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73화 (473/1,021)

#473.

“그들에게 이런 서비스 제안을 하자는 말이군요.”

“네. 나머지는 스티븐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구워삶느냐에 따라서 KMP-02이 대박이냐, 초대박이냐 갈림길이 정해질 겁니다.”

“…….”

스티븐은 침묵했다. 그는 아직 아이컴에 집중하는 것만으로 한계였다. 아이컴 이후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아이컴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지는 팔아봐야 아니까.

에플 내의 기획 팀이 어느 정도 아이컴 성공을 장담한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런데 KMP-02라니.

스티븐은 지금 이 자리에서 KMP-02와 아이컴에 대한 것을 차분하게 생각했다. 그러자 이 모든 게 자신이 그리는 큰 그림과 일치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전부터 그가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이 지금 눈앞에 실체화되어 있었다.

‘…정말 놀랍구나.’

스티븐은 천천히 KMP-02와 관련된 스펙을 확인하면서 한편으로는 의혹마저 느꼈다. 도대체 최민혁 실장이 어떻게 이런 결과를 도출해 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깨달았다.

최민혁 실장이 왜 와컴을 비롯한 몇몇 기업을 인수했는지 말이다.

스티븐이 정말 놀란 것은 KMP-02 옆에 달린 카드 길이의 검은색 펜으로 마치 노트에 필기하듯이 메모를 남길 수 있다는 점이다.

자연스러운 필기감.

메시지 패드에 관여했던 수석 엔지니어들은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들의 메시지 패드와는 격이 다른 물건이기 때문이다.

스티븐은 이미 최민혁 실장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그저 쳐다만 봤다.

하지만 하드웨어 담당인 에디 파델 수석 엔지니어는 이야기는 좀 달랐다. 그는 KMP-02를 살피는 것만으로 이곳에 담겨 있는 다양한 원천기술을 확인했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개발한 겁니까?!”

이건 그 혼자만의 질문이 아니었다. 사장실에 들어온 에플 핵심 개발진들의 공통된 의문이었다. 그들은 마치 한 몸이라도 된 것처럼 최민혁 실장의 입을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한 채 최병연 소장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바로 우리 최 소장님이 진행한 일입니다. 아, 한국에 있는 엔지니어들도 빼 놓을 수가 없군요. 다들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진짜로.”

에디 파델은 울상을 지었다.

“…우리도 열심히 일했습니다.”

특히 메시지 패드에 대한 이들의 노력은 눈물겹다고 말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당시 에플은 생존을 위해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던 시기였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경영진 내부의 갈등으로 에플이 산으로 가는 것을 봤다.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은 에플 이사회와는 많이 달랐다.

최민혁은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너무 그렇게 비하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우리 회사에도 최훈열 전무님이라는 걸출한 분이 있어서 회사를 깽판을 쳐서 파산으로 몰고 갔으니까.”

스티븐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KM 전자 내부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겁니까?”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습니다. 전 이곳에 와서 확신했으니까.”

“…….”

침묵한 에플 엔지니어와 스티븐.

그들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멍하니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경의였다.

무안한 최민혁은 아직도 공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기술진과 아맬리오 이사를 차례대로 돌아보았다.

“에플이 만약 아이컴으로 매출 규모를 키우고, 이 KMP-02에 초대박을 친다면, 에플은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에플 이사회의 복잡한 알력 싸움 따위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

스티븐이나 아맬리오 이사는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최민혁 실장의 제안은 지적할 곳이 없었다. 실패하려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그는 최민혁 실장이 이제까지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곧 한 가지 일을 떠올렸다.

“설마 KM 주가의 급등락 때문입니까?”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라고 말을 못 하겠군요. 샐로먼 브러더스가 지금은 KM 전자 공매도에 집중하지만 아마 상황에 따라서 에플에 대한 공매도 작업도 곧 진행할 겁니다.”

“그렇군요.”

스티븐은 혀를 찼다. 그 역시 샐로먼 브러더스가 어떤 곳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아이컴에 이어서 KMP-02 빨리 출시가 된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지겠어. 아마 뜨거운 맛을 보게 될 거야. 그렇다는 이야기는… 내가 할 일이 많아지겠어.’

최민혁은 KMP-2에 경악한 실무진과 깊은 생각에 잠긴 스티븐을 보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그다음 일까지 관여할 필요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이들과는 다른 표정을 한 이를 한 사람 발견했다.

이질적인 느낌.

단순히 놀란 것이 아니었다.

‘…반감이라. 하긴 에플 엔지니어라고 해서 다 믿을 수는 없지.’

물론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문제를 대비한 것이 바로 원천기술 확보였으니까.

차라리 반스티븐 사단을 통해서 KMP-02 정보가 알려진다면 샐로먼 브러더스 전선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돈에는 적도 아군도 없지. 이익이 최고이니까.’

* * *

최민혁은 원래 에플 경영에는 절대 간섭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도 눈에 뜨인 인물을 보자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서 스티븐과 따로 만나서 질문했다.

스티븐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최민혁이 찍은 인물을 잘 알았다.

“패트릭 에반스란 친구입니다. 에플에는 이미 15년 넘게 있었고, 최근 메시지 패드 개발에도 참여한 친구입니다.”

“권한이 제법 있습니까?”

“다른 직원과 트러블이 좀 있어서 진급은 누락된 친구이지만 실력만큼은 인정받습니다.”

“하면 인성에는 문제가 있다는 말이군요.”

“네?”

스티븐도 당황했다. 그도 이런 이야기를 들을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다른 엔지니어가 KMP-02를 보고 놀라기는 했지만, 반감을 드러낸 이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KMP-02에 적용된 기술에 순수하게 호기심을 드러냈으니까. 하지만 이분은 좀 다르더군요.”

“…설마 반감을 드러냈다는 말입니까?”

“네. 아마 저를 비롯한 우리 연구 팀에 대한 경쟁심일 수도 있습니다.”

“…혹시 사내 정보를 빼돌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최민혁은 씩 웃었다.

“저도 KM 전자를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별별 특이한 직원을 많이 만나 봤습니다. 그중에 꼭 문제를 일으킨 이들은 평소 태도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후유, 알겠습니다. 사내 감사 팀을 동원해서 최대한 살펴보겠습니다.”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굳이 KMP-02 정보가 외부에 흘러나가도 상관은 없습니다. 어차피 수백 건이 넘는 특허로 도배되어 있으니까.”

심지어 펜과 관련된 와컴 특허는 그 어떤 회사도 넘보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했다.

“…알겠습니다.”

* * *

최민혁의 걱정은 결코 과한 것이 아니었다.

패트릭 에반스 책임 엔지니어는 회의가 끝나기가 무섭게 에디 파델 수석 엔지니어에게 푸념을 털어놓았다.

“에디 수석님, 이대로 두고 보실 겁니까?”

“무슨 말이야?”

에디 파델 수석 엔지니어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는 질투심에 사로잡힌 패트릭 에반스의 표정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딴짓할 생각은 마!”

“아니,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아이컴 개발 상황을 보십시오. 최병연 소장이란 자가 개발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우린 그냥 옆에서 잡일만 하고 있다니까요!”

패트릭 에반스의 모습은 시기심에 사로잡힌 인간, 딱 그 꼴이었다.

여자들이 좋아할 전형적인 백인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패트릭 에반스가 인종 차별자라는 것을 익히 들은 에디 파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패트릭, 지금 회사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잘 알잖아. 자중해.”

“아뇨. 이건 제 불만이 아닙니다. 마이클, 제디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다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가 에플에서 다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구조조정을 언급한 때문인지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제법 있었다.

KMP-02 때문에 정신이 나갔던 이들조차 태도를 바꾸었다.

패트릭 에반스의 선동이 제대로 먹힌 셈이다.

패트릭 에반스는 주변의 시선을 힐끗 살핀 후에 내심 득의 어린 미소를 지었다.

“에디 수석님이 이대로 계속 소극적으로 행동한다면 우리가 설 자리는 점점 없어질 겁니다. 그리고 이 KMP-02를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솔직히 메시지 패드 판매 전만 해도 다들 혁신적인 제품이라고 떠들었지만 정작 결과를 보십시오. 이 KMP-02가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합니까?!”

목이 찢어지라 외치는 패트릭 에반스의 주장은 마냥 틀린 것은 아니다. 메시지 패드뿐만 아니라 실패한 많은 제품이 그랬으니까.

시장 상황에 따라서 KMP-02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그걸 잘 아는 에디 파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득의 어린 눈빛을 보이는 패트릭 에반스 시선에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내가 한번 이야기는 해 보겠어.”

“이대로는 절대 안 됩니다. 다시 한번 철저하게 검토를 해서 KMP-02에 리스크가 보인다면 제품 판매는 다시 고민해야 합니다!”

그는 번민에 빠진 에디 파델 수석 엔지니어를 보면서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대로는 안 돼. 도움이 필요해!’

* * *

최민혁으로서는 나름 에플과 분명히 선을 그었다.

다만 에플 내부의 변동 상황에 대해서는 지켜보기로 했다.

일단 스티븐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에플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대표적인 이가 바로 마쿨라 이사였다. 그는 스티븐에게 해고를 당한 후에 에플 이사회를 상대로 다양한 접촉을 시작했다. 물론 결과는 썩 좋지가 않았다.

에플 이사회로선 스티븐이 CEO가 된 이후에 에플이 바뀌는 것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한때 스티븐의 배후에서 멘토 역할을 했던 마쿨라 이사는 분노했다. 그는 대규모 소송을 준비하면서도 에플 내부를 면밀하게 살폈다.

그는 에플 내의 인물 중에서 유독 스티븐에 대해서 반기를 든 이들을 살폈다.

물론 그 자신이 믿을 수 있어야 했다.

대표적인 이가 바로 메시지 패드 하드웨어 개발 책임자 중의 한 명인 패트릭 에반스 책임 엔지니어였다. 그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엔지니어답게 구조조정 화살에서 잘 피해 갔다.

다만 그는 스티븐이 다시 돌아와서 설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물며 한국인인 최민혁 실장이 나서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

그런데 그가 먼저 마쿨라 이사에게 연락을 해왔다.

마쿨라 이사는 연락을 받자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사무실로 초청했다.

패트릭 에반스는 다소 격정적인 성격답게 최병연 소장과 관련된 일부터 우선 털어놓았다.

“후유,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에플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어. 자네 같은 친구가 그걸 막아야 해!”

에플 입장에서는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데 에플에서 쫓겨난 마쿨라 이사와 메시지 패드 실패 때문에 압박을 받는 패트릭 에반스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이야기였다.

패트릭 에반스 입장에서는 마쿨라 이사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는 때문에 최근 최민혁 실장이 방문한 사건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KM 전자의 KMP-01 차세대 모델 말인가?”

“네. 크기는 신용카드보다 작은데, 음악을 들을 수 있는 MP3입니다. 카세트 플레이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는 마쿨라 이사가 잘 이해를 못 하자 직접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곤 비교 대상으로 어렵게 구한 KMP-01을 보여주었다.

“…가만, 전원 버튼과 볼륨 업다운 버튼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건 이 터치 LCD면 됩니다. 터치 화면에 화면을 스크롤 하는 것만으로 조작됩니다. 심지어 K투스를 적용해서 무선 이어잭을 사용해서 쉽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불만이 가득한 패트릭 에반스는 자신이 봤던 KMP-02에 대한 설명을 너절하게 늘어놓았다. 질투에 정신이 나가서 KMP-02를 일방적으로 평가절하 했다.

“이런 제품이 어떻게 팔리겠습니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물리적인 키와 버튼입니다. 달랑 LCD에 터치하는 것만으로는 감성을 대체하지 못합니다. 많이 팔려 봐야 십만 대가 최대일 겁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