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
다만 그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은 다양한 형태의 대리인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최문경 부회장이 미친 것 아닙니까?!”
조성돈 팀장은 욱하는 배종대 과장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봐, 배 과장, 그거 다 지난 일이잖아. 지금 당장 우리가 직면한 일에 집중해!”
“하지만 이 회사를 보세요. 지난 5년간의 기록만 보면 온갖 사기를 친 놈들이 아닙니까. 이건 막말로 조폭에게 투자를 받은 것 아닙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냐. 나름 법률을 지키는 편이니까.”
“아니, 팀장님은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 친구도 참.”
조성돈 팀장은 길길이 날뛰는 배종대 과장을 탓하지 않았다.
실상 이번 조사를 통해서 드러난 내용은 쇼킹한 일이었다.
배종대 과장은 바로 이 점도 지적했다.
“아니, 우리 KM 전자 지분도 조건에 들어 있는 거 아닙니까. 그때는 왜 우리가 이걸 그냥 넘긴 겁니까?”
“…최훈열 전무 때문이잖아. 샐로먼 브러더스 관련 조사를 다 막았으니까.”
“하.”
배종대 과장만이 아니라 다른 기획 팀 직원 역시 다들 혀를 내둘렀다. 그들도 당시 협박에 가까운 압박을 받아서 제대로 조사를 못 했다.
하지만 그 배경에 이런 일이 깔려 있는지는 상상도 못 했다.
이들이 놀라도 이상할 건 없었다.
실제로 드러난 샐로먼 브러더스의 실적은 그만큼 쇼킹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드러나지 않은 다른 샐로먼 직원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놀라운 샐로먼 브러더스 행보에 다들 치를 떨었다.
하지만 정성근 대리는 말이 없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신이 조사한 보고서만 계속 봤다.
배종대 과장이 보다 못해서 팔꿈치로 정성근 대리를 건드렸다.
“이봐, 정 부장님은 왜 말이 없는 거냐?”
“네?”
병아리 같은 눈빛을 한 정성근 대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정 부장님이 왜 조용히 있냐고. 뭐라고 좀 의견을 말해봐!”
보다 못한 임웅 대리가 슬그머니 도와주었다.
“정 대리님도 샐로먼에 관해서 조사한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아.”
배종대 과장은 계속 정성근 대리를 괴롭혔다.
“아는 무슨 아야. 조용한 고양이처럼 있지만 말고, 지금까지 파악한 것을 말 좀 해봐!”
“그게…….”
주저주저하는 정성근 대리.
오랜만에 나오는 사람 염장 뒤집기 메소드 연기였다.
배종대 과장이 버럭 소리쳤다.
“정 대리, 너도 이제 곧 과장 진급한다고 소리가 있던데 적당히 좀 하자. 꼭 회의 중에 그래야겠니?!”
머리를 긁적인 조성근 대리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팀 눈치를 봤다. 에플 파견 때문에 몇 사람이 자리를 비워서 기획 팀 회의실 분위기는 다소 썰렁했다.
하지만 정성근 대리를 향한 시선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으음, 저도 배 과장님의 의견에 공감입니다.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님이 과연 샐로먼에 대해서 몰랐을까 하는 점입니다.”
“설마 최 부회장이 사실을 다 알고도 진행했다는 거야? 아니, 그러면 최용욱 회장님은 왜 이 사안을 통과시킨 거야?”
“아마 최용욱 회장님도 샐로먼 브러더스에 대해서 알았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면 이놈들이 이렇게 지독한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고도 손을 잡았다는 소리야? 그건 말이 안 되잖아. 회장님은 절대로 그런 분이 아냐!!”
“평소의 회장님이었다면 이 협상을 승인하지 않았을 겁니다. 당시 회장님은 절박했을 겁니다. 특히 최용욱 회장님은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에 결실을 보고 싶었을 겁니다. 최문경 부회장님은 그런 때에 회장님이 원하는 것을 줬을 겁니다.”
“…….”
다들 침묵했다.
다 알고는 있었지만 잊고 있었던 이야기다. 지금이야 KM 전자가 독보적으로 잘 나가면서 상황이 바뀌었지만 불과 연초만 해도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
정성근 대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연초만 해도 우리 그룹이 어찌 될지 다들 걱정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샐로먼 브러더스 하나 더 붙인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샐로먼 브러더스는 그런 맹점을 이용했을 겁니다.”
지금까지 정성근 대리를 괴롭히던 배종대 과장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하면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기에 샐로먼 브러더스 역시 태도를 바꾸었다는 말이야?”
“차입 공매도가 허용된 것이 그 증거입니다. 이것만 봐도 샐로먼 브러더스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차입 공매도가 허용이 되려면 단순히 정부만을 설득해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국회를 비롯한 관련 기관의 허락을 구해야 한다.
심지어 언론의 입에도 족쇄를 걸어야 했다.
아마 이 정도로 광범위한 로비가 진행되려면 적지 않은 돈이 들었을 것이다.
“아무리 국회와 정부가 썩었다고 해도 이런 제도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을 겁니다. 샐로먼 브러더스는 그만큼 절박했다는 겁니다. 아마 콜린스 초대박 이후일 겁니다. 아마 우리 KM 전자가 아니었다면 당장 일이 이렇게 전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배종대 과장은 전혀 다른 관점에 혀를 내둘렀다.
“그래서?”
“그렇다면 의외의 방법이 꽤 통할 겁니다. 당장 KMP-02만 해도 국내 출시가 아니라 차라리 해외 출시를 하는 것이 한 방법입니다.”
“야, 그게 뜻대로 쉽게 안 되잖아!”
길길이 날뛰는 배종대 과장 태도에도 정성근 대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아뇨. 방법이 있습니다. 에플 브랜드를 이용하면 됩니다.”
“응? 그게 무슨 개소리야? 우리 KM 전자 제품을 왜 에플 브랜드로…….”
이번에는 정성근 대리가 배종대 과장의 말을 막았다.
“최민혁 실장님은 에플 지분 40%를 가진 대주주입니다. 실질적으로 에플의 오너인 셈입니다. 우리 KM 전자 브랜드로 나가나, 에플 브랜드로 판매가 되나 사실 결과는 다르지 않습니다.”
“흠.”
배종대 과장은 헛웃음을 터뜨리면서 힐끗 기획 팀원들을 쳐다보았다.
다들 정성근 대리의 주장에 대해서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다들 열심히 주판을 튕겨보았다. KMP-01의 판매 대수를 토대로 유추해 보면 국내 MP3 플레이어의 수요는 뻔했다.
하지만 만약 에플 브랜드로 미국에 출시되면 상황이 좀 많이 달라진다.
수요의 규모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거기에 에플 브랜드를 입고서 미국 시장에 출시한다면, 과연 실패할 수 있을까.
뒤늦게 탄식이 나왔다.
“최 실장님이 왜 에플 인수를 그렇게 밀어붙이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몰랐는데, 그래서 그랬구나.”
“누가 우리 제품을 에플 브랜드로 둔갑시켜서 팔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아이컴이 따지고 보면 첫 타자였던 셈이죠.”
“만약 KMP-02가 에플 로고를 달고 나오면 볼만할 것 같아요.”
“아, 맞다. 아이컴 디자인 나온 거 봤는데, 정말 대박이더라고요. 만약 그런 디자인을 KMP-02에 적용하면 초대박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미 KMP-01에서 오류 문제는 다 잡았지 않습니까. KMP-02은 실패하려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역시 최 실장님이셔!”
팀 분위기를 다 듣고 난 정성근 대리는 한술 더 떴다.
“굳이 국내나 미국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KMP-02 생산 자체는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베트남 공장에 외주를 줘도 됩니다.”
조용히 두 사람 대화를 듣기만 하던 조성돈 팀장이 손을 들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합시다!”
“네?”
다들 당황한 눈으로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조성돈 팀장은 기획 팀이 올린 자료를 흩어보고는 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머지는 내가 취합해서 정리한 후에 최종 보고서를 보낼 거니, 그렇게 아세요.”
“어, 티, 팀장님…….”
“자, 오늘은 고생했으니, 일찍 집에 가도 좋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자신이 알아서 보고하겠다는 말만 남기고는 휑하니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다들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평소의 조성돈 팀장이 아니야. 왠지 최 실장님을 닮지 않았나?’
* * *
조성돈 팀장이 일방적으로 회의를 끝낸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생각보다는 잡다한 이야기가 나와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보다는 오히려 정성근 대리의 의견이 가장 좋았다.
나머지 기획 팀이 딱히 무능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올린 기획안에는 뜻밖에 전 세계 콜린스 판매를 비롯한 영업망이 잘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KM 전자가 보유한 전 세계 공장은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런데 에플을 비롯한 베트남 쪽 사정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이 모든 것을 잘 조합하면 생산량이 처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정리한 최종 보고서를 팀원에게 보냈다.
반대 의견을 듣기 위함이다.
그런데 아무도 다른 의견을 내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정성근 대리마저 말이다.
얼마나 팀 의견을 잘 조합했는지, 도저히 반론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조성돈 팀장은 최종 보고서를 정리해서 최민혁에게 보고했다.
“흠.”
최민혁은 올라온 보고서를 살피면서 내심 감탄하고 말았다.
그는 혹시 샐로먼 브러더스에 대해서 자신이 놓친 것 있나 싶어서 지시를 내렸는데, 최종 보고서는 그의 기대치를 상회했다.
‘에플 브랜드를 이용한다라. 이건 정말 괜찮은 방법이야. 스티븐 등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그리고 이게 인생 1회 차와 그나마 비슷한 루트야.’
사실 그도 KMP-02 판매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다.
월마트 측과 적당히 타협할까도 고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차라리 에플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결국 KMP-02 출시를 좀 서둘러야 한다는 말이군요.”
“어차피 샐로먼은 우리 국내에서 때려봐야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 봤자 우리가 입는 상처가 더 큽니다. 그럴 바에는 우리가 원하는 전장에서 싸우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게 미국, 아니, 에플이다?”
조성돈 팀장은 힐끗 최민혁 눈치를 보면서 툴툴거렸다.
“어차피 KM 전자나 에플이나 다 같은 회사 아닙니까.”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그 완고한 조성돈 팀장이 설마 이렇게 전향적인 제안을 할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계획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이 일을 하기 앞서서 임기석 부장에게 연락해서 K투스 공개 작업을 서두르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아, 그런데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샐로먼이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를 노려야 합니다. 그래야 이번 일을 이용해서 샐로먼 브러더스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깍지를 낀 채 깊이 고민했다.
‘K투스를 최대한 이용해서 시동을 거는 것이 좋겠지. 아마 이 기술을 알고 나면, 샐로먼 역시 발등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날뛸 거야.’
* * *
최민혁이 인생 1회 차에서 가져온 K투스는 블루투스 2.0에 가깝다. 중간에 불필요한 사양이 다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 기술은 분명히 한계가 존재했다.
그중에 하나가 페어링과 필터링이다.
이 두 가지 기능의 추가는 필수였다.
그 외에 한 가지 더한 것은 바로 고속 전송 기능이다.
이론적으로 무려 24Mbps 까지 빠르다.
다만 블루투스 3.0이 지원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여기까지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기존 K투스에 추가하는 형식이니까.
‘생각보다는 간단하네.’
그래도 이렇게 바뀐 스펙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임기석 부장은 이전처럼 매우 놀라지 않았다. 최민혁이 내놓은 기술이 한둘이 아녔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도 한 가지 제안에는 깜짝 놀랐다.
“네? 에릭슨을 비롯한 블루투스 참여 기업을 다 호출하란 말입니까?”
“그렇다고 우리 기술을 일방적으로 개방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요는 우리 K투스 기술을 기반으로 해서 그들이 참여하는 방식입니다.”
쉽게 말해서 KM 전자 마음대로 근거리 통신망 사양을 정하겠다는 뜻이다.
물론 최민혁이 이렇게 한 이유는 있다.
복잡한 근거리 통신망이 아니라 KM 전자 기반의 상업적인 통신망을 만들겠다는 의도다.
이게 된다면 기존 블루투스의 단점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