구소와도 관련됩니다.”

이세현 박사는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그도 최민혁이 싫지 않았다. 비록 자신보다 어린 나이지만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형 같으니까.’

“제 마음이야 스카우트 제안을 거절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분야가 너무 달라서 실장님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기 힘들 겁니다.”

“하면 지금 뇌 공학에 만족할 겁니까? 딱 봐서는 연구실과도 코드가 안 맞는 것 같은데?”

“…네? 그, 그걸 어떻게?”

최민혁 실장은 피식 웃었다.

“명색이 KM 전자의 기획실장입니다. 딱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은 가능하죠. 더욱이 MIT 대학이 한국인에게 유리한 곳은 아니니까.”

“아…….”

“아, 너무 성급하게 생각 안 해도 됩니다. 퀄컴 연구소에 가기 전까지 시간은 제법 있으니까. 이건 이 박사님이라서 하는 이야기인데, 사실 오늘 퀄컴 연구소를 방문하는 것은 퀄컴 지분 매각 협상 때문이니까요.”

“…그, 그렇습니까.”

이세현 박사는 화들짝 놀랐다. 새삼 최민혁 실장이 수십억 달러 재산을 가진 억만장자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제야 10m 거리에서 따라오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경호원이었다. 최민혁 정도 되면, 경호원이 따라다니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다시 최민혁 실장을 안내하면서 이제는 계속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머릿속은 시간이 갈수록 복잡해졌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가려는 목적지가 MIT 내의 퀄컴 연구소이지만 그걸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태도에 내심 감탄했다. 어떻게 보면 MIT 내에서도 꽤 매력적인 연구소였기 때문이다.

‘정말 최민혁 실장이 맞구나. 퀄컴 연구소는 가볍게 볼 곳이 아닌데…….’

* * *

MIT 내의 퀄컴 연구소는 조용히 만들어졌다.

따지고 보면 이 연구소는 기존 퀄컴 직원이 CDMA 단말기와 장비를 만들기 위해서 기존 연구소를 확장한 것이었다.

퀄컴 자신이 CDMA 칩과 장비 제작 기술을 배워서 직접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곳 분위기는 MIT 내에 있는 일반적인 연구소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퀄컴을 만든 이들이 MIT 졸업생이기에 쉽게 진행된 일이다.

다만 이 일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불만이 많았다.

대표적인 이는 CDMA 단말기 개발을 책임진 크리스 아몬 박사다.

“어원, 정말 일을 이따위로 할 거야. 우리가 CDMA 단말기까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말이 돼? 차라리 외주를 주자니까!”

어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제대로 동작도 하지 않는 시제품을 살피면서 혀를 내둘렀다. 다른 나라에 외주를 줬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따로 연구를 진행 중인데, 정작 단말기 시제품에서 삽질 중이었다.

“기업이 그 외주를 받지 않으려고 하니까.”

“아니, 그 많은 기업 중에 우리 제안을 받으려는 기업이 하나도 없어?!”

어원 사장은 동작하지 않는 핸드폰을 실험대 한쪽에 툭 던졌다.

“있지. 그런데 또 그런 쪽은 기술이 형편없어. 이게 단말기 문제인지, 아니면 우리 기술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판단이 되지 않아.”

크리스 아몬 박사는 이번 시제품 실험에서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짜증스러웠다. 그는 결코 자신이 잘못했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쓸데없이 일을 만드는 어원 사장이 미웠다.

“정 안 되면 아시아 기업 쪽도 있잖아. 우리 퀄컴 원천기술에 관심을 보인 기업이 그렇게 없다고? 정 안 되면 연구소 쪽도 있잖아!”

어원 사장은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고백했다.

“안 그래도 한국의 ETRI 측의 오현종 팀장과 만나서 이야기하고 있어. 이미 협상도 마무리 단계야. 지금까지는 잘 풀려가고 있으니, 재촉 그만해!”

“ETRI의 오현종 박사라면 위성 방송 시스템인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완성한 이를 말하는 거야?”

“어, 그쪽에서 CDMA 단말기나 장비 개발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어. 다만 ETRI가 정부 관련 기관이잖아. 관료적인 문제 때문에 시간이 좀 걸려.”

“그분이라면, 나쁘지 않네.”

사실 어원 사장이나 크리스 아몬 박사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

오현종 박사가 CDMA 단말기와 장비에 관심을 둔 것은 최민혁 실장의 조언 때문이었다.

퀄컴 역시 무리에 무리를 하는 중에 오현종 박사의 연락을 받고 나서는 이 일에 큰 기대를 하는 중이었다.

자연스럽게 ETRI에 이어서 최민혁 실장의 이야기가 나왔다.

크리스 아몬 박사는 그제야 최민혁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화내지 않았다. 이미 퀄컴 상황이 악화하면서 투자를 받자는 이야기는 계속 나왔다.

다만 그 협상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은 것은 퀄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이게 어쩔 수가 없는 것이 퀄컴의 원천기술과 관련된 기업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후유, 또 그 이야기야. 40%나 되는 지분이라면, 나도 포함해서 다른 친구들도 지분을 내놓아야 하잖아.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어원 사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ETRI 측과 이야기가 잘되면 필요 없을 수도 있어. 그런데 ETRI가 과연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야. 거긴 사기업이 아니니까. 더욱이 지금 상황이 너무 안 좋아. 당장 주가를 봐. 1달러에서 행보한 지가 벌써 몇 년이야. 이런 상황에서는 아군을 늘릴 필요가 있어.”

“글쎄.”

크리스 아몬 박사는 뒤늦게 인터넷으로 최민혁 실장에 대한 자료를 살폈다. 뜻밖에 미국 언론에서도 최민혁 실장의 프로필을 상세하게 올려둔 곳이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너무 황당해서 그조차 고개를 갸웃했다.

“이 기사는 뭐지? 가짜 뉴스인가?”

하지만 다른 자료를 서칭할수록 크리스 아몬 박사의 눈이 점점 더 동그랗게 변했다.

“…보통 친구는 아닌데?”

어원 사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퀄컴의 핵심 멤버인 다른 이들 역시 크리스 아몬 박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자기 지분을 내놓고 싶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1달러에 지금 지분 일부를 내놓으라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각자 개성이 너무 뚜렷해서 전부 다 다른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크리스 아몬 박사도 분위기를 보고는 쾌재를 부른 채 소리쳤다.

“절대 안 돼!”

“…….”

어원 사장은 다른 친구들보다 분위기를 보고 깽판을 치는 크리스 아몬 박사가 더 미웠다. 그는 이들의 태도 변화가 ETRI 때문이라는 것을 알자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지만 ETRI는 빠르게 움직이는 사기업과는 달라. 의사 결정도 느려 터졌으니까. 그리고 이미 접촉한 몇 곳은 성과가 너무 안 좋아. 아마 그것보다 나쁠 텐데, 과연 TDMA 측과 경쟁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새삼 최민혁 실장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욱이 SEC가 중재해서 진행되는 미팅이다.

최민혁 실장을 만나기는 해야 했다.

그는 전화를 걸려고 했는데, 비서가 사전에 연락을 받고는 소리쳤다.

“…저기 사장님, 최민혁 실장님은 이미 MIT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혹시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최민혁 실장이 MIT 방문은 처음일 것 아닙니까. 길을 잃어버리셨을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뭐야? 젠장맞을.”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를 본 다른 연구원 역시 어원 사장의 뒤를 따랐다.

* * *

MIT 내를 오가던 재학생들은 경호원까지 포함해서 모두 여섯 명인 최민혁 일행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다들 신기한 걸 본다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간혹 MIT를 찾는 이들 중에 경호원을 동반한 이들이 있어서 그렇게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물론 아닌 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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