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
사실 이전에는 최민혁 실장을 이용하려고 했다.
KM 전자 주식에 투자해서 재미를 크게 봤기 때문이다.
‘10% 가까이 사들였으니까.’
사실 샐로먼 브러더스 본사 기준으로 봤을 때 KM 전자 주식 차익으로 번 돈은 지금까지의 건수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놀라운 결과였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점점 성장하면서 계속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최문경 부회장과 손을 잡고 만들어놓은 계획의 근간을 흔들었다.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최문경 부회장이 몰락해서는 곤란했던 것이다.
샐로먼 브러더스의 입장에서는 막 진행하는 플랜 자체가 최민혁 실장이라는 바윗덩어리 하나에 막혀서 허우적거린 것이다.
“자네 생각은 잘 알아. 하지만 지금은 위의 지시에 따르게. 일단 이번 일로 이탈한 이들과 최민혁 실장에게 반기를 든 이들을 조사해 봐.”
“정말 답답합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최민혁 실장을 최대한 이용해서…….”
“알았으니, 그만해!”
데이비드 싱어 수석 매니저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그 역시 데니스 샐로먼 이사 혼자서 일을 진행하고 있는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최민혁 실장의 영향력이 이전과 같지 않다는 점이다.
‘정말 걱정스럽네.’
* * *
연합 SB의 움직임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KM 전자와 샐로먼 브러더스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 이들은 긴밀하게 움직였다.
특히 이번 KM 전자 주가 폭락에 관여한 이들을 상대로 철저하게 조사했다.
다만 결과는 아주 좋지가 않았다.
다들 최민혁 실장 협박에 겁을 집어먹고, 뒤로 물러난 것이었다.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내키지 않는 지시를 받은 데이비드 싱어는 그렇다고 수동적으로 임할 수가 없었다. 그는 특히 오성 증권 담당자를 상대로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설마 우리 샐로먼의 자산 규모를 알고도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겁니까?!”
전체 자산이 무려 190조가 넘는다는 소리가 나오는 회사가 바로 샐로먼 브러더스였다.
미국 5대 메이저 투자 은행 중의 한 곳이기도 하다.
월스트리트에서 수익성이 가장 높은 회사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세계적인 투자 회사가 샐로먼 브러더스였다.
오성 증권 담당자는 울상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에서 따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당분간은 최민혁 실장 눈 밖에 벗어날 짓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전전긍긍하는 오성 증권 실무진은 두 손을 싹싹 빌면서 애원했다.
그들도 샐로먼 브러더스가 무섭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당장 그들 목에 칼 겨눈 이는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이었다.
그리고 이건 다른 한국 대기업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HY 그룹은 자동차 K투스 협상 때문에 샐로먼 브러더스의 요구에 응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이번 일로 재미를 보려고 했던 이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자 다른 이들도 최민혁 실장이 무서워서 이번 일에 손을 뗐다.
결국 KM 전자의 주가 폭락은 멈추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다시 반등을 시작해서 28만 원대까지 결국 올라섰다.
“돌겠네.”
멀대같이 키가 큰 김충기 부장은 이 분위기가 걱정스러웠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영 아닌 것 같은데, 계속 이대로 밀어붙일 생각입니까?”
“본사 지시인데, 어쩔 수가 없잖아.”
“…혹시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나도 자세한 것은 잘 몰라. 아니,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마. 지금 우리 일이 더 중요하니까.”
“뭔가 다른 일이 진행되는 것 같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정말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최민혁 실장은 과거의 최민혁 실장이 아닙니다. 에플 인수 이후에 그의 위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수석 매니저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알아.”
데이비드 싱어는 몰려오는 두통 때문에 결국 담배를 문 채 오성 증권 본사를 나왔다. 그는 이번 일을 통해서 본사가 최민혁 실장을 여전히 얕잡아 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최민혁 실장을 찍어 내리려고 할 수도 있어. 사실 KM 주가가 계속 폭락해서 20만 원 이하로 내려가면 주주 총회에서 최민혁 실장을 압박할 수가 있으니까.”
그다음은 쉬운 일이다.
한번 기가 꺾인 최민혁 실장은 아무리 자신이 오너라고 해도 주주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일을 진행해서 최민혁 실장이 자신의 말을 잘 듣는 개가 되기를 원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봐서는 그렇게 되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잖아. 이미 윗선에서 결정이 난 일이야. 지금은 지시대로 할 수밖에 없어. 정 안 되면 최민혁 실장 반대편에 서 있는 DL 그룹의 김현탁 본부장 같은 이들을 살펴볼 수밖에 없어.”
“…알겠습니다.”
* * *
KM 전자의 주가는 반등에는 성공했지만 이게 꼭 안정적인 상향 곡선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하루도 안심하기 힘들 정도로 주가가 심하게 요동쳤다.
샐로먼 브러더스가 아예 작정한 것이었다.
무려 수천억의 거래량이 오갔으니까.
KM 전자의 주가는 롤러코스터 주가를 방불케 했다.
이 주가를 본 김현탁 본부장은 혀를 내둘렀다. 그는 자신이 감상구 회장에게 별다른 질책을 받지 않은 것을 잊을 정도였다.
아니, 곧 있을 재판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큼 KM 전자 주식판은 흉험하기 짝이 없었다.
“어지간한 회사라면 임시 주주총회도 열리고 난리가 났을 텐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네.”
박태정 부장 역시 이번 일에 크게 감탄했다.
“KM 전자 홍보 팀에서 KM 전자 주가와 관련해서는 인터뷰를 거절했습니다.”
“말을 했지? 주가는 시장의 자율에 맡긴다고?”
“그건 확실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KM 전자 홍보 팀도 크게 당황하고 있으니까요.”
“결국 최민혁 그 새끼가 다 결정을 했다는 말이잖아.”
김현탁 본부장은 자신이 당한 일 따위는 이제 잊어버렸다.
“최 실장 이 새끼, 정말 대단한 놈이다. 진짜 난놈이야. 하, 정말 믿기지 않네.”
그는 솔직히 지금 KM 전자 주식판을 이해하지는 못해도 뭔가 있다는 것 정도는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은 자기 재판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에플 지분은 어떻게 되었어?”
박태정 부장은 김현탁 본부장의 눈치를 보았다.
“일단 200억 물량을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평균 단가가 2.6달러라서 조금 걱정이 됩니다.”
“…뭐? 2.6달러? 아니, 왜 그렇게 많이 올랐어?!”
“스티븐 때문입니다. 요즘 미국이 온통 스티븐 이야기로 난리입니다.”
스티븐이 MIT, 하버드 대학을 중심으로 계속 홍보 활동을 이어가면서 미국 언론은 연일 스티븐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스티븐은 과거 경력도 경력이지만 마케팅이나 홍보 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그의 입담은 그의 실력만큼이나 대단했다.
그 인기는 주가에도 반영되어서 결국 3달러를 돌파해 버렸다.
다행히 에플 주가가 내려갈 때마다 분할 매수를 한 덕분에 2.6달러에 사들인 것이다.
“…어쩔 수 없지.”
김현탁 본부장은 내심 자신이 계획한 일이 다 수렁에 빠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엿같았다.
그런 차에 본 것이 바로 KM 전자 주식의 황당한 주가 변동이었다.
그는 작전주보다 더 심한 KM 전자 주가 차트를 보면서 혀를 찼다.
“차라리 공매도 제도가 있어서 다행이야.”
“공매도가 생각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많습니다.”
“알아, 그런데 지금 KM 전자의 주가를 봐. 만약 공매도가 없었다면 지금 KM 전자 주가가 얼마가 되었겠어? 아마 40만 원은 돌파했을 거야. 결국 KM 전자 시가 총액이 12조가 넘게 된다는 거잖아.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어떻게 KM 전자 주식이 40만 원이 될 수가 있어!!”
실제로 증권 감독원에서 KM 전자의 주가를 가지고 말들이 많았다. KM 전자를 상대로 제재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다른 코스피 종목과 비교해서 형평성을 한없이 비켜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공매도는 어떻게 보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무려 200만 주가 넘는 공매도 물량이 투하되었음에도 KM 전자 주가는 오히려 이 쓰나미를 온몸으로 버텨 내고 있었다.
“…….”
박태정 부장도 김현탁 본부장의 지적을 반박하지 않았다.
실제로 KM 전자의 이상스러운 폭등에 대해서 말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에플 인수 이후였다.
주목해야 할 건 KM 전자가 비록 에플 지분의 일부라고는 해도 일단 인수했다는 점이다.
KM 전자의 가치는 이제 에플의 가치와도 연결된 셈이다.
그 과정에서 벨린 투자 이야기가 나왔기는 했다.
불행히도 최민혁 실장의 이름이 주목받으면서 벨린 투자 이야기는 쑥 들어갔다.
김현탁 본부장은 내부자 거래 따위 일은 이제 잊었다. 그는 지금 당장 당면한 문제가 더 중요했다. 특히 정보가 필요했다.
“최민혁 실장, 최문경 부회장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일이 진행되는 것이 분명해. 특히 이번 KM 전자 주가 폭락에는 큰 세력이 끼어 있어. 그쪽을 중점적으로 파봐. 필요하다면 DL 그룹 인력을 배치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김현탁 본부장은 새삼 최민혁 실장을 다시 봤다.
‘K투스 3.0 발표 이후에 상황이 달라졌어. 이번 기회를 잘만 이용하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 거야. 에플 주식도 한 방편이야. 최민혁 실장, 이 인간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해야 해!’
* * *
K투스 3.0 발표 이후에 KM 전자 주가의 움직임은 이전과는 달랐다.
기존에 주춤하던 이들이 다시 뛰어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무리 샐로먼 브러더스의 파워가 대단하다고 해도 한계는 존재했다.
그 덕분에 KM 전자 주가는 27만 원이 지지대가 되어버렸다.
이 상황을 본 최민혁은 KMP-02를 위해서 다양한 준비 작업을 거쳤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IPS 소형 LCD였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LC 전자와 오성 전자 두 곳에 작업해 둔 바 있다.
그중에 하나는 다름 아닌 오성 전자였다.
K투스 3.0 발표에 한숨을 내쉬던 권태성 실장으로서는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은 주제였다.
하지만 최민혁은 그 반대였다. 그는 권태성 비서실장을 오성 전자 본사 기획실에서 만났다. 그는 적진에 들어와 있어도 마치 자기 집인 양 여유로웠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네.”
조성돈 팀장과 김명준 과장은 서로 눈치만 보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들은 오성 기획실 실무 팀과 상대를 하면 되기 때문이다.
“아, 64MB 낸드 메모리 공급이 이제 완전히 해결된 것 같더군요.”
“네. 덕분에 64MB 낸드 메모리 양산에 성공했습니다.”
권태성 실장이 푸념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KM 전자의 지원을 받아서 64MB 낸드 메모리 양산 일정을 당긴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무려 1년 이상 상업화 일정을 당긴 덕분에 64MB 낸드 메모리 사업부는 잔치 분위기였다.
단순히 KMP-01만이 아니라 다른 바이어 쪽에서 공급 요청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도시바 역시 오성 전자와 같이 공동 개발을 한 덕분에 재미를 단단히 봤다.
이 64MB 낸드 메모리 성과만으로 권태성 실장은 이미 승진 대상에 올랐다.
실상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에서 권태성 실장을 건드리지 못한 이유다.
양쪽의 분위기는 제법 좋아졌다.
최민혁은 그제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가 갑자기 이렇게 권태성 비서실장님을 찾은 것은 2.7인치 IPS-LCD 공급 때문입니다.”
“…….”
권태성 비서실장은 역시 눈치 빠르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IPS-LCD 개발과 관련해서 빼돌린 기술 때문이다.
물론 당장에는 특허 때문에 써먹을 수가 없다.
그래도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기술 개발에 들어가는 일정과 비용을 대폭 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민혁도 굳이 그렇게 소소한 것까지 언급하지 않았다. 기술이 있다고 이게 상업화가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딱히 이것과 관련된 협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계속 지금처럼 갈 수는 없었다.
“저도 오성 전자 내부에 PDP처럼 LCD와 겹치는 문제가 있는 것을 잘 압니다. 굳이 그런 부분을 언급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자잘한 문제도 넘어가죠. 제가 원하는 것은 2.7인치 IPS-LCD 공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