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
스티븐이 나서서 자신의 장기인 ‘설득’ 스킬을 걸었다. 특히 인문, 기술 융합을 통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서 매니아 층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피력했다.
“이 새로운 융합 영역은 이제 막 열린 겁니다. 지금 당장 도전해도 손해를 볼 이유는 없습니다.”
“유니버설은 지금 당장은 걱정이 없으니, 현실에 안주하는 겁니까. 냅스트가 이미 음원 시장을 근간부터 흔들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도전한다면 늦지는 않습니다.”
“냅스트를 그저 불법 음원 서비스라고 비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새로운 인터넷 온라인 시장이 열리는 겁니다. 그것은 기존의 시장과는 또 다릅니다.”
“유니버설이 잃을 것을 염려합니까. 하지만 새로운 온라인 서비스 시장에 적응하지 못하면, 유니버설은 결국 박살이 나고 말 겁니다.”
이 새로운 시장은 에플 빠를 중심으로 갖춰진 시장이었다.
충성도 높은 에플 매니아 층을 상대로 탄탄한 콘크리트 시장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이슈화를 시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최민혁이 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스티븐은 이미 에플이라는 브랜드를 통해서 성공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
리처드 게리 부사장은 스티븐의 능력을 무시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심각했다. 이미 냅스트 소송전에서 느낀 바가 있다. 그 깐깐한 판사가 냅스트 쪽에 손을 들어주는 것 때문이다.
지금도 판사는 두 회사가 합의 볼 것을 권유하는 중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자신의 생각으로만 이 일을 결정할 순 없었다.
“다 좋은데, 그걸 증명할 증거가 있습니까?”
“보여 드리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최민혁 실장이 뒤쪽을 향해서 손짓했다.
뒤늦게 몇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 중에는 벨린 소프트의 베트랑드 실브, 스콧 포스탈, 크레이그 행크스도 있었다.
특히 예민한 크레이그 행크스는 따가운 스티븐의 시선을 의식하자 슬쩍 시선을 피했다.
다른 두 사람 역시 불만이 가득한 스티븐의 시선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셋 다 스티븐을 배신했다고 생각해서 이 자리가 불편한 것이다.
최민혁은 세 사람보다는 그들의 뒤를 따른 강준석 팀장에게 주목했다.
강준석 팀장은 최민혁 실장에게 가볍게 눈인사한 후에 앞에 나섰다. 그는 유창한 영어를 사용해서 아이컴과 KMP-02를 시연해 보였다.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바로 K투스를 이용한 근거리 통신이다.
KMP-2를 아이컴 옆에 두는 것만으로도 MP3 음원을 자동으로 내려받고, 업로드할 수가 있었다.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무선파일 송수신이 훨씬 더 유연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강준석 팀장은 다른 무엇보다 맥 OS를 좀 더 부각시켰다.
“이 새로운 서비스는 단순히 아이컴과 KMP-02를 사용하는 것을 넘어서 일상생활상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단적인 예가 바로 차량입니다.”
차량 시스템과 KMP-02가 K투스를 통해서 정보를 공유할 수가 있다. 그것은 곧 다른 근거리 통신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K투스는 블루투스와는 달리 불필요한 호환을 할 필요가 없다.
애초에 블루투스 2.0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K투스 3.0은 효율적인 근거리 통신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
리처드 게리 부사장은 황당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날 정도였다.
강준석 팀장은 자신만만했다.
“특히 이것들은 아이컴에 내장된 프로그램을 이용해야만 가능한 겁니다. 만약 이 프로그램으로 음원을 카드 결제 할 수 있다면 유니버설 매출에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리처드 게리 부사장은 아이컴과 KMP-02의 화려한 모습에 충격을 받아서 제대로 설명을 듣지 못했다.
그는 알루미늄의 화려한 아이컴의 모습에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존의 두껍고, 못 생긴 모니터는 지금 이 자리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아이컴의 화질이다.
마치 최고 사양의 컴퓨터를 보는 듯한 아이컴의 화질은 자신의 눈을 의심케 했다.
거기에 맥 OS의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윈도우95보다 더 화려했다.
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유로운 근거리 통신이 가능한 K투스에서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저 KMP-2를 아이컴 옆에 두기만 하면 자동으로 알아서 파일이 내려받아지니 말이다.
“…이, 이건 좀 놀랍습니다. 설마 에플이 만들고 있다는 차세대 모델이 이 제품입니까?”
스티븐은 피식 웃었다.
“맞습니다.”
스티븐이 굳이 두 가지 시제품을 선보인 것은 그래야 했기 때문이다.
말로 아무리 리처드 게리 부사장을 설득해도 소용이 없다. 그 역시 에플 측의 제안을 받아들이려면 그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필요했다.
토마스 무어 팀장도 자기 생각이 성급한 판단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리처드 게리 부사장 두 사람은 아이컴과 KMP-02를 직접 만져 보았다.
터치를 통한 직관적인 사용법.
유연한 맥 OS.
두 가지 제품이 마치 한 몸인 양 자연스럽게 데이터를 주고받는 것.
기존의 윈도우95가 절대로 보여줄 수 없는 가치였다.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기꺼이.”
최민혁 실장은 협상 분위기가 긍정적으로 흘러가자 굳이 더 자리를 고집하지 않았다. 그는 스티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는 강준석 대리와 같이 회의실을 나섰다.
스티븐은 그 모습을 힐끗 쳐다본 후에 자신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3인방의 모습을 재확인하고는 아쉬운 듯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뒤늦게야 3인방의 가치를 어느 정도 알아봤다. 다만 자신 역시 벨리 소프트의 오너가 대주주인 에플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쉽구나. 아, 지금은 어떻게 보면 같은 회사인가?’
* * *
최민혁이 물론 아이컴과 KMP-02에 대한 계획을 세운 것은 맞았다. 다만 이 두 가지를 합치는 것에 대해서는 타이밍만 보고 있었다.
K투스를 사용해서 어떤 식으로 풀어갈지는 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강준석 팀장이 그걸 자기 입맛대로 먼저 기획안을 올려 버렸다.
그는 유니버설 빌딩 앞에 나와서 이런 점을 넌지시 물어봤다.
이에 강준석 팀장의 눈빛이 반짝였다.
“최 실장님이라면 반드시 두 가지를 합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한 거죠?”
“K투스 때문입니다. 근거리 통신망이 나왔는데, 굳이 그걸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K투스를 이용해서 KMP-02와 아이컴을 서로 연동하는 서비스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모바일 기기와 PC와 연동이기 때문이다.
강준석 팀장도 이 문제를 가지고 많은 고민을 했다. 게다가 한국에 있는 최민혁 실장이나 조성돈 팀장과 소통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문제였다.
그는 결국 벨린 소프트 내에 있는 엔지니어에게 따로 자문했다.
“하지만 벨린 소프트에는 천재적인 엔지니어가 세 사람이나 있습니다. 그들이라면 어떤 사양이든지 설계할 수가 있었습니다.”
“계속해 보세요.”
강준석 팀장은 최민혁 실장의 표정을 보자 이번 일을 잘했다고 확신했다. 침을 튀겨 가면서 자신이 머릿속에 생각해 둔 다양한 아이디어를 늘어놓았다.
“전 스티븐의 아이컴을 높이 봅니다. 최병연 소장님이 따로 보낸 보고서에서 확인했는데, 특히 KMP-02는 가장 기본이 되는 문화 서비스입니다. 이를 기반으로 한 부가 가치 서비스는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말만이 아니었다.
강준석 팀장은 KMP-02를 이용한 게임을 다시 보여주었다.
기존에 이미 진행되었던 게임을 업데이트한 새로운 게임은 체스, 계산기와 같은 아기자기한 것이었다.
크게 보면 최민혁이 KMP-01에서 그린 밑그림 중의 하나였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너무 작은 LCD 사이즈입니다. LCD가 좀 더 크면 더 다양한 프로그램을 깔 수가 있을 테니까요.”
“그쪽은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까?”
“네, 전 성공을 확신합니다.”
정확히는 최민혁이 스카우트한 세 사람의 엔지니어 능력을 믿었다.
그들은 강준석 팀장이 구상한 아이디어에 대한 답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들은 한국의 관료화된 기업 문화를 제대로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크레이그 행크스는 이미 KMP 플랫폼까지 개발해 놓았습니다. 지금부터 가능한 한 빨리 이것을 완성해서 프로그래머들에게 공개해야 합니다!”
“…….”
최민혁도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설마 KMP 개발 플랫폼을 벌써 완성했을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강준석 팀장은 자발적으로 계속 움직였다. 그러면서 세 사람에게 필요한 가이드라인을 잡아줬고 말이다.
더욱이 강준석 팀장은 에플 인수 이후에 에플 쪽 엔지니어와도 친하게 지냈다. 그 과정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냈다.
스스로 알아서 일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다만 그걸 왜 조성돈 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조 팀장에게는 사전 보고를 하고 하는 겁니까?”
“…죄, 죄송합니다.”
“흠.”
최민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강준석 팀장이 아무래도 미국에 따로 나와 있다 보니, 독자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을 느꼈다.
의욕이 넘치는 사회 초년생답게 조성돈 팀장을 무시한 것 같았다.
결과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이 상황을 유도한 이는 다름 아닌 최민혁 자신이었다. 그는 강준석 팀장 성향이 얼마나 독자적이고, 집요한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은 사전에 이 정보를 전달받았어야 했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벨린 소프트에서 진행되는 일에 대해서는 허락을 맡고 진행해야 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최민혁은 딱히 강준석 팀장에 대해서 화내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도 이런 흐름이었으니까. 기획 팀은 실제로 이런 식으로 할 수가 없다.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기획 팀이 이 사실을 알면 제법 긴장할 거야.’
그래도 지적할 것은 해둬야 했다.
“국내 기획 팀과는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어서 소통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강준석 팀장 혼자 일을 모두 처리할 수는 없어요. 그것만 조심해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강준석 팀장은 자신이 이번에 도를 넘었다는 것을 잘 알았다. 다행이었다. 최민혁이 이렇게 그냥 넘어가는 것이 말이다.
자신도 일을 진행하면서 너무 독단적인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막상 일하다 보니, 시간상으로 머뭇거릴 상황이 아니었다.
자기 능력을 최민혁 실장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말이다.
‘후유, 살았다. 그나저나 실장님은 다른 경영가와는 다르구나. 난 크게 혼날 줄 알았는데…….’
최악의 경우 한국으로 복귀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최민혁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실상 최민혁 실장은 겉으로는 강준석 팀장에게 경고했지만 내심은 조금 달랐다. 그가 아는 강준석 팀장은 아주 고집이 강하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 이다.
조직 내부적으로 말이 많기도 했다. 다만 그가 한 독창적인 성과를 이런 단점 때문에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지금의 아이컴과 KMP-02 연동 서비스가 그 증거였다.
‘너무 쪼는 것도 아니고, 너무 자유롭지도 않은 딱 이 정도가 좋겠지. 강 팀장이 생각보다는 알아서 잘 적응한 것 같아. 그나저나 유니버설이 어떻게 나올지가 문제군. 시기적으로 너무 빨라서 협상이 잘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유니버설의 반응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계약이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다른 방법을 만들면 그뿐이었다.
오늘 굳이 스티븐을 따라온 것은 다른 한 가지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게리 부사장을 통해서 아이컴과 KMP-02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기를 원한 것이니까. 특히 에플 투자자라면 흥미를 안 가질 수가 없지. 이제 미끼를 던졌으니, 기다리면 답이 나오겠지.’
* * *
에플 주가 상승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주식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
당연히 리처드 게리 부사장 역시 주식에 관심이 많은 이들 중의 하나다. 그는 KMP-02에 대한 흥분을 떨치지 못했다.
유니버설 이사회에서 한 이야기는 바로 이런 그 자신의 소감이었다.
[이번 스티븐 제안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행보입니다. 에플 부활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리처드 부사장님,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저도 여러분 마음을 압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에플의 차세대 제품은 최소한 대박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