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
하지만 경영과 마케팅에 대한 안목이 있는 마쿨라 이사는 달랐다. 그는 패트릭 에반스의 설명이 더해갈수록 입을 다물고 말았다.
원래 이 자리에서 패트릭 에반스 책임을 만난 것은 에플 내부의 정보를 얻기 위함이다.
그런데 최병연 소장이 에플 내에 들어와서 한 결과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할까.
비록 스티븐 덕분에 에플에서 쫓겨났다고 해도 마쿨라 이사의 안목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는 패트릭 에반스의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 이 제품에 사용된 원천기술을 어느 정도 알아봤다. 이건 베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었다.
즉, 경쟁사가 KMP-02와 같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5~6년은 족히 필요했다. 그 기간은 곧 에플의 독점 기간이나 마찬가지였다.
“고, 고맙네.”
쌓인 감정을 털어놓은 패트릭 에반스는 쓰게 웃고 말았다.
“마쿨라 이사님이 다시 에플 이사회에 복귀하셔야 합니다. 이런 쓰레기 제품으로 에플을 몰락시킬 수는 없습니다!”
“…알겠네.”
그는 패트릭 에반스와 헤어진 이후에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스티븐에게 쫓겨난 이후에 분노에 미쳐 있었는데, 막상 에플에 있을 때 자기를 따른 이들의 무능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특히 패트릭 에반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딱 봐서는 마약을 하지 않나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사람이 저렇게 변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젠장.’
* * *
최민혁은 스티븐에게 부탁한 것과는 별개로 김명준 과장에게 패트릭 에반스에 대한 조사를 맡겼다.
이 일은 크게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김명준 과장은 놀랍게도 패트릭 에반스의 행적을 상세하게 파악했다.
심지어 도청기를 사용해서 두 사람의 대화까지 얻었다.
[이런 제품이 어떻게 팔리겠습니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물리적인 키와 버튼입니다. 달랑 LCD에 터치하는 것만으로는 감성을 대체하지 못합니다. 많이 팔려 봐야 십만 대가 최대일 겁니다!]
최민혁으로서는 실로 어이가 없는 주장이었다.
“…이거, 불법 아닙니까?”
김명준 과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미국은 한국과는 상황이 달라서 경호원을 대거 늘렸습니다. 그들 중에는 정보를 취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니, 제 말은 이거 걸리면 어쩌려고 했습니까?”
김명준 과장은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 친구들은 프로이니까.”
최민혁은 김명준 과장을 잠깐 째려봤다. 무안한 김명준 과장은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그는 굳이 여기서 더 상대를 질책하지 않았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요.”
최민혁은 도청 내용을 포함해서 마쿨라 이사에 대한 정보를 확인했다.
마쿨라 이사는 워낙에 요즘 에플을 상대로 튀는 행동을 많이 한 인물이었다.
스티븐을 생각하면 손을 쓰는 것이 맞지만, 굳이 그럴 생각은 없었다.
‘뭐 에플 내부 문제는 스티븐이 알아서 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지. 어차피 인생 1회 차를 보면 스티븐이 결국에는 에플을 장악하니까.’
물론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무려 50% 이상의 에플 지분이 스티븐을 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민혁은 마쿨라 이사의 이력을 확인하다가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을 발견했다.
“마쿨라 이사의 배후에 세력이 있습니까?”
김명준 과장도 난감했다.
“그쪽은 민감한 문제라서 더 파고들지 못했습니다.”
“만만치 않은 이들인가 보군요.”
“에플 이사회였던 이들입니다. 샐로먼 브러더스와 비교해도 절대 떨어지지 않습니다.”
“…혹시 샐로먼 브러더스 쪽과 동맹은 아니겠죠?”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들이 샐로먼 브러더스와 사이가 좋을 이유는 딱히 없습니다.”
“하긴 세계 투자은행들이 같이 으싸으싸 할 이유는 없으니까.”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탐욕 때문이다.
천문학적인 자본을 다루는 이들의 사이가 좋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 보니 최민혁의 입장에서는 꽤 매력적인 세력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마쿨라 이사 쪽에 제 정보 일부를 흘릴 수 있습니까?”
“네?”
“제 말은 MP3 원천기술과 관련해서 제가 한 행적을 흘릴 수가 있냐는 말입니다.”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그러면 그렇게 하죠. 만약 제 실력의 일부만 알아도 고민을 많이 할 겁니다. 샐로먼 브러더스 쪽과 같이 움직이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말이죠.”
“…이이제이(以夷制夷)입니까?”
최민혁은 씩 웃기만 했다.
“…알겠습니다.”
김명준 과장은 헛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만 했다.
‘하긴 상황이 불리해지면 가장 먼저 뒤통수를 칠 이들이 마쿨라의 이사 배후 자본이니까.’
* * *
마쿨라 이사는 결코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스컬리와 손을 잡고, 스티븐을 몰아붙여서 스스로 물러나게끔 할 정도로 유능했다.
그는 심지어 스티븐에게 회장 자리를 권해 주기도 했다.
실권이 없는 스티븐이라고 해도 에플에 있기만 하다면 이용할 방법은 많았다.
바로 이름이다.
그런데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스티븐은 회사를 떠날 때 핵심 엔지니어와 같이 에플을 나가 버렸다.
그런데 스티븐의 귀환과 더블어서 이들이 다시 에플에 복귀하자 기존 인력에 대한 압박을 계속했다.
이게 바로 패트릭 에반스 수석 엔지니어가 배신자 역할을 한 이유였다.
하지만 마쿨라 이사는 이런 환경적인 요소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겐 자신이 얻은 정보에 대한 냉정한 분석만이 필요했던 것이다.
바로 비서 에이단 밀러였다. 하버드 출신으로 과거 에플 수석 매니저로 있으면서 자신의 왼팔 역할을 한 능력자였다.
“…이건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나도 알아. 느낌이 싸할 정도니까. 단순히 이 제품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
KMP-02는 구할 수가 없어서 KMP-01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졌다.
에이단 밀러는 패트릭 에반스와는 달리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 환경에 주목했다.
“전 다른 것을 떠나서 터치만으로 얼마든지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 소프트웨어가 걱정됩니다. 제가 확인한 바로는 이와 관련된 특허가 이미 출원되어 있습니다.”
“스티븐인가?”
“아닙니다. KM 전자 측에서 이미 상당수를 작업했습니다.”
터치와 관련된 특허는 실상 누구도 예측을 못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특허가 무려 300건이 넘게 출원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에이단 밀러도 와컴과 관련해서 추가된 3,000건이 넘는 특허에 혀를 내둘렀다.
“다른 것도 문제지만 스마트 펜 쪽은 아예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게 심각해?”
“설사 저희가 스마트 펜 업체를 사들인다고 해도 와컴의 장벽을 넘을 수는 없습니다. 와컴 대주주인 최민혁 실장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니, 이게 다가 아닙니다.”
에이단 밀러가 주목한 것은 이 터치와 관련된 이식성이 높은 모바일 OS였다. MP3 플레이어, 게임, 쪽지, 계산기와 같이 단순한 프로그램들이었지만 그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
“아이컴하고 K투스와 연동된다고 했습니다. 이건 아이컴과 K투스의 가치를 더 올려주는 제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차별성 말인가?”
“네. 아이컴을 직접 봐야 확인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 소프트웨어 장벽이 생긴다면 경쟁사와 비교했을 때 우위를 가집니다. 고객으로서는 굳이 다른 제품을 선택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하긴 에플 정책이 원래 그랬으니.”
전자 출판이라는 무기를 이용해서 시장을 독점하던 에플 시절을 떠올린 마쿨라 이사는 혀를 내둘렀다. 지금 하는 짓이 딱 그거랑 판박이다.
“…나도 스티븐을 우습게 보지는 않았지만 이런 결과를 내다니.”
“이 제품은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샐로먼 브러더스의 측의 제안은 재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심각해?”
“네.”
실상 에이단 밀러도 말을 하면서도 KMP-02의 가능성에 대해서 정확하게 언급하지 못했다. 그래도 다른 이들과는 달리 이 제품의 가치를 어느 정도 보기는 봤다.
마쿨라 이사는 설명을 들을수록 안색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에플이 이 제품을 내놓는다면 대박을 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정도가 아닐 겁니다. 스티븐이라는 브랜드를 다시 강력하게 부각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에플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도 많이 달라질 겁니다.”
그건 곧 에플 매출의 비약적인 증가로 나타날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마쿨라 이사 처지에서는 최악이다.
그 역시 스티븐처럼 에플로 귀환하려는 모든 계획이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에이단 밀러는 더욱이 김명준 과장이 흘린 정보를 얼마 전에 얻었기에 더 심각했다. 아직 확인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무시할 만한 정보가 아니었다.
“우선 에플과 스티븐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부추겨야 합니다. 그리고 스티븐도 스티븐이지만 스티븐을 밀어주는 최민혁 실장이란 인간에 대한 압박도 같이 병행해야 합니다.”
“최민혁 실장? 아니, 그 친구까지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겠어?”
“아닙니다. 제가 따로 파악 바로는 MP3 원천기술부터 시작해서 KMP-02까지 지금 에플에서 진행되는 핵심 기술을 모두 고안한 이가 이 최민혁 실장입니다.”
“패트릭 수석 매니저 이야기는 다르던데?”
조용히 이야기하던 에이단 밀러는 버럭 소리쳤다.
“지금 제정신이 아닌 그 친구 말을 전적으로 믿으면 안 됩니다!!”
냉정한 에이단 밀러의 말에 정신을 차린 마쿨라 이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에이단 밀러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는 최민혁 실장을 가볍게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만. 하면 에플 지분을 인수를 지시한 이가 KM 그룹의 최용욱 회장으로 아는데, 그게 아니란 말이야? 설마 20살짜리가 에플 인수를 밀어붙인 것을 날 보고 믿으란 소리야?”
“그건 좀 더 확인이 필요합니다.”
에이단 밀러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최민혁 실장에 관한 조사가 끝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에플 견제 때문에 그럴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믿는 이들이 없었다.
그나마 시사 초대석 이후에 최민혁이 드러나면서 상황이 좀 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감정에 휩싸인 이들은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그저 KM 그룹 최용욱 회장이 후계자 구도 선정 과정에서 최민혁 실장의 경영권 승계 문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든 선전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사정이 이랬다.
하물며 태평양 건너 미국인이 최민혁 실장 능력을 믿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예외가 있다면 전문적인 분야에 있는 엔지니어나 공학자다.
그들은 최민혁 실장이 내놓은 원천기술에 경탄을 터뜨렸다.
다만 이들 중에 과반수는 최민혁 실장의 실적을 다 믿지는 않았다. 그들 역시 KM 그룹이 배후에 있다고 생각했다.
일테면 논문 조작과 같은 부정적인 행위 말이다.
하지만 에이단 밀러는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믿는 쪽이었다.
“정확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최민혁 실장이 에플 인수도 직접 주도했다고 합니다. 물론 다 믿을 수는 없는 이야기지만 일부만 맞아도 최민혁 실장을 얕잡아 볼 수는 없습니다.”
사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도 도저히 최민혁 실장이 에플 인수를 밀어붙였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들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에서는 연일 최민혁 실장을 띄우고는 있지만, 그것도 믿지 않았다.
한국이란 작은 나라 내부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한국 재벌가가 후계자 문제를 위해서 작업했다고 믿었다.
그런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지금 최민혁의 에플 방한에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설마 최민혁이 에플을 이용해서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쿨라 이사는 KM 그룹이 스티븐과 손잡고 뭔가 하는 것이라는 것 정도는 믿었다.
“하면 어떻게 하면 좋겠나?”
“시작은 역시 스티븐입니다. 스티븐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좋아. 내가 사전에 작업해 놓을 테니, 자네가 직접 움직여!”
“…알겠습니다. 아, 이건 최악의 경우지만 에플 지분의 매각을 멈추고, 다시 사들이는 것도 고민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