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8.
권태성 비서실장도 자잘한 문제가 불법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실 어지간한 기업이라면 오성 그룹이 힘으로 밟아서 기술을 빼돌렸겠지만, 최민혁 실장을 상대로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심지어 전략 기획실 김진석 이사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꺼낼 때 기겁해서 말렸다.
그리고 김진석 이사는 무모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전략 기획실의 다른 결정권자를 설득했다.
즉 지금 직면한 상황은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
“하면 특허료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대당 10달러만 받겠습니다. 물론 판매 대수에 따라서 추가적인 변경이 있을 겁니다. 수량이 늘어나는데, 일방적으로 10달러를 요구할 수가 없으니까요.”
“…….”
실로 애매한 요구다.
수량 베이스에 대한 특허료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수량에 따라서 특허료가 바뀔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다르게 보면 KM 전자 주식으로 장난치지 말라는 경고였다.
하지만 일방적인 요구에 자존심이 상한 임권수 부장은 황당한 태도를 보였다.
이와는 달리 권태성 비서실장은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IPS LCD 판매 단가와 비교하면 터무니없는 제안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괜한 이야기를 해봐야 최민혁 실장이 또 딴짓을 할 것이 분명했다.
10달러가 아니라 20달러, 아니, 30달러를 부를 기세였다.
어쩌면 40달러를 부를지도.
그런다고 해도 최민혁 실장은 손해를 볼 일이 아니었다.
LC 전자와 손을 잡으면 간단하니까.
권태성 기획실장도 LC 전자의 김영광 실장과 만나서 같이 공동 노선을 잡아볼까 하는 음모를 살짝 떠올리기는 했다.
그는 은근히 자신이 도발하기를 원하는 듯한 최민혁 실장의 입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면 LC 전자는 어떻게 됩니까?”
“그쪽과 오성 전자에 5:5로 주문이 나갈 겁니다.”
“흠.”
고민은 제법 길었다.
일방적인 계약이기는 한데, 최민혁 실장이 무리한 특허료를 정할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까. 그 대표적인 경우가 오큘러스 프로젝트다.
일은 최민혁 실장 본인이 다 하고는 돈만 챙기고선 조용히 뒤로 빠졌다.
최민혁 실장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면 얻는 것이 많았음에도 말이다.
‘덕분에 안재운 대리가 떠버렸지.’
잠깐 주판을 두들긴 권태성 비서실장은 괜히 최민혁 실장을 자극할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 봐야 특허비만 올라간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보다 한 가지가 더 궁금했다.
“공급 수량은 몇 대 정도로…….”
“300만 대!”
권태성 실장은 깜짝 놀랐다.
“네? 3, 30만 대 말입니까?”
“아뇨. 1차 요청 물량은 300만 대입니다.”
“아니, 그 무슨…….”
“부품 용도까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300만 대면 대략 개당 5만 원이라고 잡았을 때 무려 1,500억이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닐 것이다. 낸드 메모리 같은 부품도 들어갈 테니까.
“지, 진담으로 하는 말입니까?”
최민혁은 씩 웃었다.
“물론입니다. 필요하다면 지금이라도 계약서에 사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낸드 메모리 역시 같은 물량이 필요합니다. 아, 기존에 계약한 물량을 제외한 물량입니다.”
“아, 아니, 도대체 어떤 제품이기에 그러는지 알 수가 없군요. 혹시 핸드폰 사업에 뛰어들 생각입니까?”
“핸드폰 사업은 아닙니다.”
“하지만 2.7인치 LCD가 사용될 만한 것은 모바일 기기 외에는 없습니다.”
그는 MP3 플레이어에 LCD가 들어갈 것이라는 상상을 못 했다.
하지만 최민혁은 굳이 권태성 실장의 의문을 풀어주지 않았다.
“참 알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그쪽은 부품만 공급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다만 용도를 알면 우리 영업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 결과가 있다면 다른 쪽에도 호소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쪽에서 알아서 하셔야죠!”
권태성 비서실장은 말을 하다가 혀를 차고 말았다. 확실히 그가 신경을 쓸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그는 뒤늦게야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바로 KM 전자를 노린 공매도.
공매도 허용 후에 타깃이 된 KM 전자.
기관 투자자와 외국인 투자자 할 것 없이 모든 세력이 이번 일에 매달렸다.
그는 원래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오성 증권이란 계열사도 이번 일에 엮여 있다는 것과 물론 지금은 오성 증권도 알아서 발을 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 저기 실장님…….”
“자세한 내막은 알려줄 수 없습니다. 다만 판단은 각자 하는 겁니다. 제가 오성 그룹 일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습니다.”
“후유, 알겠습니다.”
일방적인 통보에도 권태성 기획실장은 더 질문할 수가 없었다. 그 자신도 좀 무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최소한 시도는 해봐야 하니까.
* * *
권태성 비서실장은 최민혁 실장과의 협상이 끝난 후에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 김진석 이사에게 달려가서 만났다.
김진석 이사도 처음에는 전혀 모르는 일인 양 시치미를 뚝 뗐다.
“제가 오성 증권의 일까지 관여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오성 전자의 부품이 들어갈 제품이 대박인 경우에도 그럴 겁니까?”
김진석 이사는 망설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오성 증권 쪽에도 이미 지시가 내려갔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정말입니까?”
“네, 굳이 많은 이들이 알아봐야 좋을 것이 없어서 밝히지 못한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일입니다. 이대로 최민혁 실장을 지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아뇨. 앞으로 조심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그게 무슨…….”
그는 최민혁 실장이 요청한 IPS-LCD와 64MB 낸드 메모리 공급 계약에 대해서 밝혔다.
“아무래도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거야…….”
김진석 이사도 난감했다. 아무리 전략 기획실이라고 해도 이 일 저 일 다 끼어들 수는 없었다.
KM 전자가 딱 그 경우다.
실제로 오성 증권은 오성 전자와는 전혀 다른 영역에 있었다.
다른 계열사에게 KM 전자 주식만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간섭하기 쉽지 않았다.
애초에 한 방향을 정해서 그대로 가는 것과는 좀 다른 일이다.
“…이번 KM 전자의 주가 폭락은 주주들의 차익 실현 욕구가 겹쳐서 일어난 일입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 가격대에 이르면 저절로 안정될 겁니다.”
“역시 오성 증권도 이번 일에 끼어 있군요.”
“뭐 우리가 끼었다기보다는 워낙에 큰 물주가 움직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뻔히 하락하는 주가가 보이는데, 그걸 붙잡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최소한 공매도는 자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진석 이사가 피식 웃었다.
“그건 이번 일에 낀 세력을 우습게 보고 하는 소리입니다. 살 사람이 없는데, 주가가 오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권태성 비서실장은 몇 번에 걸쳐서 김진석 이사를 설득했다.
하지만 김진석 이사는 아예 권태성 비서실장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번 일이 그의 선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더 윗선에서 움직였기 때문이다.
“압니다. 지금 당장은 지켜볼 겁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참다못해서 버럭 소리쳤다.
“전 분명히 말했습니다!”
“아, 알았으니 그만하시죠. 제가 일단 보고는 해놓겠습니다.”
권태성 비서실장은 답답한 얼굴로 김진석 이사를 쳐다보았지만,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그는 그나마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보면서 김진석 이사가 조율을 하는 것에 만족하면서도 앞날을 걱정했다.
‘하긴 최 실장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기 어렵지. 더욱이 지금 최민혁 실장은 에플을 이용해서 뭔가 꾸미고 있어. 괜히 샐로먼 브러더스 눈치를 보고 헛짓하다가 천문학적인 손해를 보고 말 거야.’
* * *
실리콘 밸리를 구성하는 도시 중의 하나인 쿠퍼티노는 샌프란시스코에 자리 잡고 있다.
그 덕분에 쿠퍼티노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모였다.
이곳의 교육열은 한국 강남 못지않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따라서 집값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에플 본사가 있는 곳이다.
다만 에플 본사에 파견을 나온 최구만 과장은 이런 쿠퍼티노의 분위기는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이보다 지금 자기 앞에 놓인 메뉴만을 본다고 정신이 없었다.
점심 시간에 맞춰 찾은 식당은 전형적인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식당인데, 메뉴 역시 다채로웠다. 다만 먹어보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라서 뭘 주문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전 치킨 수프 먹을게요.”
스티븐에게 시달려서 노이로제까지 앓는 최병연 소장이 혀를 찼다.
“그걸로 되겠어?”
“아, 전 여기 음식이 도저히 안 맞습니다.”
“어쩔 수 없잖아. 한식집은 이곳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차라리 핫도그는 어때?”
“그거라도 주세요.”
축 처진 최구만 과장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이제는 너무 피곤해서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스티븐은 미친 사람 같아요!”
스티븐에 질린 최병연 소장 역시 혀를 내둘렀다. 그는 힐긋, 다른 직원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다들 비슷한 표정이었다.
메뉴판을 보면서도 다들 뭘 시켜야 할지 수군거렸다.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호기심으로 주문을 막 시켰다가 제대로 먹지 못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전 스티븐이란 사람과는 다시는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도 많이 배웠잖아.”
글쎄, 이것을 배웠다고 해야 할지.
편집광인 스티븐은 매사 모든 일에 다 간섭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마치 엔지니어라도 된 것처럼 콜린맥 개발에 끼어들었다.
심지어 디자인마저 자기 입맛대로 계속해서 바꾸었다.
자기 딴에는 합리적인 대안을 찾는다고, 문제가 되는 일이 생기면 꼭 관련자를 다 불러 모아서 꼼꼼하게 다 확인했다.
그 와중에 또 비리가 드러나면서 잘린 사람이 벌써 백여 명이 넘었다.
덕분에 했던 일을 하고 또 해야 했으니.
더 황당한 것은 미국 에플 본사에 대한 로맨스다.
이 주변은 비싼 땅값 때문에 정말 갈 만한 곳이 별로 없었다.
음식은 비싸고, 기름기가 너무 심했다.
지금 나온 초대형 핫도그가 그 증거였다.
온갖 소스로 떡칠해서 좋아 보이지만 한국인에게는 잘 맞지 않았다.
더욱이 같이 나온 미국 치킨은 한국 치킨보다 무려 4~5배는 컸다.
“질린다니까.”
최병연 소장은 그 모습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꾸역꾸역 먹었다.
“괜찮은데?”
최구만 과장은 툴툴거렸다. 그는 치킨 수프를 먹다가 결국 남기고 말았다.
“전 도저히 못 먹겠습니다.”
“이런 기회가 자주 있겠어? 너무 그렇게 배척하지 좀 마.”
“전 배척할 랩니다.”
최구만 과장은 마치 투덜이 스머프처럼 계속 툴툴거렸다.
다행히 그를 구해준 사람이 있었다.
수행원 몇 사람을 데리고 나타난 익숙한 한 사람.
바로 최민혁 실장이었다.
“다들 여기 있었군요.”
“어? 최 실장님?!”
최병연 소장을 비롯한 이들은 다들 자리에서 바로 일어났다.
하지만 최민혁은 그들의 행동을 말렸다.
“천천히 드세요. 몇 가지 확인 때문에 방문했으니까.”
“아, 알겠습니다.”
* * *
최민혁도 KM 전자 파견 직원들의 분위기를 살피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소위 말하면 미국에서 잘나간다는 쿠퍼티노에 와서 제대로 적응을 못 한 직원들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들이 일은 제대로 했다는 점이다.
아이컴과 관련해서 문제가 된 부분은 이미 다 해결이 된 상황이다.
벌써 시제품도 나왔다.
기존 맥 OS를 채용한 아이컴은 이전 에플 제품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바로 콜린맥 때문이다.
디자인 역시 최민혁 자신이 보낸 것보다는 여러 면에서 바뀌었다.
콜린스와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역시 디자인을 이용해서 툭 튀어나온 고질적인 브라운관 문제를 극복한 점이다.
이건 인생 1회 차를 잘 아는 최민혁조차 감탄을 뱉을 일이었다.
“괜찮네요.”
최병연 소장은 한 사람을 추켜세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