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
지금과 같은 시기에 괜한 사고를 쳤다가는 조카 최민혁이 그냥 있지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박석기 사장 소환도 자신을 노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최문경 부회장이 진짜 화가 나는 것은 최민혁 실장이 자신을 지금 이 자리에 오게끔 한 점이었다.
“…자네를 어떻게 믿지?”
“이민을 갈 생각입니다.”
윤종수 전 SB 지사장은 뜻밖에도 이민과 관련된 서류를 내놓았다. 그는 이미 한국을 떠날 계획을 굳히고 있었다.
바로 최문경 부회장에게 당하고 나서 질린 것이었다.
“…좋아. 하지만 약속은 지켜야 할 거야.”
“전 최문경 부회장님이나 최민혁 실장님 사이에 끼고 싶지 않습니다. 괜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서 신세 망칠 생각도 없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턱짓으로 권재홍 비서실장에게 지시를 내리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급한 불을 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가만, 민혁이 이놈이 나만 노린 것은 아니잖아. 어쩌면 샐로먼 브러더스를 공격한 것일 수도 있어. 아니, 둘 다인가?’
* * *
최문경 부회장은 어지간해서는 조카 최민혁의 행보를 지켜보려고 했지만, 박석기 사장 소환 이후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검찰에 소환당했던 박석기 사장이 직접 자신을 찾아와서 하소연했기 때문이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당분간은 조용히 계세요. 모든 일은 그룹 법무 팀에서 다 처리를 해줄 테니까.”
“하, 하지만 검찰에서 계속 KM 전자와 관련된 자금 이력을 들춰 보고 있습니다.”
“설사 그런다고 해도 검찰이 찾을 증거는 없어요. 관련 증거는 이미 다 정리가 되었으니까. 다만 내막을 어느 정도 아는 윤종수 전 지사장은 당분간 외국에 나가 있을 겁니다. 박 사장, 당신만 입을 조심하면 전혀 문제 없을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박석기 사장의 모습은 전형적인 아첨꾼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라도 은행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덕분에 인맥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차고 넘쳤다.
최문경 부회장이 노린 점이 바로 그것이니까.
다만 문제는 자칫 괜한 구설수가 나오는 경우이다.
혹시라도 윤석기 전 지사장처럼 돈을 노리고 양심 고백 할 인간은 차고도 넘쳤다.
최문경 부회장은 다행히 그런 성격의 인물 중에 문제가 될 이들을 권재홍 비서실장으로 하여금 비서 팀에서 따로 처리하라고 지시 내렸다.
다만 그는 급한 불을 껐다고 해서 의자에 무거운 엉덩이를 걸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일이 일단락되자마자 이번 에플 인수 문제 대응책 때문에 한국을 찾은 데니스 샐로먼 이사를 찾아갔다.
늘 냉혈한 이미지를 가진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겉으로는 최문경 부회장 방문에 크게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또 무슨 일입니까?”
최문경 부회장은 연쇄 살인마 같은 데니스 샐로먼 이사의 말투에 몸을 숙였다.
“이대로 보고만 있을 겁니까? 이번 박석기 사장 소환은 절, 아니, 우리 연합 SB를 노린 겁니다. 당장 배임 이야기마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타격이 큽니다.”
“…….”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역시 내심 이번 일에 당황했다. 전혀 예상도 못 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연합 SB의 설립 주목적이 법인 영업, 브로커 매매와 같은 도매성 영업 성향이 강하다.
샐로먼 브러더스는 단순한 목적으로 연합 SB를 설립한 것이 아니다.
얼핏 봐서는 KM 산업, 강원 산업을 비롯한 한국 중견 기업에 투자 채널을 열어준다는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사정은 좀 달랐던 것이다.
연합 SB는 까놓고 말해서 샐로먼 브러더스가 한국 금융 시장을 공략을 위해서 만든 전초기지였다.
그런 내막까지 이 자리에서 밝힐 수 없는바.
“…본사에서 검토 중인 일이 있으니, 그게 잘 해결되면 손을 쓸 겁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참을 수가 없어서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아니, 언제까지 그놈의 검토만 합니까. 더욱이 무조건 검토만 하면 해결이 된다는 말입니까?!”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질척대는 최문경 부회장이 짜증스러웠다. 하지만 아직은 최문경 부회장을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아, 아직 소식 못 들었나 본데, 다음 주면 유가 증권을 빌려서 매도할 수 있는 차입 공매도가 허용될 겁니다. 그게 시작일 겁니다.”
“네?”
차입 공매도라니.
너무도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최문경 부회장은 깜짝 놀라서 권재홍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역시 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크게 당황했다.
샐로먼 브러더스가 이제까지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뒤에서 꽤 많은 공작을 벌이고 있었다.
다만 최용욱 회장 때문에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을 뿐이다.
결국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차입 공매도 제도였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그제야 피식 웃었다.
“제가 한국에 온 것도 차입 공매도 제도를 허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사실 KM 전자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KM 전자의 에플 인수 이후에 이 문제가 극적으로 바뀌었다.
특히 KM 전자 주가가 30만 원을 돌파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KM 전자 주가가 천장이 없는 건물처럼 계속 치솟아 오르는 상황이 문제가 된 것이다.
KM 전자는 작전주와는 달리 실적을 기반으로 한 종목이었다. 다만 한 종목의 파이가 너무 커지면서 시장의 쏠림 현상이 일어났다.
기관 투자자나 외국 투자자는 이 문제를 계속 걸고넘어졌다.
특히 반최민혁 실장 파벌은 최용욱 회장에게도 은근히 반감을 품은 터라 결국 그들의 외국인 투자자의 로비 지원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들이 손에 쥔 것은 바로 기관 투자자 공매도였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차가운 눈을 번쩍였다.
“우리가 가진 주식만 가지고 KM 주가를 뒤흔드는 것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에플 주식을 통한 공매도만으로 KM 전자 주가를 뒤흔들기에도 무리가 있었고요. 그래서 이번 차입 공매도를 이용해서 우선 KM 전자의 주가를 흔들 생각입니다. 그 결과를 지켜보세요. KM 전자의 주가가 폭락하면, KM 전자의 다른 대주주도 민감하게 움직일 겁니다. 그들 역시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영향력을 키울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꽤 만족했다. 다만 그도 차입 공매도가 허용된다는 것은 처음 들었다. 아니, 간혹 정부에서 검토한다고만 들었다.
그는 샐로먼 브러더스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니. 배후에서 로비를 꽤 한 것 같아. 이제 좀 이 작자들이 움직이는 건가? 민혁이 이놈도 뜨거운 맛을 보겠군.’
* * *
KM 전자의 에플 인수는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곳에 영향을 줬다.
국내 기업이 미국 스타 기업을 인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샐로먼 브러더스가 이번 일을 명분 삼아서 미국 정부에 로비했다.
이 일은 미국 국익에도 도움이 되었기에 샐로먼 브러더스의 뜻대로 진행되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일이 바로 차입 공매도 허용이었다.
[기관 투자자와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차입 공매도를 전격 허용하다!]
사실 이 뉴스가 나왔을 때만 해도 이게 뭔지 아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전문가가 나와서 정부 대변인 노릇을 할 뿐이었다.
[주식 공매도는 단기적으로 과도하게 오른 주식 가격을 정상으로 돌리는 역할을 한다. 증권시장의 유동성을 활성화해서 자연스럽게 주가가 안정되도록 한다.]
역시 이 공매도의 단점에 대해서 제대로 언급하는 이는 없었다.
최민혁은 이 뉴스를 보면서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도 유가 증권이 없는 상태에서 파는 무차입 공매도는 허용하지 않았으니, 다행인 건가.”
인생 1회 차 기억을 다시 한번 복습한 최민혁은 자신이 벌인 일 때문에 나비효과가 일어난 것을 새삼 깨달았다.
‘샐로먼 브러더스의 반응이 지나쳐. 역시 이미 작정을 한 건가? 아니면 IMF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일까?’
최민혁도 샐로먼 브러더스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때문에 인생 1회 차의 기억을 떠올려도 이 증권 회사와 관련된 정보를 얻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얻은 샐로먼 브러더스의 정보는 어디까지나 연관 기업을 통해서 거꾸로 유추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최민혁은 혹시나 이 문제가 다른 갈등을 일으킬 것을 염려해서 장승일 실장에게 대략적인 정보를 알려주었다.
뒤늦게야 최민혁 실장과 샐로먼 브러더스 사이에 알력 싸움이 생긴 것을 안 장승일 실장은 최문경 부회장의 빠른 행보에 맞춰 발 빠르게 움직였다.
[연합 SB 사장으로 박석기 사장을 영입한 것은 마땅한 인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행권에서 경험이 많은 박석기 고문을 연합 증권 사장으로 내정한 것에 불과하다!]
KM 그룹의 발 빠른 꼬리 자르기는 마치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졌다.
최민혁은 이들의 반응을 흥미롭게 지켜보면서 어떤 식으로 다음 포석을 잡아야 할지 고민했다. 일단 타깃이 샐로먼 브러더스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돈 싸움은 무리야. 아직 내 자산만으로 상대하기가 쉽지 않아. 더욱이 KM 전자나 에플 주식을 매각할 수도 없으니.’
쉽지 않은 문제.
하지만 최민혁은 오히려 기뻤다. 이제야 좀 적을 제대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성돈 팀장을 불러 한번 이야기해 봤다.
“…우리 할아버지는 일단 물러나서 지켜보겠다는 것일까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회장님도 이전과는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 겁니다.”
“차입금 말이겠죠?”
“네. 독이 든 성배라는 것을 이제 피부로 느꼈으니, 지켜만 볼 겁니다.”
“절 믿고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이미 에플 주식까지 사들였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결과는 최 실장님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그렇습니까?”
조성돈 팀장도 이전과는 달리 돌아가는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저쪽에서 지금 하는 짓을 봐서는 KM 전자를 상대로 공매도를 걸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사전에 대비해야죠.”
“…대비라고 하시면 어떤 방법 말입니까?”
“에플 주식을 상대로 미국에서 공매도해서 재미를 못 봤고, 국내 KM 주식을 팔아 치워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아마 상대는 이번 공매도 허용을 이용해서 국내 KM 전자만을 노릴 겁니다.”
“하면…….”
최민혁은 위기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번 일을 잘만 활용하면 샐로먼 브러더스에 상당한 타격을 줄 것이라 예상했다.
“일단 기획실도 분위기를 알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 샐로먼 브러더스에 대한 세부적인 조사도 진행해 보세요. 이자들의 약점은 뭐고, 뭘 공격해야 할지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물러나면서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샐로먼 브러더스와 완전히 척을 질 것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아는 짧은 지식만으로 생각했을 때 샐로먼 브러더스는 결코 만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니, 오성 그룹보다 실상 더 위험하지. 자산 규모만 놓고 본다면 한국 10대 대기업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이니까.’
* * *
샐로먼 브러더스는 몇 년 전에 국고 채권에 허위 입찰을 했다. 이 일 때문에 무려 2억 달러에 가까운 벌금을 부과받았다.
위험을 감수하는 데 막대한 보너스를 제공하는 것이 이 회사의 기업 문화다.
한국 회사 차원에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KM 전자 기획 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조성돈 팀장의 지시를 받을 때만 해도 샐로먼 브러더스란 회사를 전혀 몰랐다.
아니, 연합 SB 계열사 설립 때문에 본 적은 있지만, 그저 아, 저런 회사가 있구나 정도였다.
하지만 조사를 하면 할수록 드러나는 이 회사의 수법에 치를 떨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회사의 규모다.
이제 KM 전자의 체급도 오성 전자와 맞결투를 해도 괜찮을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샐로먼 브러더스는 덩치 자체가 달랐다.
배종대 과장은 샐로먼 브러더스의 규모를 알고 나서 경악했다. 그가 특히 놀란 것은 샐로먼 브러더스와의 합작 건이었다.
과거 차입금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 배후가 바로 샐로먼 브러더스였다.